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 만찬/김춘기
내설악의 가을이 귀때기청봉을 넘어
양양 벌에 닿으면 강은
한가위 전날 어머니처럼 가슴이 뛴다
고향을 떠나 캄차카를 배경으로
베링해의 물밭 일구던 연어 떼
일만km 거친 바닷길 달려온다.
바다표범 모여 사는 구릴열도 지나
소야해협 원양 선단을 빙 돌아
기억의 촘촘한 회로를 한 가닥씩 풀어내는
연어의 발길이 숨 가쁘다
동해의 한류를 헤치며 청진항 불빛 파도를 넘어
낙산해변 벼랑에 다다른 연어
모천의 숨소리를 듣는다
설악에 탯줄을 묻은 남대천
늦여름부터 산모 받아드릴 채비에 설렌다
입덧 가득한 산란기의 어미 연어
물살의 갈피를 돌돌 말아, 집 한 채씩 짓는다
혼인색 눈부신 수컷의 격렬한 공방전
산통을 어루만지며 붉은 알 쏟는 어미
강물은 산파가 되어 기진맥진한 연어의 배를 눌러준다
지느러미 팽팽한 아비 마지막 체액 몇 방울이 뜨겁다
숨이 멎는 연어의 홀쭉한 배가 여기저기서
물길을 뒤집는다
갈매기 흰비오리에게 온몸 보시하는 연어
조문객이 된 새우 동자개 참게에게도
살점을 떼어준다
집단 장례 만찬을 끝낸 영혼의 행렬
안개비를 앞세우고, 종일 만장이 펄럭이는 바다로 간다
강물의 울음이 둑을 타고 넘는다
생명을 받아먹은 남대천
다시 무수한 생명을 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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