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안도현 ‘신춘문예와 나, 그리고 예비작가들을 위하여’ | ||
나는 비교적 일찍 신춘문예에 눈을 뜬 편이다. 고등학교 때 문예반 활동을 하면서 까까머리 1학년 시절부터 겁도 없이 응모를 했다. 특별히 자격이 제한되어 있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지만, 신춘문예가 문학도로서 당연히 통과해야 하는 관문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 당시는 원고지에 정서를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원고를 작성할 때 뭔가 ‘튀는’ 아이디어가 없을까 하고 궁리를 하곤 했다. 예를 들면 붉은 줄이 쳐진 200자 원고지보다는 크기와 디자인이 다른 특별한 원고지를 수소문해 찾았으며, 원고지를 묶는 방법에까지 신경을 썼다. 그만큼 공을 들인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싶을 정도로 우리는 신춘문예에 목을 맸다. ‘원고에 들인 공까지도 문학이다’라는 말을 나누면서 말이다. 우체국에 가서 등기우편으로 원고를 보내고는 당선 통보를 기다리며 자주 등기우편 영수증을 들여다보던 일, 때로는 치기로 당선소감을 먼저 써서 떡하니 벽에 붙여 두었던 일, 상금을 받으면 갚겠다고 큰소리를 치고는 외상술을 무진장 먹던 일도 다 신춘문예 덕분이었다. 문학으로 삶의 어떤 전환점을 모색해 보려는 사람들에게 신춘문예는 여전히 눈부시고 달콤한 유혹이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적지 않은 원고료를 거머쥐는 기회가 인생에 그리 자주 오지는 않는 법. 궁핍한 문학청년이 하루아침에 빛나는 등단 작가가 된다는 상상만으로도 신춘문예는 선망의 대상이 될 만하다. 당선의 쾌감보다는 실패의 쓴맛을 수차례 맛보았으면서도 묵묵히 펜의 칼을 가는 사람들이 신춘문예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모 지방신문 신춘문예 심사평에 내가 응모한 작품의 제목이 간당간당 걸려 있었는데, 나는 당선된 것보다 더 기고만장하게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던 기억도 있다.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될 때까지 해마다 겨울은 신춘문예 때문에 아팠고 뜨거웠다. 등단 전, 내 습작품은 대부분 신춘문예 마감일을 앞두고 마무리된 것이 많았다. 참으로 많은 시를 그때 방바닥에 엎드려 썼다. 당시에는 해마다 당선과 상금이 일차 목표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 시절이 그 어느 때보다 나 자신을 혹독한 수련과 연마 속으로 몰고 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신춘문예는 하나의 통과의례일 뿐 결코 최종 목적지는 아니다. 작가로서의 길을 완벽하게, 끝까지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이제까지 신춘문예를 통해 화려하게 박수갈채를 받으며 등단한 사람 중에는 밤하늘의 유성처럼 사라진 작가가 오히려 더 많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신춘문예의 편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문학을 꿈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신춘문예는 여전히 하나의 ‘꿈의 공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공장이 만약에 없다면 누가 문학을 꿈의 중심에 턱하니 얹어 놓겠는가. 해마다 신년 첫날, 나는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서 신문을 사러 나간다. 그날 신문이 일년 중 가장 신선한 것은 신춘문예라는 꿈의 공장에서 나온 두근거리는 생산물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안도현 시인·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자
○안도현 시인은? △1961년 경북 예천 출생 △원광대 국문과 졸업 △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낙동강’ 당선 △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 당선 △96년 ‘시와 시학’ 젊은 시인상 수상 △98년 소월시문학상 수상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 ‘외롭고 높고 쓸쓸한’ ‘바닷가 우체국’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동화집 ‘연어’ ‘증기 기관차 미카’ 등
<출처: 동아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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