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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있는 것들/문학의 갈피

시에 대한 몇 가지 오해

by 광적 2008. 5. 9.
                        시에 대한 몇 가지 오해 / 이성복 시인 외...


우리는 시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 손이 분명히 해보다 작지만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 있으므로 ‘해보다 손이 크다’라는 착각을 한다. 시에 대한 우리들의 편견 중에 하나가 비유가 많으면 시적이라고 착각하는 경우이다. 영화 "LONG SHIP"에서 잃어버린 황금종을 찾아 3년을 헤매다가 마지막으로 종이 있다고 하는 하얀 섬에 도달했을 때, 결국 거기서 발견한 것은 그 "섬 전체가 종"이란 것이었다. 이것은 바로 시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비유의 비유, 시 자체가 비유인 경우다. 김소월의 시에 무슨 비유가 있는가. 하지만 소월의 시는 한 편의 시 자체가 곧 비유이다. 씨리한(?) 비유를 쓸 바엔 쓰지 말아야 한다. 현실 자체가 황금종이며 이것을 발견하는 사람이 곧 예술가이다. 시적인 수필을 쓰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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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체험을 많이 하면 좋은 시를 쓸 것이다, 감정이 풍부하면 더 좋은 시를 쓸 것이다’ 라는 편견이 있다. 시의 3요소는 작가, 대상, 언어인데 시가 시를 쓰는 사람 아래 있다는 착각을 갖는다. 말하자면 시인의 체험과 감정에 의해 좋은 시가 탄생한다는 것. 착각이다. 그러면 대상이 우위인가? 대나무를 바라보다 병이 났다는 왕양명의 "格物致知" 일화도 있지만 대상에 대한 치밀한 탐구가 곧 좋은 시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시는 절대적으로 말에 있다. 말라르메도 시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말’이라고 했다. 말에는 온갖 현실의 오물이 묻어있다. 그러므로 말을 제대로 따라가면 현실은 저절로 드러난다. 말이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축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말은 내시경이다. 이를 통해 ‘緣起’를 따라 간다. 말을 통한 발견이 필요하다. 시에서 웅변은 가장 저급한 것이다. 눌변이 좋다. 시에서는 말이 감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따라서 시는 곧 말장난이다. 그러나 많이 드러난 말장난은 안 좋다. 말장난이긴 하지만 의미 있는 말장난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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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시보다는 시작 노트가 더 좋은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시는 시작 노트 쓰듯이 써야 한다. 시를 쓴다는 의식 아래 시를 쓰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 좋은 시를 쓸 수가 없다. 녹차는 첫물을 걸러 내고난 뒤 두 번째가 가장 맛있다. 이는 모든 운동의 원리가 된다. 골프는 ‘힘 빼는데 3년’이라고 한다. 테니스도 어깨와 손목에 힘을 빼야 원샷을 할 수 있다. 내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 말이 움직이는 게 더 자연스럽다. 시를 쓰려고 하지 말고 시작노트 쓰듯이 써야 한다. 실제로 김종삼 시인의 <시작노트>라는 시는 그의 그 어떤 작품보다도 가장 아름답다.
비슷한 이야기지만, 사물을 묘사할 때는 명함판 사진을 그리려 하지 말고 스냅사진을 그리도록 해야 한다. 스냅 사진이야 말로 한 순간 속에 "영원"이 들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명함판으로 봐서야 무슨 애틋한 느낌이 들겠나. 명함판 사진은 공적인 차원의 사회적 가면이다. 명함판이 가장 비시적이다. 로댕은 손의 표정을 기막히게 표현해내는 조각가인데 많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가 그런 작업을 한 것은 얼굴은 거짓말을 하지만 손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 외국 명문 극단 배우들이 가면을 쓰고 연기연습을 하는 것은 손으로, 몸짓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익히기 위해서다.
그런 차원에서 글을 쓸 때 문어로 쓰지 말고 구어를 써라. 밥해 놓고 3일 지난 게 문어다. 구어 속에는 모든 것이 다 있다. 언어의 생생한 리듬이 있다. (베토벤의 일화; ‘내가 돈이 어디 있나, 이 사람아~ (♩♬♩)’ 이 가락이 유명한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 시 쓸 때 말을 혀로 굴려볼 필요가 있다. ‘얼굴’이라는 말보다는 ‘상판떼기’가 훨씬 실감나지 않는가. 비어, 속어, 사투리, 은어는 시어의 보고이며, 구어는 곧 활어이다.
자신이 지금 시를 쓴다고 생각하지 말고 얘기를 한다고 생각하라. 피아노 소리는 피아니스트의 어깨를 보면 알 수 있다. 완전히 풀려야 한다. 힘을 빼려고 하면 더 힘이 들어간다. 잡생각을 지우려면 다른 걸 채워야 한다. ‘마음을 비웠다’라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비우려면 채워야 한다. 자신에게 말하듯이, 사랑하는 이에게 하듯이, 기도하듯이 말을 하라. 결국 머리가 몸을 뻣뻣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원칙들은 모든 예술에 통한다. 예술에 통하는 것은 곧 스포츠에 통한다. 곧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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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슬프게 하는 시들

