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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있는 것들/문학의 갈피

2008년 신춘문예 시조당선작 분석

by 광적 2008. 6. 4.

삶의 구체적 정황에서 오는 도저한 필연성의 시학 / 채천수

                                                                                                  - 野人의 눈으로

 

1. 무엇을 썼는가?

 

 신춘문예 당선자들이 올해도 주요 일간지들을 통해 개인적 삶이나 이웃의 정황을 각자의 절실한 언어로 장식했다. 어떤 내용을 가지고 이 어려운 등용문을 통과했는지 한번 짚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 같아 우선 그들이 어떤 문제를 다루고 있는지 살펴보고, 언어적 표현미나 작품의 격조, 신선미와 상상력의 문제는 별도로 다루기로 한다.

 

 김남규는 조선일보에 당선된 <염전에서>를 통해 한 소시민이 겪는 소외와 가난의 숙명을 노래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시어와 구절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동반하고 있는  ‘서산댁’ 의 내 ․ 외적 삶에 그 뿌리를 둔다. “오늘도 서산댁은 낮은 바다 막고 선 채”로 시작하여 “가슴엔 뱃고동 소리 야윈 달이 차오른다.”로 마감하면서 바다에서 남편을 잃은 아픈 상흔을 딛고 소금밭에서 살아야하는 막막함은 가운데 부분에 오면 ‘소금기 절은 목숨’이라든지 “무명의 소금 봉분, 메다 꽂힌 삽자루여 ”로 뒤틀린 그녀의 처지를 더욱 섬세하게 어두운 영상으로 현현하고 있다.

 

  중앙일보 신인문학상에 당선된 정상혁의 <활>은 셋째 수 초장에 오면 “쏠 준비를 하는 순간 모든 게 과녁이다”라고 하며 삶의 팽팽한 긴장감을 극대화하고 있다. 긴장감을 동반하는 경우, 삶은 위기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기회이기도 한 이중구조의 시대상황과도 맞물린다. 그렇다. 그의 시 건축구조를 이루는 공간이  ‘뼈들이 벼린 날처럼’, ‘매복한 자객단처럼’이고 보면 존재들 간의 불화와 투쟁 또는 각자의 방어가 무섭고 섬뜩하다. 인간을 활에 대입하면 결국 이 시대 삶의 현장은 전쟁터에 다름 아니다.

 

 서울신문에 당선된 임채성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부제‘-오베르에서 보내온 고흐의 편지’는 시조를 떠나서 우선 ‘까마귀가 나는 밀밭’ 그림  내용이 이렇다.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폭풍의 하늘에 휘감긴 밀밭의 전경을 그린 이 그림으로 자신의 슬픔과 극도의 고독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이야기하였다. 즉 지평선이라는 드넓은 전망과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처럼 사납게 일렁이는 대지, 거기에 까마귀가 활개를 치며 날아가는 불안한 화면을 통하여 인간 영혼의 고독과 슬픔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면 임채성의 시조가 고흐의 그림 묘사를 넘어선 내용이 있어야 시조로서 가치가 있다고 볼 때 이 시조의 마지막 종장 “비로소 소실점 너머 한뉘가 새로 열린다”에서는 고흐의 그림이 품고 있는 예술가로서의 절대 고독과 한없는 그 슬픔의 소실점을 넘어 자기화 된 혼불에 시조를 담금질하겠다는 결의로 읽힌다.

 

 농민신문에 당선된 강혜규의 <오래된 벽>은 둘째 수에 오면 “긴 못 작은 못 상처가 많은 벽에/고단한 가장의 어깨가 비스듬히 걸려 있다”나 셋째 수에 나타나는‘주인마저 떠난 빈 방’ 의 표현은 이농으로 인한 폐가의 현장에 시인 자신과 독자들을 세워놓고 농촌현실의 싸늘한 문제의식을 “초겨울 매운 바람만 안부를 묻고 있다.”로 들쑤신다.

 

 황성곤의 <눈 속의 새>는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그 날개를 펼친 작품이다.

 20수년 시조를 만진 필자지만 이 작품은 여러 번 읽고,  며칠 동안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 작품이다. 까닭은 대단한 작품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작품 전체가 함의하고 있는 모호성이 가지고 있는 애매한 매력이랄까?

 이야기를 풀자면 제목부터가 두 가지 배경이 보인다. ‘눈(眼 , 雪)속의 새’ 모두 다 ‘새’의 바탕이 되는 환경이다. 하나는 내적 풍경이 되고, 남은 하나는 당연히 외적 풍경이 되겠다.

