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자본주의적 모순 하에서) 시인들에게는 두가지 싸움 방식이 부여되어 있다.
하나는 화려한 자본주의적 이미지들 안에 은폐된 추악하고 어두운 죽음의
이미지를 투시적 상상력을 통해 보여주는 것인데, 이것은 행복의 신화를
깨뜨리는 대항 이미지의 창출이라고 할 만하다.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적 언
어 양식들의 어법과 표현을 그대로 차용하면서, 그것들의 비꼼을 통해 그
허구성을 폭로하는 것이다.
o 페러디란 무엇인가? 모든 글쓰기는 모방의 글쓰기 이면서, 동시에 스스로 낯선
것이 되려는 글쓰기 이다. 글쓰기의 욕망은 근본적으로 페러디의 욕망이기도
하다. 문학 행위는 현실에 대한 일차원적 반영의 행위가 아니라. 앞선 언어에
대한 끊임없는 모방과 베끼기의 행위이면서, 그 모방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위치를 점유하려는 행위이다.
o (80년대에 대한 90년대의 문학의 변화) 그것은 객관적 인식에 대한 주관적
인식의 우위, 웅변애 대한 독백의 우위, 집단적 전범에 대한 개인적인 개성의
우위, 모방론에 대한 표현론의 우위, 당위적 진리에 대한 일상적 진실의 우위,
재현적 진실에 대한 시적 탐구의 우위 등으로 거칠게 요약될 수 있을 뿐이다.
x 거기에는 생활의 객관적인 인식이 배제되어 있고 시를 쓰는 사람의 막연한
정서적 체혐이 모호환 관념적인 언어를 통하여 나타나 있을 뿐이다.
o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직접적이고 감각적으로 지각될 수 있을 때 효과
성을 띤다.
o 형용사나 부사어가 한 행에서 반복되면 천박한 느낌을 준다.
o 시를 포함한 모든 문학 작품은 필경 삶을 어떤 수준에서 새롭게 해주는 품격
을 지향해야 하며, 모든 문체와 기법은 이를 위해 은밀한 봉사를 해야 한다.
o 시를 짓는 사람은 언제나 개념과 감각의 상투형을 파괴하려고 대담하게 모험
하지 않으면 안된다.
x 젊음의 고뇟길에서도 늘 거울앞에 서서 자신만을 응시하더니, 그 고뇟길에서
돌아온 나이에도 여전히 거울앞에 앉아서 자기 얼굴만 들여다 보며 자기 얘기
만을 써내는 그런 시인들이 의외로 많다.
o 서사와 서정의 개념은 헤겔이 정의한 대로, 자기 노출의 주관성의 표현이 서정
으로 드러나는 것이요, 세상의 객관성을 움켜잡으려는 충동에서 서사가 나온
다고 말할 수 있다.
o 시인에게 있어 세상은 말고 투명한 감각으로 그 미세한 생명의 숨소리조차 놓
치지 않고 품어 안아야 할 삶의 현장이지, 싸움의 대상은 결코 아니다.
x 이슬방울 맺힌 청청한 풀잎의 그 식물적 생명성은 간데없고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 어쩌고 하는 비유의 뻣뻣한 잔해만 남아 공연히 폼을 잡는다.
o 삼라만상을 시인 자신의 주관성 표출의 도구로 전락시키지 않고 그것들의
빛나는 개별성을 그대로 포착하기 위해서는 생태학적 상상력이 요구된다.
o 시는 그 의식을 녹이고 삭여 예술성 짙게 형상화되어야지 생경한 구호 나열의
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o 시의 '어조'는 작품의 외적인 경험 현실의 맥락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그것은
시인의 세계관에 부과된 장식이 아니라, 바로 세계와 교섭하는 방식 그 자체
인 것이다.
o 유행에 편승하여 임시적이고 지엽적인 것에 매달리는 '유희정신'을 버리고
인간 존재와 삶에대한 근원적인 문제들을 오랫동안 속으로 묵혀서 오래남는
시를 쓸 수 있는 시정신이 필요할 때입니다.