안도현


처음부터 끝까지 묘사 한 줄 없이 자기 뱃속에 든 것을 줄줄이 쏟아 놓기만 하는 시는 나를 슬프게 한다. 얼마나 말을 하고 싶었으면 시라는 형식을 빌어 일방적인 고백을 할까 싶기도 하지만, 시의 옷을 입고 이리저리 시달리는 그 언어는 또 얼마나 몸이 아플 것인가. 말을 하고 싶어도 참을 줄 알고, 노래를 시켜도 한 번쯤은 뒤로 뺄 줄 아는 자가 시인일진대, 어두운 노래방에서 혼자만 마이크를 잡고 있는 시인은 나를 슬프게 한다.
또한 시인이란, 감정의 물결을 슬기롭게 조절하면서 헤쳐 나갈 줄 알아야 할 터이다. 시란 깊은 강물 위의 노젓기와 같아서 감정을 밀었다가 당기고, 당겼다가 미는 데서 그 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인데,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하고 한 자리에 뱅뱅 도는 시는 나를 슬프게 한다. 앞으로 나아가야 뒤가 보이고, 뒤로 물러서야 앞이 보이는 법 아니겠는가.
술을 먹지도 않고 술에 취한 것처럼 보이는 시가 있다. 아침에 한 말을 저녁에 또 하고, 3년 전에 한 말을 5년 후에 또 되풀이하는 시는 나를 슬프게 한다. 수많은 '역전앞'과 '고목나무'와 '서해바다'와 '풀장'의 동어반복이 나를 슬프게 한다.
밤톨만한 돌멩이에다가 설탕물을 바른 시도 나를 슬프게 한다.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 소중하고 고귀한 게 사랑이라는 것을 그 누가 모르랴마는, 암컷과 수컷의 달콤한 속삭임만 옮겨 적는 대필자가 되어서는 곤란하지 않겠는가. 모든 암수가 밥을 먹고 똥을 싼 뒤에 짝짓기를 한다는 사실은 왜 관심을 두지 않는가. 때로 사랑도 독약이라는 것, 희망도 아편이라는 것을 왜 모르는가. 알면서도 왜 모르는 척하는가.
시에서 구체성은 감동의 원천이고, 삶의 생생한 근거이다. 구체성의 습지에 몸을 비벼댄 흔적이 없는 시는 나를 슬프게 한다. 미당의 시에 나오는, 옛날의 '누이의 손톱'보다 나는 말년의 '할망구의 발톱'이 더 좋은 것이다. 누이는 재기 넘치는 허구이고 할망구는 깊어진 현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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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대한 斷想 (우이시 3월호)

고창수(시인)


나는 그간 마음에 탐탁하리만큼 좋은 시를 많이 썼다는 느낌은 별로 없다. 시에 깊이 몰두하여 혼신의 노력을 한 경험도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시창작을 나름대로 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본 일은 있다. 두서 없는 아래 내용 중 나의 인상 내지 추측에 불과한 것도 있다. 이 글에서 나는 시의 사회적 기능보다는 예술적인 면에 치중하고자 한다.

