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詩作) 과정의 이론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은 어느 누구나 꼭 알아야 할 시작(詩作) 과정이 있다. 그러나 이 과정을 무시한다면 작품을 써 놓고도 여간 누구한테 보인다는 것이 영 마음에 내키지 않을 것이다. 왜야 하면 아무리 글을 잘 쓴다고 해도 여러 가지 조건이 맞지 않기 때문에 작품으로서 인정을 받지 못 할뿐더러, 여러 가지 제재(題材)의 선택이랄지, 띄어쓰기, 문장부호, 의미의 유사성 그리고 구상(構想)의 과정 등에 오류(誤謬)가 일어날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으로 이야길 할 다섯 가지 과정이 특히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 꼭 숙지해야 할 것들이다.
첫째 제재(製材)의 선택
둘째 제재(製材)의 이미지와 의미를 연상 <유사성(類似性)>하는 과정
셋째 시상(詩想) 구상(構想)의 과정(過程)
넷째 집필(執筆)과정
다섯째 퇴고(推敲)의 과정이 있다.
1. 제재(製材)의 선택
유사성을 찾기 위해 일상적 사물, 자연적 사물이 시(詩)속에서 어떠한 형식으로 새로운 의미 부여를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2. 제재(製材)의 이미지와 의미를 연상하는 과정
이를테면 동일한 제재를 취하더라도 시인마다 그것을 동일하게 표현하지는 않는다. 시인마다 나름대로의 심미안과 개성이 있고, 사물을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제재를 선택한 후 그것이 지닌 이미지와 의미를 연상하는 과정은 그 제재에 대한 자신만의 고유한 관점을 확립하고 이를 통하여 개성을 부여하기 위함이다.
3. 시상(詩想) 구상(構想)의 과정(過程)
즉, 영산홍 영산홍 꽃잎 산의 모습 슬픈 운명을 살아가는 소실 댁 소실 댁 툇마루 요강 배설물 소금 바다 갈매기 등으로 연상 유추-(서정주의 영산홍 일부)
4. 집필(執筆)과정
집필과정은 글쓴이 자신이 구상한 시상에 옷을 입히고 언어의 형상을 입히는 과정이다. 또한 자신이 선택한 제재, 제재의 이미지와 시상 전개가 가장 적합한 시어를 선택하고, 이에 알맞은 운율감 있는 언어와 비유적 언어를 선택하여 표현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5. 다섯째 퇴고(推敲)의 과정
퇴고에는 3가지 원칙이 있다
첨가(添加)의 원칙 : 미처 표현되지 못한 내용이나, 미진하게 표현되었을 경우 적절하게 첨가, 보충하는 과정.
삭제(削除)의 원칙 : 구두점, 단어, 문장 등을 빼어 버림으로써 구성의 긴밀성을 도모하는 과정.
재구성(再構成)의 원칙 : 주제를 보다 명료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문장이나 단락을 재구성하는 과정 또는 시(詩)의 생명(生命)을 압축된 언어를 통해 표현.
*. 시(詩) 창작 초보의 유의 사항
처음부터 지나친 과욕은 금물이다. 왜냐하면 한 편의 작품(시)을 통하여 자신이 표현하고자 한 바를 모두 한꺼
번에 담아내려는 욕심 때문에 오히려 좋은 작품을 만드는데 악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명심 또 명심하시길.
詩창작 실기에 대한 단상
1. 詩는 왜 쓰며 어떤 사람이 시인이 될 수 있는가,
공자는 논어 <위정편>에서 詩를 삼백수쯤 알게되면 한마디로 사악함이 없다고 했다 (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思無邪) 詩는 사람에게 모든 사물을 바로 보게 하며 또한 시로서 새나 짐승, 풀, 나무들의 이름도 많이 배우게 될 것이라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詩學>에서 詩가 인간의 감정을 "카타르시스"해준다고 하였다.
허균은 정신이 빼어나고 음향이 밝으며 격이 높고 생각함이 깊으면 가장 좋은 詩가 된다고 했다.
심덕잠은 詩란 사람의 천성과 정서를 조정하고 인간관계를 향상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익은 詩는 교
화(敎化)하는 것이니 힘써 그 뜻을 전달해야 한다고 했다.
이처럼 인간이 잃어버린 순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언어가 가지고 있는 순진성을 올곧게 되살려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물의 본질을 직시하는 것이며 시가 가지고 있는 타성의 길을 벗어나는 일이며 삶이 가지고 있
는 허위성을 깨트리는 일이다.
