뒷산에서 ‘똥’을 누다 시 한 수 얻다 / 안도현
시는 ‘대변’을 ‘똥’이라고 말하는 양식
영감과 시상 떠오르는 순간 곳곳에 있어
언제 어디서든 받아쓸 자세가 돼야
3. 시마(詩魔)와 동숙할 준비를 하라
‘똥’이라는 말은 얼마나 향기로운가! ‘똥’이 삶의 실체적 진실이라면 ‘대변’은 가식의 언어일 뿐이다. 시는 ‘대변’을 ‘똥’이라고 말하는 양식이다. 그리하여 시는 ‘똥’이라는 말에 녹아 있는 부끄러움까지 독자에게 되돌려주고,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 즐거워 슬그머니 미소를 띤다.
모름지기 시를 쓰려고 하는 사람은 ‘똥’에 유의해야 한다. 절대로 ‘똥’을 무시하거나 멀리해서는 안 되며, ‘똥’이라는 말만 듣고 코를 싸쥐어서도 안 된다. 똥을 눌 시간을 겸허하게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똥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하며, 똥하고 친해져야 한다. 똥을 사랑하지 않고는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사랑할 수 없다. (똥을 괄시했다가는 얼굴에 똥칠당하기 쉽다.)
지난해 여름 나는 지리산 실상사 근처에서 한 보름 지낸 적이 있다. 시집 원고를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번잡한 세상의 일들을 뒤로 밀쳐두고 싶은 욕심도 없지 않았다. 내가 묵은 곳은 산 중턱의 외딴집이었다. 그 집 뒤로는 인가가 한 채도 없었다. 지리산의 한 능선이 구불구불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방안의 가재도구라고는 빗자루와 쓰레받기, 휴지통 하나가 전부였다. 인터넷이나 전화도 없었다. 방 한 칸이 집 한 채인 집이었다. 다행히 전기가 들어와서 밤에 책을 읽을 수 있었고, 마당가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세수를 할 수 있었다. 그 외딴집은 그야말로 꿈에 그리던 집이었다.
밤늦게 글을 쓰다 보면 늦잠을 자기 마련이어서 아침밥은 걸렀고, 점심과 저녁은 실상사 공양간에서 얻어먹었다. 그렇게 하루 두 끼를 먹고 이튿날 눈을 뜨면 어김없이 뱃속에서 신호가 왔다. 화장실까지 한참을 걸어 내려가야 하는 게 귀찮아서 매일 뒷산에서 ‘큰일’을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절밥을 먹었으니 땅에게 똥을 돌려주는 일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삽 한 자루와 휴지만 달랑 들고 숲 속으로 가면 곳곳에 내 똥을 받아줄 자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나는 산에서 똥을 누는 사람이 되었다. 아, 나는 그 아침의 오묘하고 향기로운 냄새를 잊지 못한다. 그것은 똥 혼자서만 풍기는 냄새가 아니었다. 흙과 똥이 어울려 만들어내는 기막힌 화음이었다. 도시의 화장실은 똥을 감추고 그 냄새를 지워버리려고 애를 쓰지만, 흙은 숨기지 않고 아주 익숙하게 받아들일 줄 안다.
사람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양변기에 눈 죽은 똥은 금세 잊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흙속에 눈 똥은 쉽게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흙속에서 똥은 오롯이 살아서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기를 꿈꾸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 덕분에 시 한 편을 얻었다.
뒷산에 들어가 삽으로 구덩이를 팠다 한 뼘이다// 쭈그리고 앉아 한 뼘 안에 똥을 누고 비밀의 문을 마개로 잠그듯 흙 한 삽을 덮었다 말 많이 하는 것보다 입 다물고 사는 게 좋겠다// 그리하여 감쪽같이 똥은 사라졌다 나는 휘파람을 불며 산을 내려왔다// ─똥은 무엇하고 지내나?// 하루 내내 똥이 궁금해// 생각을 한 뼘 늘였다가 줄였다가 나는 사라진 똥이 궁금해 생각의 구덩이를 한 뼘 팠다가 덮었다가 했다.