 이 시에서 곁가지를 잘라내면 남은 본 가지에 앉은 새 한 마리가 ‘빛(불)’, ‘눈부신 기록’, ‘필생의 울음’ 등과 대등한 관계에 놓인다. 즉 이 시의 주인공인 ‘새’가 생의 진정성을 향한  역동적 언어로 읽히지만 상징과 관념의 과잉이 빚은 결과로 독자가 볼 때 구체적으로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면서 쓴 것인지 짐작이 잘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각 장에 번호 1,2,3을 붙여 작자의 과녁이 3가지이면서 크게 보아 지고지선을 향한 한 가지 몸부림이라 짐작하기 충분하나.  필자도 독자이고 보니 다만 이 시를 생을 불꽃 같이 살다갔고, 살고 있는 목숨의 빛깔이라 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쉬웠다. 

 

 <눈길을 걷다>는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아름다움은 절실한 아픔 일 수 있다는 것을 선사한 이서원의 가편이다. 시각 장애인의 절절한 손끝이 닿은 詩 , 둘째 수 “손끝에 힘을 모아 온몸으로 읽는 음절/어두운 마음속을 뇌문(雷文)처럼 뻗어 와서/ 하나둘 놓는 징검돌 꽃이 되어 피는데…”에 오면 작품 <눈길을 걷다>는 처절한 아픔이지만 그런 역경의 길속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생은 그 자체로 지독한 아름다움이다.

 

  국제신문 속을 날아간 <서울 황조롱이>는 김춘기의 작품이다. 황조롱이란 새는 대충 이런 새다.

 몸길이 30∼33cm이고, 매류에 속하는데 날개를 몹시 퍼덕이며 직선 비상한다. 때로는 꽁지깃을 부채처럼 펴고 지상에서 6∼15m 상공의 한곳에 떠서 연 모양으로 정비 범상(停飛帆翔)을 하며 지상의 먹이를 노린다. 단독 또는 암수가 함께 생활한다. 전선·전주·나무 위·건물 위 등에 앉기도 한다.

 

 제목이 암시하듯이 어울리지 않는 반환경적이고 반자연적인 장소의 대명사인 서울에 야생적이며 친자연적인 황조롱이를 붙여놓았다. 어디 황조롱이만 힘든 목숨인가. ‘비정규직’, “옥탑방 살림살이가 긴병처럼 힘에 겹다”로  휘둘리는 빈한한 다수의 목소리가 파도처럼 철썩인다. 왜 詩는 가난하고 힘든 곳에만 그 푸른 싹이 잘 돋는지.

 

 이남순의 <마중물> 펌프소리를 경남신문에서는 삶의 관계성과 소통미학으로 비싸게 샀다.

 마중물이란 펌프로 물을 퍼 올릴 때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 먼저 윗구멍에 붓는 물을 말하는데 이 시조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공간은 ‘지상’과 ‘지하’로 연결된 수도파이프와 펌프다. 즉 인간이 맞는 세계와의 소통구조를 내면화한 웅숭깊은 작품이다. 그래서 둘 이상의 만남은 “우리 서로 비우면 이토록 깊어지나”하는 내면적 깊이가 “하늘과 땅이 맞닿아 한 몸으로 출렁인다”의 외연적 활동형태로 발전한다.

 

 여기 또 하나의 소금밭이 있다. 경남일보에 당선된 연선옥의 <염전에 들다>가 바로 그 현장이다.

 가치 있는 그 무엇을 완성하기까지 시달림에 나부끼는 언어  ‘대끼고, 대껴야’나 ‘상처 자투리’, 또 ‘등에 감긴 푸른 멍울’등을 죄다 소화하면서 마침내 천일염이 되었다.

 “햇빛 가득 그러모아 제 가슴에 피는 꽃들”들로 지난한 세월, 열심히 바르게 산  결정체로 빛나고 있다.

  

 

 

2. 어떻게 썼는가?

