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각 시인 단시조 모음
적막/김원각
앞마당 늙은 밤나무 가을 법문 시작했네
한 마디 두 마디씩 낙엽의 침묵언어
농부는 일찍 잠들고
청중은 별과 나뿐
정리
방에 가득 쌓인 책들, 면 도서관에 기증한 날
밤바람에 솔잎 소리가 글을 읽기 시작하더니
그 뒤로
별, 구름, 벌레들이
책이 되어주었다
달팽이의 생각
다 같이 출발했는데 우리 둘밖에 안 보여
뒤에 가던 달팽이가 그 말을 받아 말했다
걱정 마 그것들 모두
지구 안에 있을 꺼야
눈사람
눈 온 날 밖에 나가 눈사람 한 분 세웠다
인간 세상 볼 것 없으니 눈은 달지 않겠다
그대로 하얗게 살다 고향으로 가거라
첫사랑 그리움
멀리 보내 그리움, 그대 맘에 닿지 못하고
그 언저리 맴돌다 와도 마냥 행복했는데
그리움
그도 늙었나
저만치 가다 돌아서네
불나방
<어영부영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버나드 쇼의 말이지만 그다음은 내 차롄가
아 그때 몸째로 그냥
들이받아야 했는데
아내의 화원
베란다 전체를 화초로 다 채우고
일 년 내 물 대주며 보살피느라 바쁜 아내
가꾸기 제일 힘든 나무가
남편이라며 웃는다
내 사랑은
꽃 피는 봄밤에도 낙엽지는 가을에도
그대에게 보내는 사랑 시 한 편 못 썼네
내 사랑 상처가 많아서
생각 끝이 아파서
소쩍새
달빛 아래 모여 앉은 서울서 온 친구들
몇 순배 술이 돌고 잠담으로 떠들썩한데
앞산에 소쩍새 울자
자리가 순간 고요해졌네
봄날은 간다
누운 내 발가락 끝에 나비 한 마리 앉더니
이내 실망한 듯 팔랑대며 뜨는 걸 보면
아직도 풀꽃 향기가
내 몸에 덜 배었나보다
공평한 하루
밤 깊자 아파트 불빛 하나둘 꺼져간다
특별한 재주 없어 세월만 보낸 나에게도
똑같이 문 닫는 하루
그것이 고마웠다
왕거미
처마 아래 줄을 치고 내려다보는 왕거미
줄을 끊으면 또 치고 끊으면 또 치는 꼴이
아 큰 놈
한 번은 걸리겠지
하며 나를 노리는 것 같다
중생
흙이 있으면 어디서든 잡초가 자라듯이
마음에 뿌리 박고 괴로움이 자라는 법
이렇게 알고 사니까
인생이 훨씬 잘 보인다
거울
눈알을 부라리면 그놈도 따라 부라리고
조용히 미소 지으면 그분도 따라 미소 짓는다
그놈이 그분이 될 때까지
거울이 필요하다
좋은 생각
아내의 경제 사정 무시할 수 없지만
유니세프에 월 삼만 원 기부금 내어볼까
이 생각
꽃이 피더니
나 혼자 봄날이다
종점
마지막 사람 내렸다, 늦은 밤 버스 종점
산비탈 무덤 하나 인생의 종점이다
출발은 떠들썩했으나
종점은 고요하다
남해 보리암에서
소원 따위는 없고, 빈 하늘에 부끄럽다
이 세상 누구에게도 그리움 되지 못한 몸
여기 와 무슨 기도냐
별 아래 그냥 취해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