제목은 <사라진 똥>이다. 나는 도라지꽃 앞에서, 싸리꽃 앞에서, 칡꽃 앞에서, 애기원추리꽃 앞에서, 이름도 모를 버섯들 앞에서 매일 똥을 눴다. 그러고는 삽으로 꼭꼭 덮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절밥을 먹고 똥을 땅에게 돌려주었더니 땅은 또 많은 것을 내게 선물하였다. 매미소리, 새소리, 계곡 물소리, 소나무를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아침마다 나를 응원하는 듯하였다. 실상사 약사전의 부처님께 나도 무엇인가를 바치고 싶었다. 그리하여 <공양>이라는 제목의 시 한 편이 더 씌어졌다.
싸리꽃을 애무하는 山(산)벌의 날갯짓소리 일곱 근// 몰래 숨어 퍼뜨리는 칡꽃 향기 육십 평// 꽃잎 열기 이틀 전 백도라지 줄기의 슬픈 미동(微動) 두 치 반// 외딴집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낙비의 오랏줄 칠만 구천 발// 한 차례 숨죽였다가 다시 우는 매미 울음 서른 되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와 향기들을 ‘일곱 근’ ‘육십 평’ ‘두 치 반’ ‘칠만 구천 발’ ‘서른 되’로 계량화한 것은 처음부터 의도한 것이었다. 2007년 7월부터 정부에서는 표준도량형 제도를 시행한다고 밝힌 바 있다. 도량형을 통일함으로써 여러 단위의 혼용에서 오는 국가적 손실을 없애고 그 편리성과 효용을 국민이 누리게 한다는 취지가 그것이다. 이른바 실용적인 필요성 때문에 법적 구속력이 있는 표준도량형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물론 경제적인 가치를 기준으로 볼 때는 백번 옳은 말이다.
그러나 시는 실용과 경제의 반대편에 똬리를 틀고 있는 그 무엇이다. 때로는 어슬렁거림이고, 때로는 삐딱함이고, 때로는 게으름이고, 때로는 어영부영이고, 때로는 하릴없음인 것이다. 시는 실용적이고 도덕적인 가치와는 다른 시적 가치를 요구한다. 그것은 세상의 미학적 가치를 탐구하는 일인데, 우리는 그것을 시작(詩作)이라고 하거나 시적 순간을 찾는 일이라고 말한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에 묻혀 살다 보면 시적인 순간은 쉽게 우리를 찾아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다. 영감(靈感)이나 시상(詩想)이 떠오르는 시적 순간은 의외로 곳곳에 산재해 있다. 초보자는 시적 순간이 수시로 입질을 하는데도 그것을 낚아채는 때를 놓쳐버리기 일쑤다. “영감이 오는 순간에 당신은 신과 하나가 될 수 있다. 번득이는 첫 생각과 만나는 순간 당신은 자신이 알고 있던 것보다 더 큰 존재로 변화한다. 우주의 무한한 생명력과 연결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나탈리 골드버그,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그렇다. 시인이란, 우주가 불러주는 노래를 받아쓰는 사람이다. 언제, 어디서든 메모지와 펜을 챙기고 받아쓸 준비를 하라. 잠들기 5분 전쯤 기발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갈 때, ‘아, 내일 아침에 꼭 그것을 써야지!’ 하고 생각만 하고 잠들어버리지 마라. 영감은 받아 적어두지 않으면 아침까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나도 그렇게 해서 놓친 시가 수십 편이나 된다. 아쉬워해도 소용없다. 그래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아예 메모지와 펜을 머리맡에 두고 잔다. 시마(詩魔)가 나를 괴롭힌다 싶으면 화장실에도 놓아둔다. 속주머니에도 넣어둔다. 당신도 시마와 동숙할 준비를 하라.
안도현 (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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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대변’을 ‘똥’이라고 말하는 양식
영감과 시상 떠오르는 순간 곳곳에 있어
언제 어디서든 받아쓸 자세가 돼야
3. 시마(詩魔)와 동숙할 준비를 하라
‘똥’이라는 말은 얼마나 향기로운가! ‘똥’이 삶의 실체적 진실이라면 ‘대변’은 가식의 언어일 뿐이다. 시는 ‘대변’을 ‘똥’이라고 말하는 양식이다. 그리하여 시는 ‘똥’이라는 말에 녹아 있는 부끄러움까지 독자에게 되돌려주고,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 즐거워 슬그머니 미소를 띤다.
