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짤랑교 / 이래춘
“정년퇴직은 생전에 치르는 장례식이다” 일본 소설 《끝난 사람》은 이렇게 시작된다. 정년퇴직하는 날, 주인공은 꽃다발과 선물을 받으며 회사가 내주는 고급 세단에 오른다. 차를 둘러싼 직원들의 마지막 인사가 마치 조문객이 영구차를 배웅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처럼 어떤 이에게는, 퇴직이 주는 심리적인 충격이 자신의 장례를 치르는 듯 치명적이다.
퇴직을 하면 많은 것이 사라진다. 월급, 월급날 아내의 미소, 사무실 책상, 인간관계 그리고 명함. 특히 명함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이 크다.
회사 다닐 때는 명함 한 장이면 충분했다. 손바닥보다 작은 네모난 종이가 나를 대신 설명해 주었다. 상대방이 내 명함에서 회사 이름과 직위를 확인하고 "아~" 짧은 감탄사를 내뱉는 상황을 은근히 즐겼다. 내가 이룬 업적을 과시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퇴직하고 명함이 사라지니 마치 나를 잃어버린 것 같다. "끝난 사람"이 된 기분이다. 처음 본 이가 내게 명함을 건네고 내 명함을 기다리는 눈치일 때가 난감하다.
사람을 피해 외출을 삼가니 아내와 부딪히는 경우가 늘어난다. 평상시에는 그냥 지나칠 단순한 말이나 행동의 실수가 어느 날은 위험한 뇌관이 되기도 한다. 모난 말 몇 마디에 서로의 마음이 상하면, 밀봉해 두었던 불만이 샤워기 물처럼 거세게 터져 나온다.
그날도 그랬다. 금연패치가 문제였다. 꾸준한 운동과 식이조절로 체중이 빠지면서 몸이 좋아졌다. 남산만 한 배불뚝이에서 날씬해진 배를 보면 퇴직 우울증이 폴폴 창문 밖으로 날아갔다. 금연하기로 맘을 먹었다. 살면서 여러 유혹이나 장애물을 만나 왔지만 가장 어려운 게 담배 끊기였다. 40년 지기 담배와 이별하기로 한 전날, 아내에게 금연할 텐데 "패치를 사 줄 수 없냐"고 물었다. 아내가 사주면 왠지 효과가 더 좋을 것 같았다. 남편의 어려운 결심을 반기며 금방 약국에 다녀올 줄 알았는데 아내는 정색을 했다. 날카로운 목소리로 "당신이 직접 사세요!" 하면서 안방으로 들어간 후 방문을 쾅 닫았다.
상황이 이해되질 않았다. 아무리 남편이 백수라 하더라도 만 원짜리 금연패치 사 달라고 하는 게 죽을죄를 지을 정도로 잘못한 일은 아닐 텐데. 다른 날이면 아내의 기분을 살펴서 대화로 문제를 풀었겠지만 그날은 알량한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짜증 나는 상황에서 그냥 벗어나고 싶어서 머언 남쪽으로 길을 나섰다.
계절은 생각보다 늘 앞서 온다. 포항 운하에는 벌써 봄이 잔잔하게 일렁이고 있는데 나 혼자 겨울 끄트막에 서 있다. 끼룩끼룩 날고 있는 하얀 갈매기. 나도 갈매기처럼 하늘을 막힘없이 날고 싶었다.
몇 년전 아내와 홋카이도를 여행할 때 오타루에 간 날 평생 보지 못한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마치 하얀 도화지 위에 운하가 지나간 물길만 한 줄로 그려져 있는 듯했다. 세상의 모든 시름과 아픔과 욕심이 하얀 눈에 덮였다. 오직 평화만이 가득했다. 그래서 포항 운하를 찾아왔는지도 모르겠다. 막힌 아내와의 물길, 그 물길을 여는 비법을 찾을 수 있지나 않을까 해서···.
포항 운하 둘레길을 며칠 동안 혼자 걷고 또 걸었다. 길가에 남천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 붉은 열매와 빨갛게 단풍 든 잎이 예쁘다고 아내는 남천을 좋아한다. 오타루도 다시 가고 싶다고 했었다. 시간이 갈수록 이상하게 아내 생각이 꿈틀거린다. 아내와 나 사이에 무엇이 문제일까.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보았다.
나는 매일 실적을 평가받는 영업 파트에서 일을 했다. 가족을 위해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내게 대화는 문제를 해결하고 성과를 만들어가기 위한 과정일 뿐이었다. 그래서 대화는 군말 없이, 신속하고, 정확하게 이루어져야 했다. 아내는 나와 이야기할 때 상사에게 보고하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부부 사이에서는 대화 그 자체가 목적이어야 하는데 아직 일할 때의 버릇을 다 버리지 못했나 보다.
부부간에도 의견이 다를 수 있고 때론 오해나 실수로 말다툼이 생길 수 있다. 말다툼을 말다툼으로만 대해야 하는데, 나는 마치 엘리트 검사라도 된 양 아내의 잘못과 흠집을 꼬치꼬치 찾아내서 매몰차게 따졌다. 곰곰이 생각하니 성격 급하고 자기 중심적인 나랑 살아준 아내가 고마운 사람이었다.
'탈랑교', '말랑교', '우짤랑교' 포항 운하 위에 놓인 보행자 전용 다리 이름이다. 아내와 함께하는 인생길을 계속 '타고 갈 건지', '말 건지', '어떻게 할 것인지' 마치 나에게 묻는 것 같다. 어찌 내가 선택할 것인가. 태워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인데, 승차거부만 안 한다면 인생 종점까지 같이 갈 일이다.
알고 보니 아내는 금연 '패치'를 비싼 '워치'로 잘못 들었다. 게다가 부하사원에게 하는 지시처럼 들려 버럭 화를 낸 것이었다. 내게서 자초지종을 듣고는 버선발로 금연패치를 사다 주었다. 역시 효과가 좋았다.
한 달 후면 금연 1주년이다.
[출처] 행복한 루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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