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철 시인 시 두 편
별이 뜰 때 / 이기철
나는 별이 뜨는 풍경을 삼천 번은 넘게 바라보았다
그런데도 별이 무슨 말을 국수처럼 입에 물고 이 세상 뒤란으로 살금살금 걸어오는지를 말한 적이 없다
별이 뜨기 전에 저녁쌀을 안쳐놓고 상추 뜯으러 나간 누이에 대해 나는 쓴 일이 없다
상추 뜯어 소쿠리에 담아 돌아오는 누이의 발목에 벌레들의 울음이 거미줄처럼 감기는 것을 말한 일이 없다
딸랑딸랑 방울을 흔들며 따라오던 강아지가 옆집 강아지를 만나 어디론가 놀러 가버린 그 고요함을 말한 일이 없다
바삐 갈아 넘긴 머슴의 쟁기에 찢겨 아직도 아파하는 산그늘에 대해,
어서 가야 하는데, 노오란 새끼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아직 벌레를 잡지 못해 가슴을 할딱이는 딱새가 제 부리로 가슴 털을 파고 있는 이른 저녁을 말한 일이 없다
곧 서성이던 풀밭들은 침묵할 것이고 나뭇잎들은 다소곳해질 것이다
부엌에는 접시들이 달그락거리며 입 닫은 딱새의 말을 대신 해줄 것이다
별이 뜨면 사방이 어두워져 그때 막내별이 숟가락을 입에 문 채 문간으로 나올 거라는 내 생각은 틀림없을 것이다
별이 뜨면 너무 오래 써 너덜너덜해진 천 원짜리 지폐 같은 반달이 느리게 느리게 남쪽 산 위로 돋을 것이라는 내 생각은 틀림없을 것이다
별이 뜨면 벌들과 딱정벌레들이 둥치에서 안 떨어지려고 있는 힘을 다해 나무를 거머쥐고 있는 것을 어둠 속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별이 뜨면 귀뚜라미가 찢긴 쌀 포대에서 쌀 쏟아지는 소리로 운다고 터무니없는 말을 나는 한 마디만 더 붙이려고 한다.
이것들이 다 별이 뜰 때, 별이 뜨면 생기는 일들이다
<문예중앙> 2004년 겨울호
저녁이 다녀갔다 / 이기철
내 다 안다, 사람들이 돌아오는 동네마다 저녁이 다녀갔음을, 나이 백 살 되는 논길에 천살의 저녁이 다녀갔음을, 오소리 너구리 털을 만지며 발자국 소리도 없는 저녁이 다녀갔음을
찔레꽃 필 때 다녀가고 도라지꽃 필 때 다녀간 저녁이 싸리꽃 필 때도 다녀가고 오동꽃 필 때도 다녀갔음을, 옛날에는 첫 치마 팔락이던 소녀 저녁이 이제는 할마시가 되어 다녀갔음을
내 다 안다, 뻐꾸기 자주 울어 맘 없는 저도 울며 상춧잎에 보리밥 싸 먹고 맨드라미 밟고 온 저녁이 대빗자루로 쓴 마당에 손님처럼 過客처럼 다녀갔음을, 풀꽃의 신발마다 이슬 한잔 부어놓고 다녀갔음을, 내일 다시 태어날 사람을 위해 들판 가득 달빛을 뿌려놓고 다녀갔음을
이기철 시인
1943년 경남 거창에서 출생, 영남대 국문과를 졸업
동대학원에서 국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2년『현대문학』으로 데뷔했고, 1976년부터 '자유시' 동인으로 활동.
시집『낱말 추적』『청산행』 『전쟁과 평화』 『우수의 이불을 덮고』 『내 사랑은 해지는 영토에』『시민일기』『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열하를 향하여』 『유리의 나날』
김수영문학상(1993), 후광문학상(1991), 대구문학상(1986), 금복문화예술상(1990),
도천문학상(1993) 등을 수상. 현재 영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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