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시, 나는 이렇게 쓴다. (공광규, 복효근)
세상에 숨길 수 없는 것 - 공광규
화단에 몰래 묻어두었던
심장 두 개
올 여름 튤립으로 솟아났다오
세상에 숨길 수 없는 한 가지
우리 사랑
세 편의 디카시 창작과정 사례
공광규
1. 「몸뻬바지 무늬」와 「수련잎 초등학생」
나의 졸작, 제1회 디카시 작품상을 받은 「몸뻬바지 무늬」는 남산 예장동에서 회의를 하고 충무로로 점심을 먹으러 내려오다가 국화분에 가득 담긴 소국을 발견하고, 꽃의 크기가 비슷하게 어떤 질서를 이루고 있는 듯해서, 스마트폰으로 위에서 정면으로 내려찍은 뒤 문자를 붙인 것이다. 사진과 문자 내용은 인터넷 연관검색을 하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편의 졸작, 2019년 6월 고2 전국연합학력평가에 문제지 지문으로 출제되어 디카시를 고등학교에 확산시키는 역할을 한 「수련잎 초등학생」은 대구 경북대 교정 연못을 벤치에서 내려다보다가 수련잎이 어떤 질서를 이루고 수면에 펼쳐있는 것 같아서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문자를 붙였다. 사진과 문자 역시 인터넷 연관검색을 하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세상에 숨길 수 없는 것」은 을지로1가 교차로 화단에서 찍은 사진에 문자를 붙인 것이다. 서울 중구 다동에서 명동으로 건너가는 을지로1가 교차로 건널목을 자주 왔다 갔다 한 것이 27년이 넘어 거의 28년이 되어간다. 교차로 화단에는 철마다 꽃이 피고 진다. 수선화도 피고 장미도 피고 금잔화도 피고 일일초도 피고 루드베키아도 핀다. 시간차를 두고 이른 봄에서 늦가을까지 꽃이 피도록 구청에서 관리한다.
2. 사진 찍기
올 여름 어느 날 명동으로 건너가다가 붉은 튤립 두 송이를 만났다. 나란히 서서 피어있었다. 색깔이 심장처럼 붉었다. 그것도 서로 가까이서 비슷한 크기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남녀를 발가벗겨 몸을 투시하는 붉은 색만 보는 기계로 보면 튤립을 닮은 심장 두 개만 보일 것이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문자를 덧붙였다.
이렇게 디카시의 시작은 사물이나 사건을 만나면서 시작된다. 땅에서 솟아오른 튤립을 만났을 때 맨 먼저 눈이 간 것은 붉은 색감이었다. 붉은 색감이 나를 강렬하게 유혹했다. 이렇게 저렇게 방향과 높이를 바꾸어가며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몇 년 전 국립중앙도서관과 고성에서 디카시를 강의할 때 사진을 어떻게 찍을까를 순서대로 정리한 적이 있다.
첫째, 일상에서 쉽게 만나는 것
둘째, 연출하지 말 것
셋째, 이야기가 있는 것
넷째, 피사체에 가까이 갈 것
이렇게 사진을 찍고, 사진을 보면서 이야기를 떠올리면 된다. 이미 사진을 찍기 전에, 사진이 이야기가 될 것인지 아닌지는 대개 직감으로 알게 된다. 물론 사진을 찍어두고 한 참 후에야 이야기가 생겨날 수도 있다. 찍어둔 사진도 뚫어지게 관찰할 일이다.
3. 문자 쓰기
사진을 보면서 문자로 옮기는 작업을 하면 된다. 문자는 공자가 논어에서 말한 흥관군원興觀群怨(감흥하고, 관찰하고, 사교하고, 풍자한다)의 원리를 활용하면 쉬울 것이다. 사물을 만났을 때 감흥을 해야 시가 시작된다. 감흥이 없으면 이미 사진을 찍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음에는 대상을 관찰하여 묘사하는 것이다.
관찰이 없다면 묘사도 없고 발견도 없을 것이다. 발견이 없는 글은 싱겁다. 질서가 있는 소국 꽃송이에서는 어머니의 몸뻬바지 무늬를 발견했고, 수련잎에서는 수업이 끝나서 재잘거리며 교문을 빠져나오는 초등학생들을 발견한 것이다. 붉은 튤립 두 송이에서는 심장 두 덩이를 발견한 것이다.
첫째, 쉽게 쓴다. 읽어가면서 뜻이 오도록
둘째, 간결하게 쓴다. 사진을 방해하지 않게 5행 내외로
셋째, 이해 가능한 비유적 문장으로 쓴다. 비유는 시가 되기 위한 요건이다.
넷째, 퇴고한다. 쉽고 매끄럽게
디카시 「세상에 숨길 수 없는 것」은 계간 《시와편견》 가을 호에 발표했다. 사랑은 끝까지 비밀이어야 한다. 사랑은 공유하는 게 아니다. 독점이다. 공개가 아니다. 사적이어야 하고 몰래해야 한다. 사랑은 배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은 감출 수 없다. 표정으로 튀어나온다. 밝고 환한 얼굴로 생동한다. 흙속에서 튀어 오른 붉은 튤립처럼.
