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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문학장르/좋아하는 時調

김원각 시인 단시조 모음

by 광적 2020. 12. 25.

김원각 시인 단시조 모음

 

적막/김원각

 

앞마당 늙은 밤나무 가을 법문 시작했네

한 마디 두 마디씩 낙엽의 침묵언어

농부는 일찍 잠들고

청중은 별과 나뿐

 

정리

 

방에 가득 쌓인 책들, 면 도서관에 기증한 날

밤바람에 솔잎 소리가 글을 읽기 시작하더니

그 뒤로

별, 구름, 벌레들이

책이 되어주었다

 

 

달팽이의 생각

 

다 같이 출발했는데 우리 둘밖에 안 보여

뒤에 가던 달팽이가 그 말을 받아 말했다

걱정 마 그것들 모두

지구 안에 있을 꺼야

 

 

눈사람

 

눈 온 날 밖에 나가 눈사람 한 분 세웠다

인간 세상 볼 것 없으니 눈은 달지 않겠다

그대로 하얗게 살다 고향으로 가거라

 

 

첫사랑 그리움

 

멀리 보내 그리움, 그대 맘에 닿지 못하고

그 언저리 맴돌다 와도 마냥 행복했는데

그리움

그도 늙었나

저만치 가다 돌아서네

 

 

불나방

 

<어영부영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버나드 쇼의 말이지만 그다음은 내 차롄가

아 그때 몸째로 그냥

들이받아야 했는데

 

 

아내의 화원

 

베란다 전체를 화초로 다 채우고

일 년 내 물 대주며 보살피느라 바쁜 아내

가꾸기 제일 힘든 나무가

남편이라며 웃는다

 

 

내 사랑은

 

꽃 피는 봄밤에도 낙엽지는 가을에도

그대에게 보내는 사랑 시 한 편 못 썼네

내 사랑 상처가 많아서

생각 끝이 아파서

 

 

소쩍새

 

달빛 아래 모여 앉은 서울서 온 친구들

몇 순배 술이 돌고 잠담으로 떠들썩한데

앞산에 소쩍새 울자

자리가 순간 고요해졌네

 

 

봄날은 간다

 

누운 내 발가락 끝에 나비 한 마리 앉더니

이내 실망한 듯 팔랑대며 뜨는 걸 보면

아직도 풀꽃 향기가

내 몸에 덜 배었나보다

 

 

공평한 하루

 

밤 깊자 아파트 불빛 하나둘 꺼져간다

특별한 재주 없어 세월만 보낸 나에게도

똑같이 문 닫는 하루

그것이 고마웠다

 

 

왕거미

 

처마 아래 줄을 치고 내려다보는 왕거미

줄을 끊으면 또 치고 끊으면 또 치는 꼴이

아 큰 놈

한 번은 걸리겠지

하며 나를 노리는 것 같다

 

 

중생

 

흙이 있으면 어디서든 잡초가 자라듯이

마음에 뿌리 박고 괴로움이 자라는 법

이렇게 알고 사니까

인생이 훨씬 잘 보인다

 

 

거울

 

눈알을 부라리면 그놈도 따라 부라리고

조용히 미소 지으면 그분도 따라 미소 짓는다

그놈이 그분이 될 때까지

거울이 필요하다

 

 

좋은 생각

 

아내의 경제 사정 무시할 수 없지만

유니세프에 월 삼만 원 기부금 내어볼까

이 생각

꽃이 피더니

나 혼자 봄날이다

 

 

종점

 

마지막 사람 내렸다, 늦은 밤 버스 종점

산비탈 무덤 하나 인생의 종점이다

출발은 떠들썩했으나

종점은 고요하다

 

 

남해 보리암에서

 

소원 따위는 없고, 빈 하늘에 부끄럽다

이 세상 누구에게도 그리움 되지 못한 몸

여기 와 무슨 기도냐

별 아래 그냥 취해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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