 

 무슨 내용을 쓰건 그것은 응모자들의 자유이며, 또 어떤 내용을 당선작으로 뽑든 그것은 심사위원들의 고유권한이다. 그런데 당선작이라는 게 그해에 보내온 응모작들 중 상대적 우열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이고 보니 응모작들의 수준에 따라  당선작의 수준이 결정되는 것 또한 현실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경우의 현상은 시조의 미래를 위해서는 바람직하지도 못하고 시조 발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적어도 예술이란 것이 당대의 시대정신을 살리고 문화소비자들의 열망에 부응하면서 미래의 가치를 창조해야 하는 당위 앞에서면 투고할 작품의 화살이 당선만을 과녁으로 삼기보다는 지금까지 기성 작품들이 빠뜨리고 잘 다루지 않은 내용 중, 꼭 다루어야 할 소재를 가지고  자기화 된 주제의 구성과 감각으로 갈고 닦은 기량을 선보여야 한다. 그 결과 신생의 감동 파장이 심사위원들이나 독자들을 울려야 함은 물론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작품을 가지고 말하면 올해에 당선된 김남규(1982년 생)의 <염전에서>나 연선옥의 <염전에 들다>는 이미 발표된 소금 이미지들의 좋은 시조가  많다는 것이 다소 신선미를 떨어뜨린다.

 물론 내용과 표현 기술이 다르다면 다른 사람이 먼저 썼다고 하여 쓰지 말라는 법은 없다.

 대충 생각해도 1975년 동아일보에 당선된 故 임홍재의 당선작이 제목도 같은 <염전에서>이고, 서숙희의 <소금꽃>, 조주환의 <소금>, 나순옥의<염전에 갇혀>, 김복근의<소금에 대한 명상> 등이 있다. 자기화 된 좋은 詩語나 佳句가 있었지만 내용이나 표현의 기법에서 완전히 앞선 작품들을 뛰어넘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한편, 임채성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은 그림을 보고 쓴 시조 계열에 속한다. 얼핏 생각해도 완성도가 높은 이런 류의 시조로는 오윤의 판화집을 보고 쓴 박시교의 <바람집 5>, 김상유의 판화 ‘화개’를 보고 쓴 유재영의<그 경이>, 이중섭의 그림이나 겸재 정선의 ‘인왕재색도’를 보고 쓴 윤금초의 사설시조 여러 편,이인성의 그림을 보고 쓴 박기섭의 <가을 어느 날>, 이승은의 <심금>, 하순희의<이중섭의 흰 소를 보며>와 같은 작품들이 앞서 발표된 줄 안다.

 이런 작품에서 그 성공도를 측정하는 경우는 1차로 생산한 작가의  예술품에 풍기는 진정성에 몰입한 후, 그곳에서 한 발 빠져나와 자기만의 보법과 길 하나를 보태는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당대의 현장감이란 감각의 옷을 입고 말이다. 즉 이 작품에서는 고흐의 그림에 나타난 불안한 화면을 통하여 인간 영혼의 고독과 슬픔을 관류하면서 작자는 마지막 종장에서 “비로소 소실점 너머 한뉘가 새로 열린다”고 노래하며 신생의 길을 갈려고 한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필자가 제시한 기준에 멀어져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 대상이 잘 알려지지 않은 그림을 시조로 쓴다는 것은 독자들에게 그 그림을 꼭 한번 보고 싶도록 까지 해야 하는 부담을 지고 있어 잘 쓰기가 여간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열악한 삶의 환경과 고독을 노래한 김춘기(1954년생)의 <서울 황조롱이>는 4수 모두에 1,2,3,4번호를 붙여 한 수 한 수에 흔하지 않는 독립성을 부가하면서 그 시적 배경이 도시 공간→원래적 본향→문명과 자연의 경계 지점→응모자가 사는 곳으로 날개 짓을 이동시키면서 시대의 환경과 응모자의 심상을 직조한 것이 돋보였다.   詩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새’의 상승이미지를 힘든 삶의 이미지로 새롭게 구축한 것도 온전하게 평가해야 할 부분이다.

 

 강혜규가 <오래된 벽>에서 보여준 작품의 구조는 시적 대상에 대해 오래도록 천착하여 치밀하고 섬세한 관찰력을 발휘한 결과, 그곳에 붐비는 풍부한 상상력을 잘 걸러낸 힘에 다름 아니다.

 잃어버림과 소멸의 정적을 “생의 속도를 내려놓고 주인마저 떠난 빈 방”으로 그려놓은 가편이다. 그리고 독자들의 눈에 잘 발견되지 않게 객관적 사실에 축을 두어 표현한 감정 제어가 시의 格을 높이기에 적당했다.

 

 마지막으로 정상혁의 <활>,이남순의 <마중물>,이서원의 <눈길을 걷다>,황성곤의 <눈 속의 새>을 함께 거론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은 무엇보다 대상에 대한 새로운 실험의지의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지금까지 시조단에서 잘 보지 못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새롭다고 모두 가치 있는 것이 라고 할 수는 없으나 그들이 내 디딘 一步에 우리 시조의 미래를 기대해도 좋다.

