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관심있는 것들/문학의 갈피

좋은 詩란 무엇인가

by 광적 2008. 5. 9.

좋은 詩란 무엇인가 / 이은봉 시인

 

 

1. 여는 글

나는 시를 읽고, 쓰고, 고르고, 가르치는 것이 직업인 사람이다. 시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지는 않지만 시를 매개로 해서 먹고사는 사람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행인지 불행인지는 잘 모르겠다. 일 자체가 크게 싫거나 질리지 않는 것을 보면 그런 대로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형편이 이러하니 좋은 시를 읽고, 쓰고, 고르고, 가르치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 물론 이들 일에 내가 크게 게으른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떤 시가 좋은 시이냐고 누가 물으면 갑자기 막막해지기 일쑤이다. 무엇이 좋은 시를 만드는 보편적인 조건인지 아직도 나는 잘 모르겠다.

좋은 시란 무엇인가. 더러는 그 기준이 명확히 떠오를 때도 있다. 확실한 깨달음으로 그것이 내 안에 자리잡고 있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 기준이 언제나 변함없이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무언가 또 다른 기준을 찾아 내 마음이 자꾸 발걸음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나는 지금 '좋은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확실하게 대답할 자신이 없다. 뭐라고 대답을 한다면 그것은 단지 한시적인 대답일 따름이다. 삶의 현실이 변하면 시의 현실도 변하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내게는 좋은 시에 대한 기준이 확실하게 고정되어 있지 않다.

오늘의 내 얘기는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을 중언부언하는 정도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이른바 '좋은 시'에 대한 사사로운 내 생각을 두서없이 지껄여대는 정도에서 그칠 수도 있다.

따져보면 객관적인 기준을 세워 '좋은 시'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그 자체로 불가능한 일일는지도 모른다. '좋은'이라는 수식어 자체가 기본적으로 감정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기서 내가 '좋은 시'가 아니라 '좋아하는 시'에 대해 이런저런 군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차라리 나는 이 글이 말 그대로 '좋아하는 시'에 대한 부질없고 시시한 군말이 되었으면 좋겠다.

2. 활기 있는 언어

시의 질료가 언어라는 것은 새삼스럽게 강조할 바가 못된다.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는 시는 있을 수 없다. 물론 그림이나 만화, 기타 사진 등을 곁들여 언어로 다 드러낼 수 없는 부분을 채워 넣을 수는 있다. 시가 그림과 결합되는 예는 조선조의 문인화라든지 시화 등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근래에 들어서는 황지우, 신현림, 이승하 등이 만화나 사진 등을 빌려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부분을 보충해온 바 있다. 이처럼 예외적인 경우가 없지 않지만 언어 바깥으로 튀어나가 버리면 어떤 무엇도 시가 되기 어렵다.

장르로서 시를 잘 의식하고 있고, 또 언어를 질료로 하고 있다고 해서 모두 좋은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셀 수 없이 많은 문예지에 실려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시들이 이런 사실을 잘 증명해 준다. 차마 시라고 하기조차 힘들 정도의 언어뭉치로 뒤덮여 있는 것이 오늘의 문예지들이 안고 있는 현실이다. 그렇다. 오늘의 문예지에서 심미적으로 잘 정제된 언어를 담고 있는 작품을 찾기는 힘들다.

말이 제대로 닦여져 있지 않고 좋은 시가 되기는 불가능하다. 아무런 운산 없이 제멋대로 토해지는 언어뭉치가 감동을 주기는 어렵다. 언어운용에 대한 시인 자신의 섬세한 운산(運算)이 없는 시를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섬세하고 세밀한 정서를 담아낼 수 있도록 오랫동안 언어를 갈고 닦아온 시인만이 감동을 주는 좋은 시를 쓸 수 있다.

언어를 갈고 닦는 것은 언어에 활기를 불어넣는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언어의 결이 오롯이 살아 있는 시, 그로부터 발생하는 정서의 촉기(燭氣)가 치열하게 운동하고 있는 시를 나는 좋아한다. 리듬과 어조 하나 하나에까지 섬세하게 운산되어 있으면서도 언어의 결이 활달하게 트여 있는 시를 읽을 때 가슴이 활짝 열린다.

