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 / 이명윤
큰 눈이 왔다
한 소년의 눈망울이 적설량을 재고 갔다
새벽부터 눈을 치웠다 삽에 담긴 겨울이 무거웠다 개 한 마리 흥에 겨워 따뜻한
똥을 누고 갔다
잠시 후 아이들이 눈을 끌고 다녔는데 눈이 배꼽을 드러내고 희게 웃었다
하루 내내 눈을 치우고 안전표지판을 바로 세웠다
다음날, 무슨 일이 있었느냐 능청스럽게 白雲을 문 하늘의 입 언저리가 새파랗다
뭐라고 한 마디 해야겠는데
파란 바람에 그만 눈이 시려와 그만두기로 했다
보험설계사가 웃으며 새 달력을 건네준다 물끄러미 마흔과 조우했다
깜박 잊고 있었던 봉투를 찾아 들었다
우체국 가는 길, 일그러진 표정의 잔설이 자꾸만 발등에 올라탄다 골목을 돌자
등 뒤로 개 짖는 소리 따라 걷기 시작하고
소리는 점점 눈 뭉치처럼 커져만 가는데
세탁소 이층집 창가에서 바라보던 아이, 눈이 마주치자 쿵, 커튼을 내린다
눈두덩에 잔설이 떨어진 것은 우연일까 곁눈을 뜨자 가로수가 무거운 팔을 든 채
멀뚱 쳐다본다 고개를 든다
글썽글썽 눈구름이 참 곱다
<출처> 제9회 수주문학상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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