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가는 사람은 아쉽고 보내는 사람은 서럽다. 김용택(60)시인은 덕치초등학교 제자들과 마지막 수업을 마친 뒤 한명씩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꼭 껴안았다.
수업 10분 전, 교무실 행정직원이 사과와 복숭아를 양손에 들고 왔다. “어디서 났어?” “충용이네 집에서 드시라고 가져왔네요.” 대화는 무심했다. 오전 11시. 수업종이 울렸다. 운동장 저만치에서 아이들이 뛰어왔다. 아이들은 초등학교 3학년이다. 오늘이 마지막 수업이란 건 잘 알고 있다.
“니네도 사과 먹었어? 복숭아는?” 노교사의 질문에 아이들은 차례로 편지봉투를 내밀었다. 떠나는 선생님에게 직접 전하는 편지다. 노교사는 아이들을 데리고 교실로 들어갔다. 노란색 분필로 칠판 가득하게 글을 썼다. ‘마지막 수업.’
노교사가 인생을 말하는 동안, 교실 밖에선 새가 울었고 꽃은 바람에 흔들렸다. 12명의 아이들은 눈망울을 굴리며 귀를 기울였다. “우리 대길이 아버지도, 민수 아버지도, 성민이 아버지도 내가 가르쳤다.” 부모님 이야기가 나오자 아이들은 무엇이 좋은지 ‘까르르, 까르르’ 소리를 내며 웃었다. 교실은 따스한 햇살과 찬란한 웃음으로 출렁였다.
“내가 니네를 생각하면서 동시집을 만들었단다. 그 책을 선물로 주고 갈란다.” 노교사는 아이들 한명 한명의 이름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했다. 동시집을 열고 당부의 말을 썼다. “주희야, 소희야. 할매 잘 모시고 잘 살아야 한다.” “성민아, 큰 강과 큰 산 같은 사람이 돼라.” 노교사는 각자에 필요한 글귀를 써놓은 뒤 아이들을 껴안았다. “내가 말여. 니들하고 있는 동안 너무나 행복했다. 고맙다.” 아이들은 그의 품에 포근하게 안겼다.
다시 수업종이 울렸다. 아이들은 책을 안고 운동장으로 조르륵 내달렸다. 교실엔 노교사만 남았다. “3년 전부터 마지막 수업을 준비했는데. 참 막막하네요.” 그는 아이들이 남기고 간 편지를 만지작거리다 가방에 넣었다. “집에 가서 아내랑 둘이서 읽어 볼랍니다. 눈물이 많이 나겠네요.” 노교사의 뒷모습이 쓸쓸했다.
전북 임실 덕치초등학교 교사인 김용택(60)시인. ‘섬진강 시인’으로 알려진 그는 2008년 8월 26일 마지막 수업을 했다. 교단을 떠난 것은 나흘 뒤인 30일이다.
- ▲ 김용택(60)시인은 섬진강 시인으로 불린다. 섬진강에서 태어나 자라고 배웠다. 그 곳에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늙어간다. 그리고 언젠가 섬진강의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사진=김영관
교사 김용택
사람은 김용택처럼 살아야 한다. 그것이 순리다. 그는 1948년 임실에서 태어나 여지껏 고향을 지키고 있다. 임실을 떠난 것은 평생 단 두 번이다. 전쟁으로 피난을 갔을 때와 고교 졸업 후 방황할 때가 전부다.
그는 고향에서 어른이 됐고 교사라는 직업을 얻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자연과 아이들 옆에서 시를 배웠고 유명해졌다. 먼 훗날, 흙으로 돌아갈 곳도 고향이다.
“우리 학교 안에 커다란 살구나무가 있어요. 내 지나간 날들을 살구나무와 같이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네요. 살구나무는 내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 작은 나무였어요. 아이들과 살구를 따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서른 살이었고, 아이들이 꽃잎을 날리면 그 꽃잎을 따라다니다 웃음소리에 놀라 뒤돌아보니 마흔 살이 되었던 거죠. 아이들과 웃느냐고 뛰어다니다 앞산을 보니 쉰 살이었어요. 이제 살구나무가 다 살고 꽃도 안 열리고 살구도 안 열리고…. 학교를 나가려고 돌아보니까 예순 살이 됐네요. 세월이 정말 금방이죠?”