살아 있는 언어를 담고 있는 시는 개별 시어에 갇히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런 일상의 문장을 뛰어넘는 독특하고 활기 있는 기세(氣勢)를 보여준다. 활기 있는 기세를 보여주는 시는 주제나 의미 따위에 갇히지 않는다. 이런 시는 이미 그 자체로 말 자체의 참신한 아름다움에 봉사한다.

한 마디로 말해 나는 물여울의 피라미처럼 꼬리를 치며 튀어 오르는 기세를 갖는 시를 좋아한다. 이런 시는 화장을 하지 않은 맨 얼굴의 미인 같은 신선한 감각을 준다. 순식간에 독자들의 영혼을 사로잡는 특징을 갖고 있는 것이 이런 시이다. 깊이 있는 내공의 염력을 갖고 있는 이런 시는 읽을수록 울렁이는 영성(靈性)을 자각하게 한다.

영성의 자각은 시의 언어들이 내뿜는 기(氣)로부터 비롯된다. 이런 시는 기(氣)를 중심으로 하되 충분히 이(理)를 받아들인다. 아니 그보다는 기(氣)에서 이(理)로, 이(理)에서 기(氣)로 순환하는 활발한 운동성을 갖고 있다. 일의적(一義的)으로 규정할 수 없는 현란한 운세(運勢)를 지니고 있는 것이 이런 종류의 시이다.

2. 단단한 구조

낭만주의 이후 많은 사람들이 시를 일종의 유기체로 파악하고 있다. 시 역시 살아 있는 구조를 갖는 생명의 조직이라는 뜻이다. 시에서 생명의 조직을 만드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깨어 있는 언어이다.

깨어 있는 언어가 옳고 바르게 사용되지 못한 시는 생명을 갖지 못한다. 언어들이 활기 있게 운동할 때 시는 비로소 생명을 갖는다. 생명을 갖는 시는 리듬과 가락이 팽팽한 결을 만들며 활동하기 마련이다. 리듬과 가락이 만드는 運氣를 꺾고, 젖히고, 밀고, 당기고, 끊고, 맺는 가운데 씌어지는 시가 생명을 갖는다.

시의 조직은 리듬과 가락이 활발하게 살아 있을 때 완성된다. 운동하는 리듬과 가락을 꺾고, 젖히고, 밀고, 당기고, 끊고 맺는 가운데 시의 조직은 완성된다. 시의 조직은 그 자질들이 치열한 기세로 운동을 할 때 신선하고 상쾌한 감동을 만든다. 이런 시가 구조적으로 완미한 형상에 이르리라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구조적으로 완미하게 마무리가 되어 있는 시는 장작개비로 뒤통수를 맞는 듯한 충격을 준다. 이런 시는 후딱 한번 읽었을 때부터 다리가 후둘후둘 떨리도록 감동을 체험케 한다. 한꺼번에 심장이 멈추는 듯한 충격을 주는 것이 이런 시이다. 몸 전체로 오르가슴을 느끼게 하는 시, 내가 '좋아하는 시'는 바로 이런 시이다. 단숨에 읽혀 가슴을 치도록 하면서도 두고두고 다시 읽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시를 나는 좋아하는 셈이다. 이런 시를 읽으면 한동안 가슴이 둥그렇게 부풀어오르다가 팍, 하고 터지는 듯한 느낌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시를 읽기란 쉽지 않다. 너무 많이 시를 읽어 신경이 예민해진 탓도 없지 않으리라.

문제는 이런 시에 절대적인 가치기준이 없다는 점이다. 물론 형식적으로 완미한 시, 구조적으로 잘 통일되어 있는 시, 섬세하게 대칭적 구조를 갖는 시가 이런 시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형식적 특징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매 편의 시는 매 편의 자기 형식을 갖기 마련이다. 시 쓰기가 어려운 것도 매 편의 시가 갖는 이런 형식적 특징에서 발생한다. 좋은 시는 그 자체로 정밀하게 다듬어진 대리석 조각 같은, 예쁘게 구어진 항아리 같은 형식미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단지 형식미만으로는 장작개비로 뒤통수를 맞고 철썩 주저앉는 것과 같은 감동을 체험하지 못한다.

