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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문학장르/좋아하는 詩

신미균 시인의 좋은 시

by 광적 2020. 12. 20.

신미균 시인의시

 



신미균 시인
195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교육대학 졸업하고
1996년 『현대시』 등단
2003년 시집 <맨홀과 토마토케첩> 천년의시작
2007년 시집 <웃는 나무> 서정시학

 

 

막내 삼촌 / 신미균

 

 

게시판에 붙어 있는
압핀을 본다
무얼 붙이고 있기는 했는데
그 무엇이 떨어져 나가자
할 일 없이 그저 숨죽이고
납작하게 붙어있다
아무런 무늬도 없고
평범하게 생긴 조그만 쇳조각이라
손톱으로 건드리기만 해도
쉽게 떨어질 것 같다


회사가 문 닫았다고
식구들에게 말하지도 못하고
아침마다 어디론가 출근했다가
들켜버린 막내 삼촌 마냥
겸연쩍게 씩 웃으며
그냥 힘없이
툭 떨어질 것 같다


나는 압핀이 잘 붙어있게
손으로 지그시
눌러주었다

 

 

 

공(球) / 신미균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하면
손을 떠난 물체는 땅으로 떨어지게 되어있다.
공도 그 중의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공은 잠시 동안이지만
인력을 거부할 줄 안다
돌이나 책처럼
처음부터 항복하지 않고
스스로 튀어 오름으로
우리에게 신선한 즐거움을 준다
한 번 떨어진 물체는
대부분 그 자신이 부서지거나
금이 가서 상처를 입게 되지만
공은 내색하지 않는다


밑으로 떨어져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그대로 주저앉아야 하는 심정을
속을 비우고 공처럼 가볍게 뛰어 올라
다시 시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지금 어떤 물체 하나
땅으로 떨어지고 있다

 

 


가방 / 신미균

 

 

소가죽으로 만든 가방 속에는
소가 들어 있다
가방 끈을 메고 집을 나서려면
고삐를 묶어 놓은 여물통이 따라오고
사랑채가 따라오고 마당이 따라온다
마당은 사람들이 밟아도
아랑곳하지 않는 풀들로 가득하고
말라리아에 걸린 양철 지붕은
오한이 나서 잔기침을 하는지 들썩거린다
한쪽에선 이마에 손을 얹은 어머니가
걱정스런 얼굴로 숯불 약탕관에 부채질을 하며
질경이를 달이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고삐를 더 끌어당기면
짧은 고삐 때문에
몸이 가로대에 걸린 소가 미처 몸이
빠져 나오지 못해 눈을 꿈벅이는 것이 보이고
큰 병원으로 가기 위해
후들거리는 다리로
바지를 꿰고 있는 내 모습이 보인다
소가죽 가방 속에는
전자 계산기와 만년필과
손수건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숨 쉴 때마다 하얀 콧김 나오는
정다운 소도 한 마리 들어 있다
나는 아침마다 소 한 마리 데리고
대문을 나선다

 


/ 신미균

 


내가 사는 아파트
9동과 네가 사는 아파트
10동 사이에 있는
바다는
너무 깊어
헤엄쳐 건널 수가 없다

그냥
서로 바라만 보고
살자

 

 

 

튀김용 개구리 / 신미균

 

 

하마터면
뜰채에서
떨어질뻔 했네
휴- 간신히
턱걸이 했어
옆에 간당간당하는
비실비실한 놈을
발로 차고 꼬집어
떨어뜨리고 나니
속이 다 시원해


야호
드디어
나도 뽑혔다

 

 

후포에서 / 신미균

 


빨랫줄에 널린
마른 생선을 걷어내자
등대가 따라 옵니다
등대 밑에 어선
어선 밑에 갈매기
갈매기 밑에 바다
바다가 빨랫줄에 걸려
펄럭입니다

객지에서 온 내가
빨랫줄을 잡고
펄럭입니다

 

 

 

귀뚜라미 / 신미균

 

 

그날 나는 클립에 끼워 두었던
달을 꺼내 채 썰기 시작했어요
가느다랗게 국수발 모양으로
길게 길게 썰어야 하는데
들쭉 날쭉 제 멋대로 썰어지대요
하지만 별로 힘들지는 않았어요
겉으로 보기엔 깨끗해 보이지만
사실 자세히 보니 달도
오래 돼서 곰팡이가 피고
뒤쪽은 벌써 썩기 시작 했더라구요
나는 뜨거운 물에 소금 한 스푼을 넣고
얼른 데쳐냈어요
그럼 더 쫄깃쫄깃해 진다나요
올리브유를 조금 뿌리고 식초와 설탕으로
간을 했어요


그런대로 허기질 땐
먹을만 하더라구요

 

 

의자왕 / 신미균

 

 