 

 <활>은 詩語로 놓여있는 바둑돌 한 수 한 수가 장과 장, 수와 수에서 내적 고요와 긴장을 조장하는데 획기적인 감각을 보여준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그리고 화살촉의 진행 방향이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처럼 “내일로 촉을 세운 채 쏜살같이 내달린다”다. 얼마나 건강한가.

 

 낡은 수도 펌프에서 훌륭한 시조 건축공학의 조감도를 발견하고 귀한 <마중물>을 쓴 것이 가치 있는 삶의 건축 기술과 그 물줄기가 닿아버렸다. 중층적 아름다움을 섞는 물맛이라니!.

 

 <눈길을 걷다>는 얼마나 평범한 제목인가. 그러나 그 내용을 살펴보면 시각장애인이 혼자서 더듬더듬 점자책을 읽는 상황이다. 목숨 값을 다하려는 처절한 삶의 대응과 긍정이  오히려 일상인들을 향한 강한 自省으로 읽힌다. 그가 사용한 시어 ‘雷紋처럼’ 말이다.

 

 <눈 속의 새>는 일찍이 “광년을 달려와 빛이 된 투명한 새”가 있었는가? 로 먼저 언급한 내용과 그 궤가 비슷하나 작자의 바람이 자기완성이나, 영웅의 출현으로 다시 읽히기도 한다. 그 만큼 이 시조는 다의적인 의미를 노리는 측면에서 크게 기여하고 있다. 상상력의 폭발에서도 “빅뱅의 환상이거나 눈부신 기록이었을”로 우주적인 사고가 배어있다. 단지 다의적이라고 하지만 여러 가지로 명확한 의미를 얻는데 성공했다고는 쉽게 동의하기가 주저된다.

 

 

3. 어떻게 써야 하는가?

 

 시인도 삶에 대한 절실한 물음이나 별 자각이 없는 사회적 환경에  젖어 살면 일상적 배금주의를 좇는 속인과 다름이 없다. 우리들 일상에서 무엇이 절실함을 버리게 하는가.

 역기능의 독성이 강한 물질적인 풍요와 과학이 이룬 편의성 등이 즐겁고 안락한 쪽의 소비생활만 부추기면서 우리들 생을 저물게 하고 있다.

 

 모든 게 어려웠던 60년대 전후에 활발하게 의미 있는 詩作 활동을 한 시인들의 작품들이  80년대 이후 비교적 풍요로운 세대에서 영상미에 길들려져 탈 언어적인 생활에서 詩作을 하고 있는 시인들에게는 아직도 그 格이나 이룬 境地가 높아 보이는 것이 위의 사실과 어떤 연관성은 없는지?

 

 작품에 배인 절실성이 앞서간 시인들에 비해 환경적 배경부터 달라 작금에 생산된 시조들이 깊이를 잃은 부족한 면을 드러내는 경향은 경계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 시대의 진정성에도 한참은 멀어진 곳에다 펜을 놓고 벌써 발표한 소재를 가지고 시조를 쓰는 것도 문제의식이 결여된 태도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이미 썼지만 나는 처음 쓴다고 하면 할 말은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떻게 시조를 써야 하는가.’라는 강한 물음을 던져야 한다. 모든 예술작품은 신선한 소통과 이용을 희망한다. 필자는 그런 순환 속에서 세대마다의 바른 꿈과 가치를 발견하고 주어진 당대의 책무를 창의적으로 빚은 문화로서 먼저 시조를 고집한다.

 

 사는 동안 목숨과 목숨이 맺는 緣이나, 목숨과 그를 둘러싼 환경이 맺는 緣의 기쁨과 슬픔 보람, 놀라움, 회의, 절망, 무의미까지 새롭게 내면화한 의미와 이미지로 시조라는 그릇이 채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그가 산 시대를 관류하면서 다양하고 멋진  새롭고 기막힌 시조로서 민족의 시에 뼈와 살을 보태는 시조의 길을 걸어야 한다.

 

 그렇다. 무엇과 무엇이 만나 풍기는 새로운 가치나 품격, 혹은 조화로움 ,  헤어질 때 느끼는 뒷모습의 스산함, 인간의 욕망과 자연이 맞물려 던지는 현상까지 지금 살고 있는 모든 순간순간에 그 값을 매기는 언어로 복무하는 태도가 풍요롭고 새로운 시인을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