o 요즈음 우리 시 일부에 유행하는 장광설, 비틀림, 무잡함에 일격을 가해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x '매맞아 버림받은 사람들' 역시 지나치게 구체?이어서 시적 함축이 제약
된다.
o 그의 시에 특징적인 것은 그 어느 경우에나 시인 개인의 사적 주석 또는 감
상적 개인에 의해 사물과 인생 그것의 본래적 역동성이 훼손되는 것을 시인이
극력 피하고 있다.
o 산문적 인식과 시적 인식의 차이 또는 산문적 표현 방식과 시적 표현 방식의
차이
o 시가 지금까지 존경을 받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른바 '최대의 이윤'이
아닌 '최고의 가치'와 '최고의 신실'을 추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o 도식성을 드러내기 시작하였고, / 요즘 우리 시단에서 너 나할것없이 발표하는
소위 생태시를 보고 있자면 지난 시대에 민중시가 보여줬던 단순성과 도식성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저버릴 수가 없다.
o 시인들이여 좀더 복잡해지기를, 시인들이여 인간은 물론 이 세계가 얼마나 다층
적이고 잡스러운 것인가를 새삼 인식하기를, 시인들이여 그 유행 휘하에서
과감히 벗어나기를, 시인들이여 노래하는 대상이 추상적 존재가 되거나 도그마
가 되지 않기를...
o 이번에 출간된 ooo의 시집을 보며 그가 왜 이렇게 바깥으로만 격하게 소리를
지르며 그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차분하게 내면화시키거나 좀더 입체적으로
바라보지 않는가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o 무엇보다도 시가 난해하지 않고 문장의 수식이 절제되어 편안한 마음으로 작품
을 대할 수 있다. 너무 언어가 화려해지고, 절실성보다 파격성에 매달리는 이
시대의 문화적 혹은 문학적 풍토에 비추어 볼 때, 그의 시는 조금 진부한 듯하
나 오히려 그것이 돋보인다.
o 그러나 나는 그가 좀 더 말을 아끼며 조용하게 그의 시세계를 다듬어 나갔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o 친숙함은 인식의 장애다.
x 저마다 자신의 개별적인 느낌들을 누가 무어라고 하건 말건 마구 써대는 시
x 이 시이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이 시대의 일반적인 모호함이다. 그러고 그 모호
함은 자기 개인에게서 발생하는 느낌이나 생각들을 좀 더 깊은 타자들과의 관
계라는 객관적 심연 속에서 우려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o 다시 말해서 두드러지게 노골적인 야유나 풍자를 통한 비관, 폭로속에 진정한
전복적인 힘이 '깃들어' 있으려면 그 작품의 시적 진정성, 슬픔과도 같은 큰
긍정이 그것을 깊은 데로부터 지탱해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천박한 욕설에 불과)
o '쉬운시'란 지시적이고 관습적인 전달성의 그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쉬운시란 '새로운 세계의 발견'과 '표현의 묘'를 지니고 우리에
게 다가온 '감동' 그 자체로서 존재해야 한다.
o 시의 공화국 안에서 시보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다 가짜다.
철학적 언사에 대한 강의를 쫓아다니는 자들, 제도권과의 유희를
벌이는 자들, 시 속에 종교적 언사를 흩뿌리는 자들, 시가
궁극적으로 말해야 할 것이 있다고 믿는 자들, 무엇 무엇이
시적 전통이라고 외치는 자들은 모두 자기 죽음을 지키려는
자들이다.
