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웃음/ 엄경희
아비와 어미가 어린 것들의 손을 잡고 동산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 앞에 섰습니다. 달님은 맑고 깨끗한 얼굴로 이들 가족을 바라봅니다. 아비와 어미는 간절하게 소망을 빌어봅니다. 욕심 없는 간절함이 걸어서는 갈 수 없는 멀고 먼 달에 닿습니다. 이 우주적 교감은 평화롭고 아름답습니다. 인간의 형상이 겸손한 자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천양희 시인은 이런 우리들의 마음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달빛이 너무 환해서/ 나는 그만 어둠을 내려놓았습니다/ 둥글게 살지 못한 사람들이/ 달보고 자꾸 절을 합니다/ 바라보는 것이 바라는 만큼이나 간절합니다/ 무엇엔가 찔려본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달도 때로 빛이 꺾인다는 것을/ 한달도 반 꺾이면 보름이듯이/ 꺾어지는 것은 무릎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을 들고 달빛 아래 섰습니다/ 들숨 속으로 들어온 달이/ 마음속에 떴습니다/ 달빛이 가시나무 울타리를 넘어설 무렵/ 마음은 벌써 보름달입니다"('마음의 달' 중에서)
달 앞에서의 기원은 둥글게 살지 못한 사람들이 어두운 마음을 고백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순간 우리는 자기 자신을 위해 기원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호명하며 간절히 절을 하고 또 절을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이타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환한 달이 마음에 차오릅니다. 은은한 빛으로 밝아진 마음을 안고 아비와 어미는 어린 것들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조용하고 거룩한 귀환입니다.
추석이 다가왔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공기는 서늘해지고 감과 대추가 붉어집니다. 오랜 시간을 이겨낸 과실들이 자신들의 한 해를 완성합니다. 마당에 늙은 밤나무는 가을 복판에서 알밤을 쏟아냅니다. 굵고 단단한 밤알이 기름집니다. 농부는 아까운 햇빛을 쓸어 모아 멍석 위에 펼쳐놓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수시로 쓸어줍니다. 거기서 들깻단과 붉은 고추는 잘 말라갑니다. 더없이 풍요로운 가을의 마당입니다. 이 모두가 봄과 여름의 결실입니다.
그러나 거둘 것 없는 자의 텅 빈 마당도 있습니다. 마음은 더 가난해지고 모두에게 면목이 없습니다. 힘겨운 도시살이 속에서 열심히 일했지만 웃음을 안고 고향에 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잃고 빼앗긴 마음이 상처가 되었습니다. 올해는 휴가도 짧고 해서 고향에 가지 못한다고 전화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마음이 어둠 한 켜를 더 만듭니다. 여기는 걱정 말고 건강이나 잘 돌보라는 부모님의 음성이 애틋합니다.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거둔 것이 있든 없든, 그래도 추석에는 전을 부치고 토란탕을 끓일 일입니다. 시장에 나가 고사리와 조기 한 마리 사고 아이에겐 새 신발도 한 켤레 사줄 일입니다. 소박하게 차린 한 상의 음식을 놓고 서로 다독이며 애썼다고 말할 일입니다. 허물은 덮어주고 서운했던 것은 털어낼 일입니다. 웃음이 걱정과 근심을 해결해 주지 못해도 그걸 이겨낼 밑천은 될 수 있습니다. 웃을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탁월한 능력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동안 인색했던 웃음도 추석상에 올려볼 일입니다.
다들 힘겹다고 말합니다. 어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다고 합니다. 올 추석은 더 어렵다고들 합니다.
어려울수록 좋은 얘기를 더 많이 나눌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그래서 저도 좋은 얘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올 추석에는 크고 둥근 달이 동산 높이 떠오르길 희망합니다. 여든을 바라보는 제 어머니가 건강이 예전같지 않으십니다. 둥근 보름달이 떠오르면 저도 달님 앞으로 나가보겠습니다. 그리고 간절하게 빌어보겠습니다. 들숨 속으로 들어온 환한 달빛으로 어머니를 안아드리겠습니다. 정성을 다해 안아드리겠습니다. 둥글게 살지 못했던 마음을 둥글게 매만져 보겠습니다.
엄경희 (숭실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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