싸륵 싸륵 /설탕이 녹는다 / 그 정결한 투신 / 그 고독한 용해
아아 / 심야의 커피 / 암갈색 심연을 / 혼자 / 마신다
詩를 왜 쓰느냐란 질문을 자주 받는다. 이 詩가 그와 같은 회의나 해답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인
간의 생활이 무엇 때문에 사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사업이 무엇을 위해 성의를 바치는 것도 아니다. 그와 같
은 이유나 목적의 일반적인 것에 구속되는 일이 없이 성의를 집중하는 것에서 구체적인 삶의 보람과 생기가
살아나는 것이다. 굳이 詩가 무엇이며 왜 쓰느냐고 따지면 그것은 일상적인 언어의 저 편에서 불 가시적이며
구체적인 진실에 접하려는 노력이며 그와 같은 노력을 통해서만 우리는 싱싱하게 살아가는 인간 그 것과 그
것의 진실을 우리의 것으로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다.
빈 것의/ 빈 것으로 결집한/ 세계는 고드름 막대기로/ 꽂혀 있는 겨울 아침에/ 세계는 마른 가지로/ 타오
르는 겨울 아침에/ 허지만 세상은/ 빈 것이 있을 수 없다/ 당신의 서늘한 체념으로 채우지 않으면/ 신앙의 샘
물로 채운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나의 창조 의 손이/ 장미를 꽂는다/ 로오즈리스트에서/ 가장 매혹적일 조
세피즈, 블르느스를/ 투명한 유리컵/ 중심부에 빈 컵의 중심부에 창조의 손으로 장미를 꽃을 수 있는 자에게
세상은 한결같이 충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 한 창조적 작업도 '오늘 쓰다만 시는 오늘의 꽃봉오리 내일
피게될 꽃송이는 내일의 신의 플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박목월. 무상의 역정
2. 詩를 처음 쓸 때 지녀야할 마음가짐은 무엇인가,
누구나 詩를 쓸 수 있다. 詩란 詩적 재능이 있거나 또는 어떤 종류의 사람 즉 시인 만이 쓸 수 있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생각을 나타낸 글 가운데 산문이 아닌 운문의 형태로 된 것이면 모두가 詩이다 누구나 이런 형태의 글, 즉 詩를 쓸 수 있다.
문제는 詩에는 좋은 詩와 그렇지 못한 詩, 또는 잘된 詩와 그렇지 못한 詩가 있다. 곧 詩를 쓸 줄 모른다는 말은 잘된 詩를 쓸 줄 모른다는 말이다. 詩를 쓸 바에야 또는 써야 될 바에야 좋은 詩, 잘된 詩를 쓰고싶기는 누구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좋은 詩 잘된 詩를 쓰기는 어렵다. 일정한 습작기간을 거치지 않고는 좋은 詩를 쓸 수 없다. 詩를 쓰는 일, 詩를 창작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과 좋은 詩를 써야겠다는 욕망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곧 처음부터 좋은 詩를 써야겠다는 과욕이 좋은 詩를 쓰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다. 그런 과욕이 우리의 사고를 흐리게 하고 우리가 가진 무한한 재능을 잘못 낭비하게 한다.
시인이 詩를 쓰는 것은 좋은 詩를 쓰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기의 생각을 詩라는 형식의 글로 표현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좋은 詩가 되고 안 되고는 그런 행위의 결과일 뿐이다.
글로 표현하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다. 글로 표현하고 싶다는 욕망과 좋은 詩를 쓰고 싶다는 욕망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은 창조하는 즐거움과 창조된 결과를 탐하는 것과의 차이만큼이나 다른 것이다. 좋은 詩는 결과에 욕심을 두지 않는, 아는 체 하거나 흉내 내지 않는, 거짓 없이 쓴 글에서 나온다.
3. 詩의 착상은 어떻게 하는가,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일까, 묵중하게 서 있었다. 다음날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귀에 그들은 떼를 지어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에서 온양으로 우회하는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는 문을 지키는 파수병일까, 외로와 보였다.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한 그들의, 침울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 박목월. 나무
매우 산문적이고 일상적인 어투로 쓰여진 이 詩는 시상을 착상한 후 그 詩가 점점 한편의 완성된 서정시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눈에 보듯 선연하게 보여주고 있어 인상적이다.
이 시상의 계기는 산문에 대한 시인의 관찰력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그 관찰은 지나치게 예리하거나 논리적인 고찰보다는 시인이 사물을 보는 선한 태도에서 비롯한다. 나무를 바라보다가 문득 추울 것이라 느낀다. 시인의 이러한 자연과의 교감은 이내 발전하여 나무를 늙은 수도승과 어설픈 과객과 동일시하게 되며 지상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서 있는 나무의 모습에서 인간 존재의 초월성을 읽어낸다. '하늘 문을 지키는 파수병'이 그것이다. '아아 고독한 모습' 이라는 매우 진부한 표현도 이러한 詩적 계시의 순간을 통과하면 갑자기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원래 에피파니는 동방의 세 박사의 베들레헴 내방을 상징하는 예수의 공헌을 뜻하며, 비유적으로는 어떤 사물이나 본질에 대한 뜩박의 통찰이나 발전을 뜻하는 말로 사용된다.