1. 시의 범위

나는 시의 범위를 매우 넓게 잡고 있다. 인간의 인식, 사상, 희망, 번뇌, 환상, 느낌, 감정 등을 시적 장치로 표현한 것은 일단 시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본다. 물론 시의 속성과 기능은 다종다양하며, 시대, 지역, 이념에 따라 그 양상이 조금씩 다르다. 시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으며 변용을 거듭할 것이다.

2. 시의 기능

시를 하나의 꽃에 비유한다면 한국시는 한국말이 피워내는 꽃이다. 시인은 이 꽃을 아름답게 피워내고, 아울러 한국어를 순화하고 풍부하게 하고 깊게 하는데 이바지해야 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이 있지만, 한국 민족의 존재의 총체를 담았다고 할 수 있는 한국어의 세계를 넓고 깊게 또한 비옥하게 하는데 시인은 기여를 해야 한다. 한국어가 가지고 있는 시적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데에도 진력해야 할 것이다. 또한 시인은 자기의 모국어와 시의 지평을 넓히기 위하여 많은 탐색과 실험을 하여야 한다. 우리의 생활양식과 내용은 급격히 변천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시의 형식과 내용도 변하고 있고 또한 변해야 한다. 시인은 또한 인간의 정신적 활동의 앞장을 서야 한다.
시가 인간의 현실에 뿌리를 내려야 함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시가 예술인 이상 시인은 역사적 현실 못지 않게 예술적 현실을 중요시해야 한다. 아울러 시는 상상력에 의하여 심화되고 풍부해져야 된다. 예술작품에서 상상과 허구를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상상력도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경험과 전혀 무관하다고는 할 수가 없다. 상상이나 꿈, 무의식 같은 현상은 인간의 개별적 경험 및 원초적인 집단 경험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다고 하여 예술창작에서 상상, 환상 또는 허구를 경시해서는 안 된다. 가령 누가 음악작품이 일상적인 현실만 그대로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시인들의 말장난을 경계하는 말을 종종 듣는데, 물론 말장난만으로 시가 될 수는 없겠으나, 어떤 의미에서 시는 때로는 말장난 속에서 태어난다. 시인의 기능 중에는 음악가, 화가, 철학가와 비슷한 기능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개념을 염두에 두고 나는 시의 창작에 임한다. 시인으로서의 나의 주된 관심은 나 자신과 남의 현실적 희로애락과 존재론적 번뇌를 포함한다.
시는 무엇보다도 읽을 거리, 볼 거리를 제공하고 독자에게 어떤 깨달음과 감동을 주어야 한다. 또한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 그러한 내용이 없는 시를 독자들은 읽을 시간 여유가 없을 것이다. 시인은 시창작을 위한 기본 훈련이 된 이후에는 가능하면 자기의 재능과 감수성에 맞는 특유의 시창작 활동을 전개해야 할 것이며, 이는 한국시의 다양화를 위하여 필수적이다.

3. 시의 소재 및 창작과정

나는 시의 소재를 일상생활, 사색, 독서, 명상에서 찾을 때가 많으며, 계획적으로 소재를 미리 정해놓고 한 줄 한 줄 쓰는 경우와 우연한 착상 또는 미적충동, 영감 같은 것이 동기가 되어서 즉흥적으로 시를 쓰는 경우가 있다. 타자기 앞에 앉아 즉흥적으로 시를 쓰는 경우 자유연상법 또는 자동기술법 비슷한 발상법을 사용할 때가 있으며 (이런 방법은 동서양 공히 옛날부터 사용되어온 기술이다), 소재를 오랫동안 염두에 두고 시구를 한 줄 한 줄 메모하면서 써내려 가는 경우도 있다. 나는 의도적으로 좋은 시를 쓰려는 노력은 별로 하지 않고 있으며, 시 작업을 생활의 일부로 삼고 있다.
나는 시를 창작하는 행위가 시의 바다에 낚시를 드리우는 것에 견주어 볼 때가 있다. 이러한 바다는 나의 일상적 현실과 의식 및 무의식의 세계를 내포한다. 이러한 바다를 풍족하게 하기 위하여 나는 한국의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을 꾸준히 읽었으며, 세계문학도 가능한 한 많이 읽고 있다. 한국어에 대한 친숙과 애착을 심화하려고 노력한다. 지하철, 음식점, 시장, 극장 같은 곳에서도 사람들의 육성을 경청한다. 한국시인은 마땅히 한국의 시적, 문화적 전통 속에서 창작을 하는 것이지만 세계 문학에서도 인류 공통의 시적 형식과 내용을 얻어올 수 있다. 나는 시인으로서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중요시하며 나름대로 시적, 철학적 사색을 계속한다. 종종 신들린 것 같은 심적 상태에서 시를 쓰는 경우도 있다.

