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의 속성 / 이형기
상징이 원관념을 생략하고 보조관념만 내세운 은유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은 상징의 속성을 이해함에 있어서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것은 상징이 내세워진 그 보조관념을 통해 생략된 원관념을 찾도록 요구하는 표현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징은 ‘감춤’과 ‘드러냄’의 양면성을 갖는다고 Y.틴달은 말하고 있다.3) 감추어진 것은 생략된 원관념이요 드러난 것은 내세워진 보조관념이다. 그리고 전자는 보이지 않는 정신적 세계요 후자는 가시적인 현실의 사물이다. 그러니까 상징은 가시적인 현실의 사물을 통해 현실을 초월한 불가시의 관념 또는 정신적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상징은 앞에서 말한대로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다의성(多義性)과 암시성을 갖는다. 상징의 이 두 가지 속성은 ‘감춤’과 ‘드러냄’의 양면성에 기인하는 필연적 귀결이다. 왜냐하면 상징의 감추어진 일면은 감추어져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이미 그 내용의 모호성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호하지 않고 명확한 것이라면 설령 감추어 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진정한 감춤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감추어진 내용을 모호한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우리는 현실적 사물에 대해 정신적 대응을 할 수 없게 된다. 사물에 대한 정신적 대응이란 그 사물의 의미를 해석해낸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미해석은 정신적 존재인 인간의 본질적 속성이다. 상징이 현실의 사물을 통해 초현실의 영역에 속하는 정신적 세계를 찾도록 요구하는 핵심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찾아야 할 초현실의 세계가 다양한 내포를 갖는다는 사실은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도 얼마든지 입증될 수 있다. 이를테면 두 사람이 동시에 달을 쳐다본다고 하자. 우주과학자인 A는 그 달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고 연애중인 B는 그 달을 애인에 대한 그리움의 표상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동일한 달이 A에게는 정복, B에게는 그리움의 상징으로 수용되었음을 뜻하는 현상이다. 그리고 달에 대한 그 두 가지 상징적 해석은 그 어느 것도 잘못된 것이라 할 수가 없다. 두 사람의 해석은 다같이 그 나름의 타당성을 갖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상징의 의미내용이 다양함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상징의 이 다의성은 또 상징의 암시성으로 연결된다. 분명하게 하나의 의미만을 지시하지 않고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도록 그 대상을 암시하기 때문에 상징은 다의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다의성과 암시성은 상징에 있어서 표리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시에 있어서는 이러한 상징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알아보자.
지금 어드메 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지요.
지금 어드메 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어요.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 주듯이
지금 어드메 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습니다.
─ 조병화, <의자>
이 시의 중심소재인 ‘의자’는 단순히 물리적 차원에만 속하는 사물이라 할 수가 없다. 그것은 우리에게 그 의미의 해명을 요구하는 사물, 바꾸어 말하면 상징으로서의 의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의자의 그 상징적 의미는 무엇인가. 시의 화자가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을 위해 비워주겠다고 말하고 있는 그 의자는 실은 화자 자신이 ‘먼 옛날 어느 분’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할 때 의자의 그 상징적 의미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성세대가 새로운 세대에게 필연적으로 물려주게 마련인 시대의 주역의 자리라는 해석이 나올 수 있다. 그리고 아울러 우리는 여기서 상징이 갖는 감춤과 드러냄의 양면성을 발견하게 된다. 드러나 있는 것은 의자 자체요 감추어져 있는 것은 시대의 주역의 자리라는 의미내용이다.
아닌게 아니라 인간의 역사는 의자를 물려주고 물려받는 가운데서 세대교체와 변화 발전을 이룩해 나가는 기나긴 과정으로 비유될 수 있다. 이 시의 화자는 그러한 의자를 그냥 물려 주려는 것이 아니라 ‘비워 드리겠습니다’라고 경어로 말하고 있다. 공손한 어조이다. 우리는 그러한 어조를 통해 미련이나 집착을 갖지 않고 기꺼이 의자를 물려주겠다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시의 화자는 시간의 흐름에 대해 매우 순응적인 인물이란 사실을 그 어조는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의자의 상징적 의미가 꼭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만 해석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것은 여러 가지 다른 해석도 이끌어낼 수 있는 상징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만물이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의 회기적 변화를 되풀이하는 자연의 섭리를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고 또 단순히 은퇴를 앞둔 노인의 담담한 달관의 경지를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을 택하든 그나름으로 의미가 통하는 이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은 상징의 다의성과 암시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의 의미내용은 밖으로 명쾌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앞에 인용한 시에 있어서도 ‘의자’의 그 상징적 의미를 직접 밝혀주는 구절은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시의 전체적인 문맥 속에서 상상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상징의 또하나의 속성이 문맥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동일한 사물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갖는 상징적 의미는 시의 전체적 문맥에 따라서 그 내용을 달리하게 된다. 이미지나 비유는 시의 부분적 표현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상징은 언제나 시의 전체적 문맥 속에서만 비로소 온전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미지가 상징인가 아닌가의 판별은 그 이미지가 환기하는 의미가 부분에서 그치느냐 또는 작품 전체에 확산되느냐에 달려 있다’고 김준오는 말하고 있다.4) 상징의 문맥성을 뒷받침하는 수긍에 값하는 의견이다.
이해의 편의를 돕기 위해 위에서 논의한 상징의 속성을 요약해 보자. 첫째 양면성, 둘째 다의성, 셋째 암시성, 넷째 문맥성이 상징의 속성이다.