시 공화국은 오직 '구체적 외부'만을 가질 뿐이다.
o 진부한 일상성에 발목이 잡혀있는 의사시는 버리자 - 인신론이 없는
이런 시들은 요즘 우리의 시정신을 어지럽히고 있다고 생각한다.
o 즐거리의 최소한 합리성의 참견을 물리치기 힘든 소설과는 달리, 시는 그
자체로 완결되어 있는 비합리적 총체성을 오롯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o 창작 주체의 최대의 적은 보편성에 머무는 것이다.
o 시인은 망설일 필요가 없다. 강하게 진술.
o 아이러니의 제공 원인은 객관적 상황일 것. 독자가 미처 몰랐던 아이러니를
깨달을 것, 아이러니의 개인성은 공감을 얻지 못한다.
x 언제부터인가 감각적인 낱말의 무분별한 나열이 시의 재치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풍토가 조성되고 있다. 이러한 재치가 일방적으로 해롭다는
뜻이 아니라, 깊이있는 통찰력과 분명한 관점으로 탄탄한 구성이 이루어 지
지 않은 상태에서의 언어감각은 한대의 패션으로 끝날 우려가 있다는 사실
이다.
x 근시안적인 시인의 기능주의가 원인이 되기도 한다.
o 대상을 옳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상투적인 선입주를 버려야
한다. 상투적 선입주는 언제나 어제 본 그대로, 더구나 남들이 승인하는
그대로만 보기 때문에 다수의 동의를 얻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날
카롭고 창조적인 눈을 본쇄하고 사물을 획일화 된 무덤속에 가두게 된다.
대상을 옳게 표현한다는 것은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o 누보 로망은 이전 소설들이 기초하고 잇던 사실주의 이데올로기를 전복
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사실주의는 하나의 작품을 하나의 근거에
기초하여 설명한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는 미지라는 현실에 동의하며
불안한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누보 로망은 세계와 인간의 충돌을
작품안에서 처리한다. 사실주의는 주인공의 어려움과 갈등을 논리적으로
작품내에서 설명한다. 하지만 누보 로망은 책 자체가 설명이다. 누보
로망은 편안한 문학이 아니고 불편하게 만드는 문학이다. 그것이 가장 큰
차이다. 사실주의는 객관성과 주관성을 화해 불가능한 것으로 그린다. 누보
로망은 그것을 함께 보여준다. 이런 충돌이 우리가 쓰는 작품내에서
일어난다. 충돌이야말로 우리 일상이다. 언제나 두 가지 양극의 욕구가
충돌하고 있다. --- 누보 로망을 읽으면 독자는 능동적으로 깨어 있다.
책이 믿을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발자크의
작품이 주던 안정성, 사실성은 현대 문학에서 사라진다. 하나의 작품은
여러 가지 불가능한 요소들이 충돌하는 불안정한 장이라는 충돌을 받는다.
(알랭 로브 - 그리에)
o 노자는 말했다. 사람들은 진흙을 빚어 꽃항아리를 만든다. 그러나 실제로
쓰이는 부분은 꽃항아리 속의 비어있는 부분이다. -- 정작 중요한 것은
비어있는 부분일 터인데 능청이 지나쳐 여행담이 너무 수다스럽거나
여행자가 얻은 각종 지식과 풍물들을 너무 장황하게 늘어놓아 무거워 지는
대목들은 최근 우리 문학이 공통적으로 드러내는 취약점의 연장선상에 놓이
는 것이다. 비어있는 부분이 핵심이라지만 항아리의 모양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해야 상품(上品)이다.
o 시는 우선 시가 되어야 한다. 당시(唐詩)와 송시(宋詩)의 구분이나, 참여니
순수니 하는 변별은 그 다음 문제다. 동시에 그것은 세계관의 문제 이므로
호악(好惡)의 판단이 있을 뿐 우열(優劣)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시인이
시가(詩歌) 언어(言語)의 규율을 무시하고 목청만 잔뜩 높이게 되면 그것
은 한 때 대학가에 요란스레 나붙었던 대자보나 근엄한 목회자의 설교와
다를 바 없다. 웅변이나 설교를 시의 형식을 빌어 듣고 싶은 독자는 없을
것이다. 시는 결코 관념의 놀이터이어서는 안된다. 또 자신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몽환적 어휘의 나열이나 이미지의 배합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그것은 속세무민의 연금술사에 자나지 않을 것이다. 시는
결코 독해할 수 없는 상형문자이거나 암호문일 수는 없다.