4. 시어

시인은 자기 모국어 속에 나있는 희로애락의 상처 내지 흔적에 대하여 민감하다. 그리고 그러한 상처 내지 흔적은 개인의 시어에 옮겨져서 그 기쁨과 아픔을 전달해야 한다. 시인은 자기 모국어의 긴장과 가락과 음악을 가장 잘 활용하는 사람이다. 시인의 언어는 용수철처럼 탱탱하게 감겨져 있어서 농축, 긴장, 가락 등을 지녀야 한다. 모국어에 대한 시인의 책무는 그것을 자기의 시창작을 통하여 순화, 심화, 확대하는 일이다. 기본 훈련으로서 시인은 모국어가 가지고 있는 음악성을 터득해야 하고 그것을 조장해야 한다. 시어는 고양, 농축, 충전, 격앙된 언어이다. 산문의 언어와 시어가 다른 점은 여기에도 있다. 시인은 언어에 대한 감수성을 계속 연마해야 한다.

5. 시의 운율

운율은 시의 맥박이다. 이 맥박은 시인 개인의 맥박일 뿐 아니라 한국사람과 한국말의 맥박이기도 하다. 이 맥박은 또한 한민족의 원초적인 맥박이고 태고로부터의 율동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러한 맥박 속에서 자기의 시의 리듬을 얻어온다. 이 율동은 한민족의 희로애락이 배인 것이며, 한민족의 울음소리와 웃음소리가 섞여 있는 것이다. 나의 경우 어떤 음악적 충동이 시의 영상과 내용의 자극이 되는 경우가 있다. 리듬은 시에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리고 시의 구성요소인 음악성(리듬), 이미지, 사상은 서로 얽혀져 있고 피와 살이 통하고 있어서 그 어느 하나를 따로 떼어낼 수가 없다.

6. 시적 형상화

시인은 어떤 생각이나 사상을 자기의 의식, 무의식 속에 내면화하고 소화하고 나서 자기의 시 속에 형상화해야 한다. 추상적이고 생경한 사상은 시인의 존재 속에서 살이 되고 피가 되어서 시 속에 표출되어야 한다. 시 작품은 시인의 사상과 경험이 자기의 정서의 살과 피에 용해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7. 시인의 감수성

시인은 언어와 자기 존재, 인류와 세계에 대한 민감한 감수성, 상상력을 가지고 보통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도 보고 듣지 못하는 것도 듣고 깨달지 못하는 것도 깨달아서 대중에게 이를 전달해야 한다. 전달이 되지 않는 부분도 있겠지만, 그것도 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8. 시의 전통

전통이란 문화를 지탱하는 하나의 패러다임이나 지속적 진화를 전제로 하고 있으며 결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다. 전통은 역사의 일부가 되고 역사는 꾸준히 변천하는 것이다. 우리는 가령 이조시대의 생활환경 속에서와 같은 태도로 시창작을 계속할 수는 없다. 끊임 없이 변화하는 환경에 대처하는 입장에서 전통을 수정, 보완 내지 개발할 필요가 있다. 전통이라는 미명하에 시인의 상상력이 억제되어서는 안 된다. 시인은 자기가 물려받은 전통을 잘 파악하고 그 진화에 이바지해야 한다. 예술은 끊임없이 삶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며, 전통도 이에 부응하여 새로운 변모를 꾀하여야 하는 것이다.