상징이 원관념을 생략하고 보조관념만 내세운 은유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은 상징의 속성을 이해함에 있어서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것은 상징이 내세워진 그 보조관념을 통해 생략된 원관념을 찾도록 요구하는 표현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징은 ‘감춤’과 ‘드러냄’의 양면성을 갖는다고 Y.틴달은 말하고 있다.3) 감추어진 것은 생략된 원관념이요 드러난 것은 내세워진 보조관념이다. 그리고 전자는 보이지 않는 정신적 세계요 후자는 가시적인 현실의 사물이다. 그러니까 상징은 가시적인 현실의 사물을 통해 현실을 초월한 불가시의 관념 또는 정신적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상징은 앞에서 말한대로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다의성(多義性)과 암시성을 갖는다. 상징의 이 두 가지 속성은 ‘감춤’과 ‘드러냄’의 양면성에 기인하는 필연적 귀결이다. 왜냐하면 상징의 감추어진 일면은 감추어져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이미 그 내용의 모호성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호하지 않고 명확한 것이라면 설령 감추어 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진정한 감춤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감추어진 내용을 모호한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우리는 현실적 사물에 대해 정신적 대응을 할 수 없게 된다. 사물에 대한 정신적 대응이란 그 사물의 의미를 해석해낸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미해석은 정신적 존재인 인간의 본질적 속성이다. 상징이 현실의 사물을 통해 초현실의 영역에 속하는 정신적 세계를 찾도록 요구하는 핵심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찾아야 할 초현실의 세계가 다양한 내포를 갖는다는 사실은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도 얼마든지 입증될 수 있다. 이를테면 두 사람이 동시에 달을 쳐다본다고 하자. 우주과학자인 A는 그 달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고 연애중인 B는 그 달을 애인에 대한 그리움의 표상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동일한 달이 A에게는 정복, B에게는 그리움의 상징으로 수용되었음을 뜻하는 현상이다. 그리고 달에 대한 그 두 가지 상징적 해석은 그 어느 것도 잘못된 것이라 할 수가 없다. 두 사람의 해석은 다같이 그 나름의 타당성을 갖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상징의 의미내용이 다양함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상징의 이 다의성은 또 상징의 암시성으로 연결된다. 분명하게 하나의 의미만을 지시하지 않고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도록 그 대상을 암시하기 때문에 상징은 다의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다의성과 암시성은 상징에 있어서 표리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시에 있어서는 이러한 상징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알아보자.
지금 어드메 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지요.
지금 어드메 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어요.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 주듯이
지금 어드메 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습니다.
─ 조병화, <의자>
이 시의 중심소재인 ‘의자’는 단순히 물리적 차원에만 속하는 사물이라 할 수가 없다. 그것은 우리에게 그 의미의 해명을 요구하는 사물, 바꾸어 말하면 상징으로서의 의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의자의 그 상징적 의미는 무엇인가. 시의 화자가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을 위해 비워주겠다고 말하고 있는 그 의자는 실은 화자 자신이 ‘먼 옛날 어느 분’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할 때 의자의 그 상징적 의미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성세대가 새로운 세대에게 필연적으로 물려주게 마련인 시대의 주역의 자리라는 해석이 나올 수 있다. 그리고 아울러 우리는 여기서 상징이 갖는 감춤과 드러냄의 양면성을 발견하게 된다. 드러나 있는 것은 의자 자체요 감추어져 있는 것은 시대의 주역의 자리라는 의미내용이다.
아닌게 아니라 인간의 역사는 의자를 물려주고 물려받는 가운데서 세대교체와 변화 발전을 이룩해 나가는 기나긴 과정으로 비유될 수 있다. 이 시의 화자는 그러한 의자를 그냥 물려 주려는 것이 아니라 ‘비워 드리겠습니다’라고 경어로 말하고 있다. 공손한 어조이다. 우리는 그러한 어조를 통해 미련이나 집착을 갖지 않고 기꺼이 의자를 물려주겠다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시의 화자는 시간의 흐름에 대해 매우 순응적인 인물이란 사실을 그 어조는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의자의 상징적 의미가 꼭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만 해석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것은 여러 가지 다른 해석도 이끌어낼 수 있는 상징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만물이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의 회기적 변화를 되풀이하는 자연의 섭리를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고 또 단순히 은퇴를 앞둔 노인의 담담한 달관의 경지를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을 택하든 그나름으로 의미가 통하는 이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은 상징의 다의성과 암시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의 의미내용은 밖으로 명쾌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앞에 인용한 시에 있어서도 ‘의자’의 그 상징적 의미를 직접 밝혀주는 구절은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시의 전체적인 문맥 속에서 상상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상징의 또하나의 속성이 문맥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동일한 사물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갖는 상징적 의미는 시의 전체적 문맥에 따라서 그 내용을 달리하게 된다. 이미지나 비유는 시의 부분적 표현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상징은 언제나 시의 전체적 문맥 속에서만 비로소 온전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미지가 상징인가 아닌가의 판별은 그 이미지가 환기하는 의미가 부분에서 그치느냐 또는 작품 전체에 확산되느냐에 달려 있다’고 김준오는 말하고 있다.4) 상징의 문맥성을 뒷받침하는 수긍에 값하는 의견이다.
이해의 편의를 돕기 위해 위에서 논의한 상징의 속성을 요약해 보자. 첫째 양면성, 둘째 다의성, 셋째 암시성, 넷째 문맥성이 상징의 속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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