그는 교정을 나오면서 “다음 주부터는 학교에 절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여러번 다짐했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학교를 쳐다봤다. 그만큼 덕치초등학교는 애틋한 곳이다.
“선생이 돼서 어디서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죠. 내가 여기서 태어나고 자라고 해서 선생이 됐으니까, 여기서 나를 잘 가꾸면서 한번 살아보는 것도 괜챦겠네 하는 소박한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교직 38년 가운데 27년을 이 학교에서만 산 거죠. 있어도 지루한 적이 없었고 떠나고 싶은 적도 없었고….”
한때는 전교생 700여명에서 이제 45명으로 줄어든 시골의 작은 학교. 김용택은 여기서 많은 제자를 만났다. 그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은 무엇일지 궁금했다. 그는 뜻밖에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제자들한테는 교사로써 한 인간으로써 잘못한 게 너무 많죠. 지나치게 혼내거나 체벌을 했다던가. 힘 없는 어린 아이들에게 어른으로써 인격적인 대우가 아닌, 힘있는 자로써 대했다는 생각이 참 많아요. 요즘에는 뒤돌아보면서 곳곳에 미안한 곳이 너무 많고. 애들 찾아 다니며 그때 내가 잘못했다고 빌고 싶어요.”
마음이 뭉클했다. “그런 말도 해주고 싶네요.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해라, 사람이 희망이다. 극심한 물질만능주의 때문에 인간이 소외 받는 사회인데. 나는 그럴 수록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해요.”
그의 언어엔 묘한 리듬이 숨어 있다. 남도 사투리 특유의 억양이 그 리듬을 더욱 상쾌하게 했다. 하지만 종종 그 리듬은 잘 벼려진 칼로 변했다. 현 교육의 문제점을 질타할 때 그랬다. 그만큼 그의 비판은 통렬했다.
“적어도 초등학교에서는 점수 위주 보다 삶 위주의 교육을 열어야 한다고 봅니다. 말하자면 나도 있지만 다른 것도 있다는 걸 가르쳐야 한다는 거죠. 지금은 나만 있는 거잖아요? 나만 일등하면 되니까. 삶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교육적인 상황이 많아요. 그 속에서 창조적인 인간을 길러내는 그런 교육이 중요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씩 커졌다. “도대체 이해가 안되는 것이. 초등학교 1·2·3학년 아이들이 학원을 하루에 세개, 네개를 다닌다는 거예요. 여기서 음악 배우고 저기서 태권도 배우고 영어 배우고 뺑뺑 도는데. 그 아이들이 그 지식을 이해하고 감당할 능력이 있겠어요?”
후배 교사들에겐 이런 말을 남겼다. “가장 중요한 건 사랑입니다. 교사는 사랑을 줄 때와 회수할 때를 적절하게 조절해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건 아이가 어렵고 곤경에 처했을 때 쏟아야죠. 아이들은 진심이구나 싶으면 다가 오거든요. 사랑의 회수도 중요하죠. 애들이 거짓말 한다거나 비겁하면 매섭게 사랑을 회수해야죠. 선생님이 이럴 때는 사랑을 회수하는구나, 이럴 땐 끊임없이 사랑을 주는구나. 아이들이 이걸 알아야죠. 그 과정을 통해 바른 길로 인도하는 거예요, 선생님은.”
시인 김용택
고수(高手)의 말은 이해해도 실천하기 힘들다. 1982년 ‘섬진강 1’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타난 김용택. 그의 글은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다. 수많은 문학상도 받았다. 고수에게 글 잘 쓰는 방법을 묻자 “잘 살면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의 말은 이랬다.