금요일 오후 파고다 공원 십층 석탑 밑
정년퇴직한 의자왕이 돌 의자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파고드는 바람을
날짜 지난 신문으로 가리며
연신 굽신거리는 비둘기들의 호위를
그저 무심히 바라보고 있다
탑의 꼭대기가 서서히 왕의 어깨를 누르려고 한다
나당 연합군이 쳐들어온다 해도
눈도 꿈쩍 안 하던 왕이 어꺠를 움직여
햇빛 쪽으로 돌아앉는다
감기에 걸린 경순왕은 몇 번 뒤채더니 조용해졌고
소주에 찌들은 이성계는 벌써 길게 누워 버렸다
눈을 감고 있어도 자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서로는 알고 있다 며칠만 보이지 않아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안절부절 못하면서도 서로 통성명을 하거나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다
그저 적당히 떨어져 앉아
무심한 척 하는 것이
퇴직한 왕의 신분에 어울린다는 것을
이들은 알고 있다
담배꽁초를 주우러 다니는 연산군이 자리 때문에
멱살잡이를 하고 있다 저녁 때 까지는
구경거리가 생겼다 싶어 소리 나는 쪽으로 자리를
옮기려는데 경비아저씨가 나타나
싸움은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늙어가는 저녁도 쉬이 찾아오지는 않고
하루 종일 움직이지 않았던 뼈마디들이
옥신각신하며 삐져나가려고

진종일이 지난 것 같은데도
허리까지 밖에 안 올라 온 탑 그림자를 말아 내리며
오늘도 의자왕은 한 무리의 호위병들을 거느리고
서둘러 백제 여인숙으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밤낚시 / 신미균

 


소 한 마리가 끄는 수레 뒤로
해가 느릿느릿 끌려갑니다
나는 저수지 둑에 앉아
낚싯대 끝에 야광 찌를 달았습니다
저녁 안개가 내려와 축축해진 기억 속으로
공기 방울이 떠올라 뜬금 없이 터집니다
한참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어두워졌다고 내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저수지가 없어진 것도 아닙니다
그대가 없어진 것도 아닙니다
어두워질수록 야광 찌는 더욱 또렷해집니다
당신에 대한 내 생각도 더욱 또렷해집니다
어둠에 박힌 야광 찌와 그 야광 찌에 박힌
내 생각에 그대를 밤새도록 걸어둡니다
다리가 저려옵니다
잔챙이들이 휘적거리는지
잠깐씩 찌가 흔들립니다


이제 어둠이 한 꺼풀씩 옷을 벗으면
그대를 챙겨 이 저수지를
떠나렵니다
손에 잡힌 것은 아무 것도 없어도
당신과 함께 보낸 밤이
포근했습니다

 

 

웃는 나무 / 신미균

 

 

나무가 웃고 있다
자지러지게 웃고 있다
뒤로 넘어가면서 웃고 있다
징글징글하게 웃고 있다
웃다가 웃다가 허리가 끊어지려 한다

저러다 죽는 것은 아닐까

자세히 보니
새 한 마리
나무에 간지럼 태우고 있다

나무가 웃는다
바스러지게 웃는다
바삭바삭 부서진 유리조각처럼
빛을 반사하면서 웃는다
고개를 숙이고 웃는다
듬성 듬성 웃는다

자세히 보니
새가 떠나갔는데도
웃고있다

시집 < 웃는 나무> 2007년 서정시학

 

 

 

크래커 / 신미균

 

 

돌아오지 않는 엄마대신
크래커를 부순다
간간 짭짤한 크래커
별로 비싸지도 않는 크래커
밥대신 하루 종일 먹으라고
두고 간 크래커
부슬 때마다 바삭거리는 소리 때문에
자꾸만 부수던 크래커
손가락으로 부수다가
발가락으로 문대다가
온몸으로 뒹굴다보면
가루가 되는 크래커

검은 깨인줄 알고 함께 먹엇던
개미들

 

화살표 / 신미균

 


지하철 신도림역에 내리면
화살들이 정신 없이 쏟아진다


계단을 올라가라
옆으로 돌아가라
앞으로 가라
밑으로 내려가라
건너가라
곧장 가라
그 쪽으로 가지 마라
백화점은 여기다
돌지 마라
양말은 이게 좋다
치약은 저것이다
여기가 최고다
발밑을 조심해라


화살에 맞고도
그 많은 사람들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잘 가고 있다

 

 

 

연결 마법사 / 신미균

 


바다를 복사해 인터넷 창에 띄우고
기차를 끌어다 붙여넣기를 했다


바다 위로 기차가 달리고
파도가 꼬불꼬불 라면발이 되어 따라온다
허기진 마음에 무작정 그 기차를 탔다
물병자리 지나 전갈자리 지나
오리온자리의 말머리성운까지 가보는 거다
가다 심심해지면
연결 마법사를 불러
진작 술병 하나 들고 물병자리 옆으로
세상 떠난 그를 만나면 된다


그는 동영상으로 폴더에 잘 저장되어 있다
동영상 속의 그와 술 한 잔 한다
그 때나 지금이나 안주는
불어터진 라면이다
그는 술 한 잔을 단숨에 마시고는
잔을 머리 위로 올려 뒤집는다
술 한 방울이 눈물처럼 얼굴 위로
똑 떨어지면서
죽어도 살아 있는 그가
잔을 내민다
무심코 그를 잡으려다
아무 키나 눌러버렸다


기차와 바다와 그가 겹겹이
모니터 위로 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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