하나는 화려한 자본주의적 이미지들 안에 은폐된 추악하고 어두운 죽음의
이미지를 투시적 상상력을 통해 보여주는 것인데, 이것은 행복의 신화를
깨뜨리는 대항 이미지의 창출이라고 할 만하다.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적 언
어 양식들의 어법과 표현을 그대로 차용하면서, 그것들의 비꼼을 통해 그
허구성을 폭로하는 것이다.
o 페러디란 무엇인가? 모든 글쓰기는 모방의 글쓰기 이면서, 동시에 스스로 낯선
것이 되려는 글쓰기 이다. 글쓰기의 욕망은 근본적으로 페러디의 욕망이기도
하다. 문학 행위는 현실에 대한 일차원적 반영의 행위가 아니라. 앞선 언어에
대한 끊임없는 모방과 베끼기의 행위이면서, 그 모방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위치를 점유하려는 행위이다.
o (80년대에 대한 90년대의 문학의 변화) 그것은 객관적 인식에 대한 주관적
인식의 우위, 웅변애 대한 독백의 우위, 집단적 전범에 대한 개인적인 개성의
우위, 모방론에 대한 표현론의 우위, 당위적 진리에 대한 일상적 진실의 우위,
재현적 진실에 대한 시적 탐구의 우위 등으로 거칠게 요약될 수 있을 뿐이다.
x 거기에는 생활의 객관적인 인식이 배제되어 있고 시를 쓰는 사람의 막연한
정서적 체혐이 모호환 관념적인 언어를 통하여 나타나 있을 뿐이다.
o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직접적이고 감각적으로 지각될 수 있을 때 효과
성을 띤다.
o 형용사나 부사어가 한 행에서 반복되면 천박한 느낌을 준다.
o 시를 포함한 모든 문학 작품은 필경 삶을 어떤 수준에서 새롭게 해주는 품격
을 지향해야 하며, 모든 문체와 기법은 이를 위해 은밀한 봉사를 해야 한다.
o 시를 짓는 사람은 언제나 개념과 감각의 상투형을 파괴하려고 대담하게 모험
하지 않으면 안된다.
x 젊음의 고뇟길에서도 늘 거울앞에 서서 자신만을 응시하더니, 그 고뇟길에서
돌아온 나이에도 여전히 거울앞에 앉아서 자기 얼굴만 들여다 보며 자기 얘기
만을 써내는 그런 시인들이 의외로 많다.
o 서사와 서정의 개념은 헤겔이 정의한 대로, 자기 노출의 주관성의 표현이 서정
으로 드러나는 것이요, 세상의 객관성을 움켜잡으려는 충동에서 서사가 나온
다고 말할 수 있다.
o 시인에게 있어 세상은 말고 투명한 감각으로 그 미세한 생명의 숨소리조차 놓
치지 않고 품어 안아야 할 삶의 현장이지, 싸움의 대상은 결코 아니다.
x 이슬방울 맺힌 청청한 풀잎의 그 식물적 생명성은 간데없고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 어쩌고 하는 비유의 뻣뻣한 잔해만 남아 공연히 폼을 잡는다.
o 삼라만상을 시인 자신의 주관성 표출의 도구로 전락시키지 않고 그것들의
빛나는 개별성을 그대로 포착하기 위해서는 생태학적 상상력이 요구된다.
o 시는 그 의식을 녹이고 삭여 예술성 짙게 형상화되어야지 생경한 구호 나열의
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o 시의 '어조'는 작품의 외적인 경험 현실의 맥락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그것은
시인의 세계관에 부과된 장식이 아니라, 바로 세계와 교섭하는 방식 그 자체
인 것이다.
o 유행에 편승하여 임시적이고 지엽적인 것에 매달리는 '유희정신'을 버리고
인간 존재와 삶에대한 근원적인 문제들을 오랫동안 속으로 묵혀서 오래남는
시를 쓸 수 있는 시정신이 필요할 때입니다.