9. 현상과 실재

인간 역사 가운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상/실재 어느 쪽을 강조하는가 하는 논쟁은 계속되어왔다. 이는 시론에서도 마찬가지다. 본인이 판단컨대 시인의 기능 중 실재(이데아의 세계)를 조명하는 것이 종종 더 보람이 있고 특유한 기능이다. 시인은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할 수도 있겠지만, 눈에 보이는 현상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을 첨가하여 현상 속에는 없는 소 우주를 창조하기도 한다. 예술은 인간의 생활공간을 확장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10. 문학의 위기

흔히 문학의 위기를 거론하는데, 그것은 현대인이 하루 시간 중 시에 할당할 시간과 관심이 점점 줄어드는 데에 있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이 종전에 비하여 훨씬 많아졌다. 인간의 삶의 내용이 변천함에 따라 문학의 성격도 부득이하게 달라지고 있다. 불원간 세계의 수많은 언어 가운데 생존할 언어가 극소수라는 말을 들을 때 문학의 위기설도 납득이 가능해진다.

11. 무의식에 대하여

일찍이 동서의 현자들이 말했듯이 인간의 세계인식은 무의식 내지 상상력에도 많이 의존한다. 시인은 무의식의 세계를 탐색해야 한다. 시인 내부에서 인간 개체와 집단의 역사와 우주의 목소리가 들려올 수도 있다. 인간의 삶은 먹고 마시는 소위 물리적 현실에서만 아니라 사색하고 명상하고 상상하고 번뇌하는 정신세계 속에도 영위된다. 시인은 때로 일반대중이 이해 못하는 경지에서도 세계와 우주의 실재를 탐색하고 형상화햐야 한다.
시인은 어려운 시를 결코 배척해서는 안 될 것이며, 이러한 경지가 시인 특유의 경지일 수도 있다. 모름지기 시인은 무의식의 세계 속의 신비를 경험하고 이를 대중에게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언어 밖에서 아른거리는 신비의 광명, 연금술사의 눈 앞에 어른거렸다는 그 신비의 노루도 보아야 할 것이다. 대중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건 그들의 문제일 것이다. 시는 하나의 전문분야인 바, 일반대중에게서 전문적인 안목을 늘 기대할 수는 없다. 따라서 시인은 자기의 시가 대중의 인기를 얻지 못한다고 한탄할 필요가 없고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시만을 써서도 안될 것이다. 철학이 이해하기 쉬워야 된다고 주장하는 소리는 별로 들리지 않는다. 이는 시에도 적용될 일이다. 시인은 남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는 시를 쓸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시를 타기할 수는 없다. 동서의 고전작품 중 이런 경향의 작품은 많으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시인 자신을 위하여 시를 쓰는 행위를 창작행위에서 배제할 수는 없다. 시 창작은 때때로 신비스러운 작업이다. 그래서 시인은 신탁에 의하여 시를 쓴다든가 시인이 일종의 영매라는 말을 곰곰이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12. 시작품에 대한 평가

시 작품이 문학외적인 기준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많고 시인의 역할에 대한 기대가 문학외적으로 조성되는 경우도 많다. 순전히 문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시 작품의 우수성에 대한 평가 기준은 1) 시인의 창작 의도의 성취 여부, 2) 그 시가 전달하는 메시지 내지 의미의 중요성 등을 들 수 있다. E. Pound 가 말한 대로 세 가지 유형의 시(melopoeia음악성이 강한 시, phanopoeia 시각성이 강한 시, logopoeia 형이상학적 내용이 강한 시) 가운데서 형이상학적 내용이 큰 시가 상대적으로 더 중요하다고 보는 시각은 동서양 공통일 것이다. 종국적으로 시작품이 얼마나 인간조건 및 인간의 환경, 세계와 우주를 잘 조명하고, 인간의 존재공간을 넓히고 향상시키며, 절실한 세계관과 인간의 진로를 제시하는가에 따라 그 우수성이 판가름된다.
시인은 이따금 자신의 작품에 대하여 회의를 가지고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기회를 가져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서는 시를 잘 볼 줄 아는 사람에게서 냉정한 평가를 받는 것도 좋을 것이다. 타인의 작품을 평가하는 능력은 자신의 작품을 평가하는 능력과는 성질이 다르다. 남의 작품보다는 자신의 작품을 평가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경우가 많다. 자기 작품에 대한 냉담한 평가를 통하여 창작활동의 질을 높이고 창작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작품에 대하여서는 지나친 애착과 편견을 갖게 마련이며 자기애착의 색안경을 쓰게 되는 것이다.

