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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문학장르/좋아하는 詩

꼬막 캐는 여자의 바다/최명란

by 광적 2021. 9. 5.

꼬막 캐는 여자의 바다/최명란



겨울이 되면 눈부신 벌교 갯벌에 가보아라
양수가 터진 바다가 갯벌에다 아이를 낳고 아랫배를 드러낸 채 섬
기슭으로 달려가 젖을 먹인다
풀어헤친 저고리 틈새로 빠져 나오다가 그만 수평선에 걸쳐진 바
다의 저 통통한 젖가슴을 빨고 있는 벌교 여자들
새색시 적부터 꼬막밭에 앉아 열심히 바다의 젖을 빠는
자궁에서도 평생 꼬막냄새가 나는 저 벌교의 여자들은
만삭이 된 섬들이 바다에 아이를 낳을 때마다 뻘배를 타고 힘차게
바다로 나아가 꼬막을 캔다
순천만 젖꽃판이 개흙처럼 검어지고 젖꼭지마다 팽팽히 섬을 이
룰 때
저마다 꼬막이 되어 갯벌 깊은 바닥에 몸을 숨긴다
행여나 장보고 같은 사내 갯벌 속에 숨어 있을지 몰라 갯벌의 쫄
깃쫄깃한 자궁이 되어 숨을 죽인다
때로는 허연 꼬막껍질처럼 길바닥에 버려져
사내들이 짓밟고 지나갈 때마다 서럽게 부서지고 아스러지던 날

방파제 끝까지 트랙터를 몰고 온 사내들이 수주병을 버리고 모닥
불로 타올라도 여자들은 좀처럼 물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뻘배를 끌고 산고가 채 끝나지 않은 갯벌의 속살을 쓰다듬을 뿐
참꼬막이 가득 담긴 함지박의 웃음이 될 뿐
광활한 치마폭을 펼친 바다는 지금 일몰의 시간
노을 지는 수평선을 목에 감고 뻘밭에 백로는 저 혼자 고독하다
멀리 고깃배 한 척 밀물 때를 기다리며 비스듬히 누워 있다
황금빛 갯벌의 주름진 뱃가죽을 들치며 바다의 젖을 빠는 저 여자

꼬막 캐는 여자들의 봄이 오는 바다
가끔은 장보고 같은 사내가 찾아와 씨 뿌리는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