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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문학장르/좋아하는 詩

K의 근황/김개미

by 광적 2021. 12. 13.

K의 근황/김개미

 

 

 

   자네가 발기부전이라는 소식 들었네. 미안한 말이지만 그 말을 듣고 난 자네가 부럽더군. 발기부전이라니! 그런 증상은 자네 말고 나한테 찾아왔어야 하는데 말이네. 이 얘길 어떻게 꺼내야 할지 난감하구먼. 사실 나는 요즘 나의 페니스가 원망스럽다네. 왜 그렇게 발기가 잘 되는지 말이네. 아, 정말 이 얘긴 누구한테도 한 적이 없네. 자네니까 내 가장 친한 친구 자네니까 내 믿고 얘기함세. 정확히 한 달 전에 말이네. 나에게 이상한 일이 생겼다네. 그러니까 그 날도 나는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애인과 함께 있었다네. 지나친 상상은 하지 말게. 다른 연인들처럼 우리도 호텔 방에 들었다네. 창문 밖에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 외진 저수지 근처의 호텔이었다네. 세상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네. 밖에는 바람이 많이 불고 있었는지 소나무가 쉬지 않고 흔들렸다네. 그래, 본론으로 들어감세. 알잖나. 그런 곳에서 사랑하는 애인과 뭘 하겠나. 나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작고 예쁜 애인 위에 올라가 있었네. 성감이 좋은 짧은 커트머리 나의 애인은 그날도 몹시 사랑스러웠다네. 볼이 발그레한 그녀가 섬세한 리듬을 타고 내 귀와 목덜미에 키스를 하였다네. 행복했다네. 평생토록 그녀의 예쁜 호흡 속에서 살고 싶었다네. 그녀와 나는 보이지 않는 풍선을 타고 보이지 않는 꽃구름 속으로 막 들어가고 있었다네. 꽃구름 속에 이마가 쑥 들어가고 눈앞에는 후두두둑 꽃비가 떨어졌다네. 그런데 바로 그때 아, 일이 터지고 만 거네. 갑자기 머리가 극렬하게 아프지 뭔가. 내 생전 그런 두통은 처음이었다네. 아니, 평생 경험한 그 어떤 통증보다 더 아팠다네. 한꺼번에 이를 다 빼면 그만한 통증이 올까. 무겁고 커다란 쇳덩이에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네. 머릿속에 원자폭탄이 던져진 것 같더구먼. 소리 없는 폭발과 함께 뜨거운 진동이 머리에 꽉 차지 뭔가. 끔찍하더군. 투통으로 사망하는 최초의 호모 사피엔스가 되는 줄 알았다니까. 그런데 그 타이밍이 참 절묘했다네. 그녀가 절정에 도달하고 나도 막 절정에 들어서는 순간 그 일이 일어난 거라네. 나는 기쁨에 찬 그녀의 아름다운 신음소리를 들으며 머리를 감싸 쥐어야만 했다네. 뭐? 음 그래 미안하네. 그런 와중에도 사정은 했네. 그런데 두통이 너무 심해 오르가슴을 맛보기 힘들었네. 오르가슴이 지나간 다음에 두통이 생겼다면 얼마나 좋았겠나. 그런데 오르가슴과 두통의 시작점이 같았단 말이네. 저주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은밀하고 강력한 저주네. 당연히 병원에 갔지. 신경내과에서 혈관 조영술과 뇌파검사를 하였다네. 그러니까 그게 이상하네. 검사 결과 아무 이상이 없었다네. 나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운데 이상이 없다니 그게 말이 되나? 이상이 없으니 당연히 치료법도 없다네. 의사가 내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은 두통약을 처방해 주는 것뿐이었네. 그래서 나는 요즘 처방전 없이는 살 수 없는 강력한 두통약을 가지고 다닌다네. 섹스를 하기 30분 전에 꼭 약을 먹는다네. 아, 나는 이제 섹스도 시간 맞춰 해야 하네. 말해 뭐 하겠나. 내가 얼마나 답답했겠나. 이런 얘길 어디 가서 누구에게 하겠나. 나한텐 자네 밖에 없네. 지난주에는 인터넷 검색을 해보지 않았겠나. 놀라지 말게. 나와 같은 증상을 가진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많더군. 성교시 두통, 검색해보게. 그런데 나는 그 일이 나에게 닥치기 전에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네. 자네는 지금 나한테 들었으니 나와 같은 일이 생겨도 많이 놀라지는 않겠군. 고맙게 여기게. 아무것도 모른 체 당하면 정말 당황스럽다네. 걱정만 자꾸 늘어 걱정이네. 나중에는 대변을 보기 전에도 두통약을 먹어야 할지 어찌 알겠나. 병은 자랑하라고 하지만 이런 얘기는 아무에게도 못 한다네. 자네한테도 어렵게 꺼낸 얘기라네. 그러니 자네, 발기부전은 오히려 형편이 나은 거네. 원인이 있질 않나. 원인이 있는 병은 원인을 제거하면 되질 않나. 나는 이상이 없다니 고칠 것도 없네. 고맙네. 자네가 아니었으면 내 어디 가서 누구한테 이 얘기를 하겠나. 자네의 힘찬 발기를 비네. 좋은 하루 되게.

* 김개미 님의 여성시인이시고, 동시도 많이 발표하십니다.

 

1971년 강원 인제 출생, 2005년 《시와 반시》에 시를, 2010년 《창비 어린이》에 동시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 『앵무새 재우기』 『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 동시집 『어이없는 놈』 『커다란 빵 생각』 『쉬는 시간에 똥 싸기 싫어』, 그림책 『사자책』 『나의 숲』 『나랑 똑같은 아이』, 시그림집 『나와 친구들과 우리들의 비밀 이야기』를 냄. 제1회 문학동네 동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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