공광규
서울 출생. 1986년 《동서문학》 등단. 시집 『담장을 허물다』 외.
고양행주문학상 외 수상. 제1회 디카詩작품상 수상.
닭싸움 - 복효근
싸움닭 두 마리가 목깃을 부풀리고 서로를 노려보는 풍경 저쪽
짝다리 짚고 지켜보는 사람들 있다
싸움으로 흥정하고 챙기는 사람들 있다
피 흘리는 한반도가 어른거렸다
사진 속에서 시를 꺼내다 - 복효근
디지털 카메라가 있기 전부터 사진을 찍어왔다. 기념사진도 찍고 아름다운 풍광이나 야생화 등도 찍었다. 그 시간을 기념하기 위해서 그리고 기록하기 위해서 찍었다. 기념이나 기록을 위한 사진 말고도 더러 사진을 찍었는데 가령 내가 본 풍경이나 사물이나 인물이나가 강렬한 울림을 주는 순간에 카메라를 꺼냈던 것 같다. 그 강렬한 울림이란 시를 쓰는 나에게 시적 모티프로 다가오는 순간이라고 해야 옳겠다. 아직 충분히 언어화되지 아니하였으나 대상에서 시적인 어떤 것을 발견할 때 그것을 붙잡아두려는 노력이 사진이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포착한 이미지로부터 생각과 느낌을 구체화시키고 상상력을 붙여나가면서 시를 완성하게 된다. 모든 시 쓰기가 그런 과정을 거친다는 얘기는 아니다. 물론 꼭 대상을 사진으로 붙잡아두고, 뒤에 거기에 담긴 시적요소를 추출하여 시로 썼던 것은 아니다. 사진 없이도 대상에서 시적인 발상을 얻고 시를 쓴다. 그럴 때마저도 마치 사진처럼 어떤 한 장면을 떠올리며 쓴 시가 많다. 굳이 사진을 찍은 것은 그 기억의 보존에 의미가 있었을 터이다. 사진으로 찍힌 대상은 기억 속에서 오랜 시간 언어적인 형상화 과정을 거쳐 사진 없이 언어만으로 된 시로 남는 것이다.
디지털 카메라가 보편화되면서 사진 찍는 일은 이제 특별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우리는 어떤 장면에서 시적 발상을 얻을 때마다 메모라는 방법으로 재빨리 생각과 느낌을 붙잡는다. 시적발상은 휘발성이 강하다. 이제 시적인 발상을 자극하는 장면에선 지체 없이 카메라를 꺼내게 되었다. 스마트폰 덕분이다. 과거 아날로그 카메라로 시적인 대상을 붙잡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 디카시가 나타났다. 시적인 순간이 사진에 담겨 있으면서 사진이 말해주지 않은 부분을 언어가 담당하고 사진과 언어가 하나로 묶여 묘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방식이다. 시적인 어떤 장면을 언어화하자면 묘사와 설명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사진과 언어의 병치만으로도 상징과 비유가 성립될 수 있고 사진이 객관적 상관물로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에 시가 장황해지지 않아도 된다. 언어표현만으로 이루어진 시 말고, 사진과 시가 하나로 엮인 디카시가 그만의 정체성을 가진 독자적인 양식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는 이유다.
본격적 시가 아니라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시인을 보았다. 시를 쓰기 위한 훈련과정으로 여기는 의견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디카시를 과도기적 현상으로 치부하려 하거나 기성 시의 아래에 두려는 층위적 혹은 우열의 사고에 머무는 동안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작품들이 이미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음을 목도하게 된다. 학교 현장에서 새로운 감각을 가진 아이들에게서 창의력을 끌어내는 데 매우 유효하다는 것을 실감한다. 직접 디카시 작업을 해보니 시각적 이미지도 분명 효율적인 시적 언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것이 언어표현과 적절하게 융합되었을 때 이들이 서로 만나지 않았을 때와는 전혀 다르고 새로운 아우라를 뿜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나도 아직은 그 개념과 창작법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이르진 못했다. 이는 내가 더욱 관심을 가지고 시도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동남아 어느 나라의 전통시장을 지나다가 우연히 닭싸움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 담뱃값 정도 될 만 한 돈을 걸고 닭에게 대리전을 치르게 하는 장면이다. 닭은 오직 싸우도록 길들여졌을 것이다. 문득 외세의 대리전을 치르고 있는 내 조국 한반도가 아프게 떠올랐다. 평소 갖고 있는 내 사회 역사인식이 객관적 상관물을 만난 것이다. 언어만으로 시를 쓰자 했으면 설명부분이 길어지거나 묘사가 장황해서 시적 긴장도가 느슨했을 수도 있다. 이미지를 통해 언어표현의 과감한 생략과 함축이 가능해졌다. 언어표현에서 생략되고 압축되고 함축된 부분을 이미지를 통해 읽어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복효근
남원 출생. 1991년 《시와시학》 등단, 시집 『꽃 아닌 것 없다』 외.
디카시집 『허수아비는 허수아비다』. 신석정문학상 외 수상.
(출처: 계간 디카시-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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