o 요즈음 우리 시 일부에 유행하는 장광설, 비틀림, 무잡함에 일격을 가해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x '매맞아 버림받은 사람들' 역시 지나치게 구체?이어서 시적 함축이 제약
된다.
o 그의 시에 특징적인 것은 그 어느 경우에나 시인 개인의 사적 주석 또는 감
상적 개인에 의해 사물과 인생 그것의 본래적 역동성이 훼손되는 것을 시인이
극력 피하고 있다.
o 산문적 인식과 시적 인식의 차이 또는 산문적 표현 방식과 시적 표현 방식의
차이
o 시가 지금까지 존경을 받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른바 '최대의 이윤'이
아닌 '최고의 가치'와 '최고의 신실'을 추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o 도식성을 드러내기 시작하였고, / 요즘 우리 시단에서 너 나할것없이 발표하는
소위 생태시를 보고 있자면 지난 시대에 민중시가 보여줬던 단순성과 도식성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저버릴 수가 없다.
o 시인들이여 좀더 복잡해지기를, 시인들이여 인간은 물론 이 세계가 얼마나 다층
적이고 잡스러운 것인가를 새삼 인식하기를, 시인들이여 그 유행 휘하에서
과감히 벗어나기를, 시인들이여 노래하는 대상이 추상적 존재가 되거나 도그마
가 되지 않기를...
o 이번에 출간된 ooo의 시집을 보며 그가 왜 이렇게 바깥으로만 격하게 소리를
지르며 그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차분하게 내면화시키거나 좀더 입체적으로
바라보지 않는가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o 무엇보다도 시가 난해하지 않고 문장의 수식이 절제되어 편안한 마음으로 작품
을 대할 수 있다. 너무 언어가 화려해지고, 절실성보다 파격성에 매달리는 이
시대의 문화적 혹은 문학적 풍토에 비추어 볼 때, 그의 시는 조금 진부한 듯하
나 오히려 그것이 돋보인다.
o 그러나 나는 그가 좀 더 말을 아끼며 조용하게 그의 시세계를 다듬어 나갔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o 친숙함은 인식의 장애다.
x 저마다 자신의 개별적인 느낌들을 누가 무어라고 하건 말건 마구 써대는 시
x 이 시이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이 시대의 일반적인 모호함이다. 그러고 그 모호
함은 자기 개인에게서 발생하는 느낌이나 생각들을 좀 더 깊은 타자들과의 관
계라는 객관적 심연 속에서 우려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o 다시 말해서 두드러지게 노골적인 야유나 풍자를 통한 비관, 폭로속에 진정한
전복적인 힘이 '깃들어' 있으려면 그 작품의 시적 진정성, 슬픔과도 같은 큰
긍정이 그것을 깊은 데로부터 지탱해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천박한 욕설에 불과)
o '쉬운시'란 지시적이고 관습적인 전달성의 그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쉬운시란 '새로운 세계의 발견'과 '표현의 묘'를 지니고 우리에
게 다가온 '감동' 그 자체로서 존재해야 한다.
o 시의 공화국 안에서 시보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다 가짜다.
철학적 언사에 대한 강의를 쫓아다니는 자들, 제도권과의 유희를
벌이는 자들, 시 속에 종교적 언사를 흩뿌리는 자들, 시가
궁극적으로 말해야 할 것이 있다고 믿는 자들, 무엇 무엇이
시적 전통이라고 외치는 자들은 모두 자기 죽음을 지키려는
자들이다.