모름지기 시를 쓰려고 하는 사람은 ‘똥’에 유의해야 한다. 절대로 ‘똥’을 무시하거나 멀리해서는 안 되며, ‘똥’이라는 말만 듣고 코를 싸쥐어서도 안 된다. 똥을 눌 시간을 겸허하게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똥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하며, 똥하고 친해져야 한다. 똥을 사랑하지 않고는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사랑할 수 없다. (똥을 괄시했다가는 얼굴에 똥칠당하기 쉽다.)
지난해 여름 나는 지리산 실상사 근처에서 한 보름 지낸 적이 있다. 시집 원고를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번잡한 세상의 일들을 뒤로 밀쳐두고 싶은 욕심도 없지 않았다. 내가 묵은 곳은 산 중턱의 외딴집이었다. 그 집 뒤로는 인가가 한 채도 없었다. 지리산의 한 능선이 구불구불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방안의 가재도구라고는 빗자루와 쓰레받기, 휴지통 하나가 전부였다. 인터넷이나 전화도 없었다. 방 한 칸이 집 한 채인 집이었다. 다행히 전기가 들어와서 밤에 책을 읽을 수 있었고, 마당가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세수를 할 수 있었다. 그 외딴집은 그야말로 꿈에 그리던 집이었다.
밤늦게 글을 쓰다 보면 늦잠을 자기 마련이어서 아침밥은 걸렀고, 점심과 저녁은 실상사 공양간에서 얻어먹었다. 그렇게 하루 두 끼를 먹고 이튿날 눈을 뜨면 어김없이 뱃속에서 신호가 왔다. 화장실까지 한참을 걸어 내려가야 하는 게 귀찮아서 매일 뒷산에서 ‘큰일’을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절밥을 먹었으니 땅에게 똥을 돌려주는 일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삽 한 자루와 휴지만 달랑 들고 숲 속으로 가면 곳곳에 내 똥을 받아줄 자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나는 산에서 똥을 누는 사람이 되었다. 아, 나는 그 아침의 오묘하고 향기로운 냄새를 잊지 못한다. 그것은 똥 혼자서만 풍기는 냄새가 아니었다. 흙과 똥이 어울려 만들어내는 기막힌 화음이었다. 도시의 화장실은 똥을 감추고 그 냄새를 지워버리려고 애를 쓰지만, 흙은 숨기지 않고 아주 익숙하게 받아들일 줄 안다.
사람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양변기에 눈 죽은 똥은 금세 잊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흙속에 눈 똥은 쉽게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흙속에서 똥은 오롯이 살아서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기를 꿈꾸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 덕분에 시 한 편을 얻었다.
뒷산에 들어가 삽으로 구덩이를 팠다 한 뼘이다// 쭈그리고 앉아 한 뼘 안에 똥을 누고 비밀의 문을 마개로 잠그듯 흙 한 삽을 덮었다 말 많이 하는 것보다 입 다물고 사는 게 좋겠다// 그리하여 감쪽같이 똥은 사라졌다 나는 휘파람을 불며 산을 내려왔다// ─똥은 무엇하고 지내나?// 하루 내내 똥이 궁금해// 생각을 한 뼘 늘였다가 줄였다가 나는 사라진 똥이 궁금해 생각의 구덩이를 한 뼘 팠다가 덮었다가 했다.
제목은 <사라진 똥>이다. 나는 도라지꽃 앞에서, 싸리꽃 앞에서, 칡꽃 앞에서, 애기원추리꽃 앞에서, 이름도 모를 버섯들 앞에서 매일 똥을 눴다. 그러고는 삽으로 꼭꼭 덮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절밥을 먹고 똥을 땅에게 돌려주었더니 땅은 또 많은 것을 내게 선물하였다. 매미소리, 새소리, 계곡 물소리, 소나무를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아침마다 나를 응원하는 듯하였다. 실상사 약사전의 부처님께 나도 무엇인가를 바치고 싶었다. 그리하여 <공양>이라는 제목의 시 한 편이 더 씌어졌다.