위의 詩에서 시인은 나와 나무의 일체감을 '놀랍게도' 라고 말한다. 그 놀라운 일체감이 바로 詩정신이 아닐까, '묵중한 그들의, 침울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이 詩적 화자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려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 나무' 곧 그의 인격이 된 것이다. 이처럼 詩의 소재와 에피파니의 순간은 우리 주변 도처에 널려있다.
4. 詩 쓸 때, 불현듯 떠오르는 詩적 영감은 어떻게 詩화할 것인가,
나는 서정을 느낄 때 뜻 모를 선율의 부딪힘을 깨닫는다. 나의 경험으로 그것은 거의 완전 투명한 선율, 그것의 순도를 가지는 것이다. 때로는 몇 주일, 몇 달 흥얼거리는 상태가 지속되지만 완강하게 언어의 의상을 거부하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순수한 가락으로서 모든 감정을 애절한 흥얼거림으로 순화시키고 투명하게 용해시켜 그 흥얼거림이 언어를 용납해 주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진종일 흥얼거릴 뿐이다. 허지만 이와 같은 상태가 시일이 흐름에 따라, 약화되고 처지기 시작하게 된다. 그 무렵에 이르러 그것은 이미지를 환기시키고 세계의 사상과 융합되며 시적 표현의 불순물, 즉 언어를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언어의 건반 위에서 멜로디를 육화할 수 있는 심적 안정과 침착성을 얻게되고, 뜻모를 것으로 소멸하게 되고 또 다를 성질의 선율이나를 사로잡게 되는 것이다.
山은 九江山/ 보라빛 石山/ 山桃化/두어 송이/ 송이 버는데/봄눈 녹아 흐르는/ 옥 같은/ 물에/ 사슴은/ 암사
슴/ 발을/ 씻는다.
-박목월. -산도화
당시에 쓴 작품, 이것이 7.5조를 바탕에 깔고 있음을 제작 당시에는 의식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문제는 이점이다. 내게 있어 '뜻모를 선율' 은 그것이 수그러지는 일종의 여운 적인 상태에서 시적 형상을 입게되고 선율 자체에 의존하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수그러진 상태라는 것은 공간적 확대를 의미하며 그러므로 한결 객관적 침착성이나 냉정성을 지킬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5. 詩의 언어는 일상어와 다른 것인가,
시는 일차적으로 관념적, 추상적, 직설적 진술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 내 마음은 슬프다 --- 이 문장은 시적 진술이 될 수 없다.
즉, 시적 화자가 주관적으로 체험한 특별한 감정반응을 표현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예)내 마음은 <벌레 먹은>능금이다
이처럼 시는 시인 자신에게 환기된 독특한 감정 이입이 형상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언어의 사용에 있어서 정보소통을 중심으로 한 인식적기능을 떠나서 별도의 미적기능을 말하기란 어렵다.그렇지만 미적인 것의 영역이 매우 넓어서 그것이 어떻다고 한마디로 정의 하기란 어렵다.
한 예를 들기로 하자.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 저기
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가득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황동규. 조그만 사랑노래
매우 쉽게 쓰여진 이 詩에는 '어제, 편지, 그대, 길, 어린 날, 사랑, 저녁하늘 몇 송이 눈' 등의 詩어가 사용된 다. 이들 언어들은 우리가 통상 사용하는 일상용어인 동시에 어감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여 詩에 자주 동원하는어휘들이다. 이 詩는 '조그만 사랑노래'라는 제목에 걸맞게 그다지 논리적일 필요도 없고 또 뭔가 철저히 일상생활에 가까워야 한다는 강박관념과도 거리를 둔, 평범한 어휘들로 구성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이 詩는 詩에 대한 잘못된 관념들 즉 뭔가 현학적이어야 한다던가 대단한 메시지를 담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반성하게 하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詩의 인식적 측면은 무시할 수 없다. '얼굴을 가리고 박혀있는 돌'들과 '눈뜨고 떠다니는 몇 송이 눈' 이 환기하는 불안과 불온의 심리적 배경이 그것이다.
남쪽에선 과수원 입김이 익는 냄새/ 서쪽에선 노을이 타는 내음.../산 위에 마른풀의 향기/ 들 가엔 장미들이 시드는 향기.../ 내게는 눈물과 같은 술의 향기/ 모든 육체는 가고 말아도/ 풍성한 향기의 이름으로 남는/ 상하고 아름다운 것들이어...
-김현승. 가을향기
1,2연에서 가을 향기를 맡는다. 과수원의 사과 마른풀과 장미 등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4연에 이르러서는 생명의 소멸이라든가, 인간의 이별에 대해 좀더 높은 질서를 부여한다. 죽어 없어져도 거기에는 '풍성한 향기'가 남으며 상하였지만 아름답다는 것, 그리하여 '높고 깊은 하늘'이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쯤이면 앞에 둔 황동규의 시도 그저 단순한 서정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몇 마디 시어에도 이처럼 인식적 기능과 미적 기능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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