시 공화국은 오직 '구체적 외부'만을 가질 뿐이다.
o 진부한 일상성에 발목이 잡혀있는 의사시는 버리자 - 인신론이 없는
이런 시들은 요즘 우리의 시정신을 어지럽히고 있다고 생각한다.
o 즐거리의 최소한 합리성의 참견을 물리치기 힘든 소설과는 달리, 시는 그
자체로 완결되어 있는 비합리적 총체성을 오롯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o 창작 주체의 최대의 적은 보편성에 머무는 것이다.
o 시인은 망설일 필요가 없다. 강하게 진술.
o 아이러니의 제공 원인은 객관적 상황일 것. 독자가 미처 몰랐던 아이러니를
깨달을 것, 아이러니의 개인성은 공감을 얻지 못한다.
x 언제부터인가 감각적인 낱말의 무분별한 나열이 시의 재치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풍토가 조성되고 있다. 이러한 재치가 일방적으로 해롭다는
뜻이 아니라, 깊이있는 통찰력과 분명한 관점으로 탄탄한 구성이 이루어 지
지 않은 상태에서의 언어감각은 한대의 패션으로 끝날 우려가 있다는 사실
이다.
x 근시안적인 시인의 기능주의가 원인이 되기도 한다.
o 대상을 옳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상투적인 선입주를 버려야
한다. 상투적 선입주는 언제나 어제 본 그대로, 더구나 남들이 승인하는
그대로만 보기 때문에 다수의 동의를 얻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날
카롭고 창조적인 눈을 본쇄하고 사물을 획일화 된 무덤속에 가두게 된다.
대상을 옳게 표현한다는 것은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o 누보 로망은 이전 소설들이 기초하고 잇던 사실주의 이데올로기를 전복
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사실주의는 하나의 작품을 하나의 근거에
기초하여 설명한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는 미지라는 현실에 동의하며
불안한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누보 로망은 세계와 인간의 충돌을
작품안에서 처리한다. 사실주의는 주인공의 어려움과 갈등을 논리적으로
작품내에서 설명한다. 하지만 누보 로망은 책 자체가 설명이다. 누보
로망은 편안한 문학이 아니고 불편하게 만드는 문학이다. 그것이 가장 큰
차이다. 사실주의는 객관성과 주관성을 화해 불가능한 것으로 그린다. 누보
로망은 그것을 함께 보여준다. 이런 충돌이 우리가 쓰는 작품내에서
일어난다. 충돌이야말로 우리 일상이다. 언제나 두 가지 양극의 욕구가
충돌하고 있다. --- 누보 로망을 읽으면 독자는 능동적으로 깨어 있다.
책이 믿을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발자크의
작품이 주던 안정성, 사실성은 현대 문학에서 사라진다. 하나의 작품은
여러 가지 불가능한 요소들이 충돌하는 불안정한 장이라는 충돌을 받는다.
(알랭 로브 - 그리에)
o 노자는 말했다. 사람들은 진흙을 빚어 꽃항아리를 만든다. 그러나 실제로
쓰이는 부분은 꽃항아리 속의 비어있는 부분이다. -- 정작 중요한 것은
비어있는 부분일 터인데 능청이 지나쳐 여행담이 너무 수다스럽거나
여행자가 얻은 각종 지식과 풍물들을 너무 장황하게 늘어놓아 무거워 지는
대목들은 최근 우리 문학이 공통적으로 드러내는 취약점의 연장선상에 놓이
는 것이다. 비어있는 부분이 핵심이라지만 항아리의 모양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해야 상품(上品)이다.
o 시는 우선 시가 되어야 한다. 당시(唐詩)와 송시(宋詩)의 구분이나, 참여니
순수니 하는 변별은 그 다음 문제다. 동시에 그것은 세계관의 문제 이므로
호악(好惡)의 판단이 있을 뿐 우열(優劣)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시인이
시가(詩歌) 언어(言語)의 규율을 무시하고 목청만 잔뜩 높이게 되면 그것
은 한 때 대학가에 요란스레 나붙었던 대자보나 근엄한 목회자의 설교와
다를 바 없다. 웅변이나 설교를 시의 형식을 빌어 듣고 싶은 독자는 없을
것이다. 시는 결코 관념의 놀이터이어서는 안된다. 또 자신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몽환적 어휘의 나열이나 이미지의 배합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그것은 속세무민의 연금술사에 자나지 않을 것이다. 시는
결코 독해할 수 없는 상형문자이거나 암호문일 수는 없다.
출처 : 남궁명 시인의 <기억의 고집>
글쓴이 : 체스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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