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일기장/권예자
나무는
쉽사리 제 이력을 말하지 않는다
특별한 신분이 되고나서야
개인 등록증이 만들어질 뿐
그들의 이력 뽑아 볼 일 없다
나무들이 꼭 해야 하는 일은
거짓 없는 일기를 쓰는 일
바람이 어루만진 감촉
구름이 걸터앉아 들려준 말
꽃들이 내뿜던 향기로운 추파와
달빛이 작곡한 세레나데를 기록한다
폭풍에 맞서던 처절한 기억
딱따구리가 쪼아낸 몸피의 통증도
제 몸 갈피에 촘촘히 새겨 넣는다
숫자를 배우지 않아
이익과 손해를 모르고
걷는 방법도 몰라
늘 제자리에서 늙어간다
누군가 달라고 손을 내밀 때마다
망설임 없이 나누어 주는 큰손을 가졌다
세상과 작별한 후에 비로소 공개되는
나무들의 비밀일기장
시집 『비밀 일기장』2015.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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