싸리꽃을 애무하는 山(산)벌의 날갯짓소리 일곱 근// 몰래 숨어 퍼뜨리는 칡꽃 향기 육십 평// 꽃잎 열기 이틀 전 백도라지 줄기의 슬픈 미동(微動) 두 치 반// 외딴집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낙비의 오랏줄 칠만 구천 발// 한 차례 숨죽였다가 다시 우는 매미 울음 서른 되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와 향기들을 ‘일곱 근’ ‘육십 평’ ‘두 치 반’ ‘칠만 구천 발’ ‘서른 되’로 계량화한 것은 처음부터 의도한 것이었다. 2007년 7월부터 정부에서는 표준도량형 제도를 시행한다고 밝힌 바 있다. 도량형을 통일함으로써 여러 단위의 혼용에서 오는 국가적 손실을 없애고 그 편리성과 효용을 국민이 누리게 한다는 취지가 그것이다. 이른바 실용적인 필요성 때문에 법적 구속력이 있는 표준도량형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물론 경제적인 가치를 기준으로 볼 때는 백번 옳은 말이다.
그러나 시는 실용과 경제의 반대편에 똬리를 틀고 있는 그 무엇이다. 때로는 어슬렁거림이고, 때로는 삐딱함이고, 때로는 게으름이고, 때로는 어영부영이고, 때로는 하릴없음인 것이다. 시는 실용적이고 도덕적인 가치와는 다른 시적 가치를 요구한다. 그것은 세상의 미학적 가치를 탐구하는 일인데, 우리는 그것을 시작(詩作)이라고 하거나 시적 순간을 찾는 일이라고 말한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에 묻혀 살다 보면 시적인 순간은 쉽게 우리를 찾아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다. 영감(靈感)이나 시상(詩想)이 떠오르는 시적 순간은 의외로 곳곳에 산재해 있다. 초보자는 시적 순간이 수시로 입질을 하는데도 그것을 낚아채는 때를 놓쳐버리기 일쑤다. “영감이 오는 순간에 당신은 신과 하나가 될 수 있다. 번득이는 첫 생각과 만나는 순간 당신은 자신이 알고 있던 것보다 더 큰 존재로 변화한다. 우주의 무한한 생명력과 연결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나탈리 골드버그,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그렇다. 시인이란, 우주가 불러주는 노래를 받아쓰는 사람이다. 언제, 어디서든 메모지와 펜을 챙기고 받아쓸 준비를 하라. 잠들기 5분 전쯤 기발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갈 때, ‘아, 내일 아침에 꼭 그것을 써야지!’ 하고 생각만 하고 잠들어버리지 마라. 영감은 받아 적어두지 않으면 아침까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나도 그렇게 해서 놓친 시가 수십 편이나 된다. 아쉬워해도 소용없다. 그래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아예 메모지와 펜을 머리맡에 두고 잔다. 시마(詩魔)가 나를 괴롭힌다 싶으면 화장실에도 놓아둔다. 속주머니에도 넣어둔다. 당신도 시마와 동숙할 준비를 하라.
안도현 (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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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 경험해 보셨나요?
옛 시인들은 시마(詩魔)가 있다고 믿었다. 시에 사로잡힌 상태를 말한다. 이 귀신이 몸에 붙으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고, 몸과 마음이 온통 시에 쏠리게 된다. 시를 쓰는 사람은 대체로 이 귀신을 맞이해서 앓아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규보는 시마에 대해 이렇게 토로했다.
“네가 오고부터 모든 일이 기구하기만 하다. 흐릿하게 잊어버리고 멍청하게 바보가 되며, 주림과 목마름이 몸에 닥치는 줄도 모르고, 추위와 더위가 몸에 파고드는 줄도 깨닫지 못하며, 계집종이 게으름을 부려도 꾸중할 줄 모르고 사내종이 미련스러운 짓을 하더라도 타이를 줄 모르며, 동산에 잡초가 우거져도 깎아낼 줄 모르고, 집이 쓰러져가도 고칠 줄을 모른다. 재산이 많고 벼슬이 높은 사람을 업수이 보며, 방자하고 거만하게 언성을 높여 겸손치 못하며, 면박하여 남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며, 여색에 쉬이 혹하며, 술을 만나면 행동이 더욱 거칠어지니, 이것이 다 네가 그렇게 시킨 것이다.”
―정민의 『한시미학산책』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