“글을 잘 쓴다는 건 삶을 잘 산다는 건데. 살고 있는 삶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돼요. 그럼, 그것이 나하고 무슨 관계가 맺어지잖아요? 관계가 맺어질 때 생각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 생각을 논리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바로 인생이고 글이예요. 결국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자세히 보고 아는 사람이 글을 잘 쓰는 사람이죠.”
김용택은 이런 말도 했다. 자연이 말하는 걸 받아적는 것, 그것이 글이다. “바람이 흔들리는 모습이라든가, 꽃이 봄부터 펴서 지금까지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자연이 너무 많은 말을 해주기 때문에 받아 적기도 힘들어요. 봄이 되면 아침에 꽃이 피고 꽃잎이 날리지, 새들이 찾아와 울고 난리를 치지, 농부가 왔다 갔다 하지. 자연은 너무나 많은 말을 해주는 거예요. 예전에는 감당을 못했어요. 그래서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어요. 이젠 자연과 화해를 했어요. 그렇게 심한 갈등을 겪고 나니까 산이 산으로 가버리는 거야, 꽃은 꽃으로 가버리는 거야, 물은 물로 가버리는 거야. 객관적으로 볼 수가 있는 거지. 이래서 나이를 든다는 건 아주 아름다운 거예요.”
자연이 말하는 소리를 듣고 가슴에서 나오는 언어를 말해라. 그것이 곧 좋은 글이고 좋은 시가 된다. 그런 까닭에 때묻은 어른보다 순수한 아이들이 시인에 가깝다고 김용택은 믿는다. 교단을 떠나는 그가 어린 제자의 좋은 시를 추천했다. 김용택은 그 글을 보고 많이 웃고 많이 배웠다고 했다. 덕치초등학교 3학년 문성민(9)군의 글이다. 제목은 ‘뭘 써요? 뭘 쓰라고요?’ 조선일보 독자들도 꼭 함께 보고 감상하자 했으니 그의 글을 옮기는 건 결례가 아니리라.
- ▲ 김용택(60)시인은 가슴에서 나오는 언어를 말하라고 가르쳤다. 그것이 곧 좋은 글이기 때문이다. 교단을 떠나는 그가 어린 제자의 작품을 소개했다. / 사진=김영관
시써라
뭘써요?
시 쓰라고.
뭘 써요?
시 써서 내라고!
내.
제목을 뭘 써요?
니 맘대로 해야지.
뭘 쓰라고요?
니 맘대로 쓰라고.
뭘 쓰라고요?
1번만 더하면 죽는다.
뭘 쓰라고요?
이 녀석아!
장난하냐!
사족(蛇足)
김용택은 교단을 떠났지만 고향을 떠나진 않을 생각이다. 앞으로도 임실에 가면 그를 만날 수 있다. 마침 임실군청은 그의 집 인근에 ‘문학관’을 건립하기로 했다. 김용택은 여전히 아이들과 놀며 글을 쓰고 있을 것이다.
그와 두 번을 만났다. 좋은 사진을 얻고 싶다 핑계를 댔지만 실은 그가 보고 싶어 먼 길을 다시 찾아갔다. 수많은 대화 가운데 가장 좋았던 것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였다. 교과서에 실린 시 ‘그 여자네 집’과도 관련된 이야기다.
“초겨울에 들판을 걸어가는데 저 멀리 푸른 배추밭이 보였어요. 그 여자가 수건을 쓰고 허리를 굽혀 배추를 이더니 걸어오는 거야. 논으로 쭉 걸어오는데 나를 향해 걸어오는 것 같아. 벌떡 놀랬죠. 그 하얀 수건을 쓰고 배추를 소쿠리에 담았는데 배추가 출렁거리는 거야, 여자의 치마는 하늘거리는 거야. 그 모습에 내가 반했던 거죠, 하하.”
“사랑은 기쁨과 아픔이 동시에 있는 거고, 행복함과 괴로움이 동시에 있는 거죠. 사랑이야 말로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해주는 가장 아름다운 겸손이죠. 놀라워요, 사랑이라는 게. 인간에게 사랑이 없으면 빈 껍데기예요.”
<출처: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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