13. 동서양 예술미학의 비교

전통적으로 서양에서는 미학과 윤리학을 분별하고 예술행위의 주체를 독립된 개인으로 보는 반면, 동양에서는 예술이 덕성을 통하여 우주와 인간의 조화를 표현하는 것을 절대가치로 삼고 예술작품에서 미와 윤리를 구별하지 않았다. 즉 서양의 예술적 절대가치는 미(美)였고 동양에서는 진선미를 내포하는 인(仁)이었다. 시론에 있어서 사무사(思無邪) 또는 시언지(詩言志)의 사상도 이런 태도를 반영하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예술행위의 주체는 개인이었고 동양에서는 사회집단의 일원으로서의 개인이었다. 동양의 유불선 사상은 인간의 미적 욕망을 부정적으로 보고 서양에서는 긍정적으로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동서양 예술행위의 성격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또한 동양에서는 언어가 진리(실체)를 표현하는데 미흡하다는 사상이 강했으며 이 또한 시예술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줄 안다. 동양적인 예술관에 따르면 예술가는 고매한 인품을 가지고 정서적 충동을 절제해야 한다. 동양적 예술론은 창작활동에 까다로운 제약조건을 제시하여 자유분방한 예술활동을 억제한다고 볼 수도 있다. 한편 서양에서는 예술가는 미적 표현만 잘하면 되고 예술활동의 자율성을 누린다. 어찌 되었든 오늘날 이러한 동서간의 장벽은 무너지고 동서가 서로 밀고 당기는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시에 대한 나의 산만한 생각을 두서없이 나열하였는데 앞으로 기회 있는 대로 좀 더 짜임새 있게 정리해 보고자 한다. 다만, 각 분야에서 세계화가 활발히 전개되는 현 시점에서 우리 문학도 세계무대에 더 많이 진출하여 세계독자의 심금을 울리고 달관한 세계관을 보여주고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려서 한국의 위상을 높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창의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인류의 유산이 될 우수한 시작품을 더 많이 만들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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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한국시 왜 이렇게 되었는가

임보(林步)


한국시단의 오늘을 시의 전성기로 보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시인의 수효가 만 명을 헤아리는 데에 이르렀고, 수많은 시집과 시지(詩誌), 그리고 시동인지 들이 매일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으니 그렇게 평가할 만도 할지 모른다. 그러나 시인다운 시인이 얼마나 되고, 시다운 시들이 얼마나 생산되고 있는가를 살펴본다면 긍정적으로만 평가하기는 어렵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나는 요즈음 별로 시를 읽지 않는다. 게을러서라기보다는 시를 읽는 것이 즐겁지 않아서이다. 아니 즐겁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시를 읽는 일이 오히려 고통스럽고 짜증이 난다. 시가 설령 재미있다손 치더라도, 거의 매일 우송되어 온 적지 않은 시집이나 잡지들을 섭렵한다는 것은 여간한 인내와 노력이 요구되는 일이 아니다. 하물며 재미없는 경우라면 그 작품들을 위해서 소중한 시간을 할애할 마음이 선뜻 생기겠는가. 나는 처음 몇 줄 읽어서 재미가 없으면 읽지 않고 넘어간다. 난해하거나 답답한 것도 외면한다. 그러니 평소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소수의 시인들 위주로 작품을 골라 읽게 마련이다.

오늘의 시라는 글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난삽하고 골치 아픈 글이 되었는가? 무엇이 시를 이 지경으로 끌어왔는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첫째, 자유시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문제인 것 같다.

근대적 이념으로 흔히 내세운 것 중의 하나가 ‘자유’다. 근세에 이르면서 시의 세계에도 자유의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원래 시는 통제된 글이다. 특히 정형시는 형식적인 틀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율격과 압운 등의 규제를 받는다. 주지하다시피 정형시가 지닌 고정적인 틀로부터 벗어나고자 해서 생겨난 것이 자유시다. 얼핏 생각하면 자유시야말로 아무런 형식적 통제도 받지 않은 자유분방한 글처럼 생각될지 모른다. 그러나 자유시가 통제된 글이 아니라는 생각은 크게 잘못된 인식이다. 자유시는 정형시가 지닌 정해진 틀로부터 자유로울 뿐이지 형식의 통제로부터 벗어난 글은 아니다. 자유시는 그 내용에 가장 합당한 새로운 형식을 작품마다 창조해내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자유시가 쓰기 쉬운 시라고 생각하면 이는 큰 오산이다. 작품마다에 가장 이상적인 형식을 창안해 내는 일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만일 어떤 시인이 자유시를 멋대로 써도 좋은 글이라고 착각하고 썼다면 이는 이미 시가 아니라 방종의 글에 불과할 것이다. ‘자유’에 ‘책임’이 따르듯 시인은 자신이 생산한 시에 대하여 준엄한 책임을 져야 한다.
시가 통제된 글이라는 것은 자유시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시어의 선택, 행과 연의 배치 그리고 운율의 설정에 이르기까지 자유시도 최선의 형식에 담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작품 속에 쏟아 붓는 시인의 정성이 곧 독자들의 가슴속에 감동으로 되살아난다. 쉽게 쓰여진 시가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는 황소가 바늘귀를 뚫고 들어가는 일보다 흔치 않을 것이다.

둘째, 분별력 없는 아류들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우리 시단을 이렇게 만든 데 기여한 두 사람의 선배 시인을 지적하라면 김수영과 김춘수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공히 전통적인 시법에 반기를 든 분들이다.
김수영의 작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자면 우리시의 폭을 넓혔다고 할 수 있다. 시어와 시의 소재들을 개방하여 시의 영토를 확장했다. 속어와 비어(卑語), 외래어 할 것 없이 끌어다 썼고, 일상 속에서 그가 만난 사소한 체험들도 싯거리로 삼았다. 그는 대상과 표현에 구애받지 않고 제멋대로 썼다. 좋게 말하면 무애(無礙)한 자유인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건방진 안하무인(眼下無人)이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시의 위의(威儀)를 떨어뜨렸다고 할 수 있다. 원래 시는 귀족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시의 위상을 서민문학으로 끌어내린 것이다.
김춘수 시의 의의는 소위 ‘무의미의 시’라는 데에 있다. 무의미 시의 특징은 한마디로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비현실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구상(具象)의 세계를 거부한 비구상화가들의 발상과 궤를 같이 한 것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그는 의도적으로 현실적 정황을 파괴하여 낯설게 만든다. 거기에는 어떠한 지상적 논리와 질서도 배제된다. 말하자면 절대무비의 세계를 창조해내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은 세계를 만들어냈다는 데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김춘수 역시 ‘무의미의 시’로 한국시의 영역을 넓히는데 기여했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김수영과 김춘수의 작품들이 전통적인 시와는 달리 낯설었기 때문에 몇 비평가들과 잡지들의 주목의 대상이 되었던 것인데, 분별력이 흐린 시인들이 이들의 작품을 마치 시의 전범으로 받아들여 그들의 아류가 된 것이다. 그래서 시를 제멋대로 쓰는 것이 마치 멋인 줄 착각하고, 논리를 무시한 괴기스런 표현이 수준 높은 작품인 것처럼 잘못 인식하는 풍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이상한 악기를 하나 만들어냈다고 가정하자. 새로운 그 악기는 물론 음악을 다채롭게 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악기가 모든 음악을 연주하는데 최상의 악기라고 잘못 판단하고 이를 고집하는 무리들이 횡행한다면 이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시의 경우도 이와 같아서 하나의 새로운 유형의 출현은 그 가치가 인정되지만 그것을 마치 시의 전범인 것처럼 여기고 이를 모방하는 것은 개인이나 문단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효빈(效顰)이라는 말이 있다. 월(越)나라의 미인 서시(西施)가 얼굴 찡그리는 것을 보고 한 추녀(醜女)가 이를 부러워한 나머지 흉내내다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고사인데 이와 다를 바 없다.

누가 뭐라고 해도 시는 정련된 언어예술이어야 하며, 정결한 시정신을 담고 있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시를 하찮은 말장난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색다른 시를 만들어 주목의 대상이 될 것인가 보다는, 어떻게 감동적인 시를 낳아 긴 생명을 갖게 할 것인가 하는 데로 시단의 관심이 되돌아왔으면 싶다.

*출처 : 가시의 집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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