정말 좋은 시는 지속적으로 매력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파격, 어떤 흠집을 지니고 있다. 흠집이 애간장을 녹이는 매력으로 튀어 오르는 시를 나는 좋아한다. 이를 가리켜 흔히 말하는 '청자 연적'의 파격이라고 불러도 좋다. 미완성되어 있으면서도 완성되어 있는 시, 부족하면서도 넘치는 시, 비어 있으면서도 가득 차 있는 시가 그런 시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좋은 시가 다 압축과 응축의 형식을 갖는 것은 아니다. 시인이 의도하는 초점을 향해 수렴되고 집합되는 시만이 좋은 시는 아니다. 특별한 초점이 없이 부연되고 나열되는 형식을 갖고 있더라도 얼마든지 좋은 시가 될 수 있다. 말들을 통일시키는 시만이 아니라 말들을 풀어헤치는 시도 살을 저미는 것 같은 감동을 주는 경우가 적잖다. 統辭體의 시만이 아니라 解辭體의 시도 충분히 좋은 시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시는 열린 구조를 갖고 있다. 하지만 무작정 열려 있지만은 않다. 열려 있으면서도 닫혀 있는 것이 이런 시이다. 초점을 향해 수렴되고 집합되는 압축과 응축의 시들의 경우에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정작의 압축과 응축의 시는 폐쇄되어 있으면서도 개방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단정할 수 없는 구조적 특징을 갖고 있는 것이 좋은 시가 갖고 있는 형식적 특징이다.

3. 충만한 문제의식

좋은 시는 역사의 한복판을 꿰뚫는 화살의 내포를 갖고 있다. 이를 가리켜 단숨에 역사적 현재를 담아내는 시라고 해도 좋다. 역사적 현재라고 할 때 그것은 구체적으로 자본주의적 근대로서 오늘의 현실을 가리킨다. 그렇다. 오늘의 현실을 향해 수렴되고 집합되고 있는 어제와 내일을 하나로 꿰뚫는 화살로서의 시, 이런 시를 나는 좋아한다.

이런 시는 충만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다. 나날의 역사를 앞당기기 위한 깊은 고뇌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 이런 시이다. 이런 시를 가리켜 시간과 공간이 교차하는, 역사와 사회가 교차하는 순간의 크로노토프를 담고 있는 시라고 불러도 좋다. 이 때의 순간은 언제나 내일의 유토피아를 향해 열려 있기 마련이다. 내일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어제의 파라다이스를 향해 열려 있다고 해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이런 시를 투쟁의 시나 저항의 시로 이해할 필요까지는 없다. 과도하게 투쟁적이거나 저항적인 작품은 시를 시 이전의 언어뭉치로 돌려놓기 십상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근대로서 오늘의 문제를 확실하게 통과하고 있는 의지 정도를 담고 있으면 족하다. 이런 뜻에서의 좋은 시에는 언제나 지금 이곳의 현실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현실이 담겨 있다는 것은 나날의 생활이 담겨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생활의 주체는 물론 사람이다. 이 때의 사람이 구체적인 생활을 꾸려 나가는 일상의 현존재라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이렇게 생존해 나가는 삶의 주체들을 구태여 서민이라거나 민중이라고까지 명명할 필요까지는 없다. 나로서는 이들 삶의 주체들이 되도록 해학과 연민의 대상으로 포섭되기를 바란다. 누군들, 어떤 계급의 삶의 주체인들 해학과 연민의 대상이 되지 않으랴.

가능하다면 나는 시 속에 그려지는 생활이 계급의 중심을 좀더 아래로 이행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꿈꾼다. 적어도 시에 그런 의지나 고뇌가 담겨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럴 때 과거와 미래가 현재로 수렴되는 역사와 사회의 한 순간을 꿰뚫는 충격을 담는 시로 존재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좋은 시는 사람의 형상을 그려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자연도 사람 속에 어울려 참여할 때 좋은 시는 더욱 빛난다. 언제나 자연의 문제와 뒤얽혀 있는 것이 사람의 문제이다. 여기서 뒤얽혀 있다는 것은 사람과 자연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상호 순환하는 관계라는 것을 뜻한다. 적어도 나는 지금의 단계에서는 자연과 사람의 관계를 상호 순환하는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 실천하는 것이 역사를 진전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결국 인간과 자연이 서로 공존하는 시를 좋아한다는 뜻이 된다. 겉과 속이 상호 순환하는 관계를 갖는 시를 좋아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이런 시는 어디가 속이고 어디가 겉인지 잘 분간되지 않는다. 현상과 본질이 언제나 서로 뒤얽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고도로 세련된 아이러니의 시, 능청과 내숭의 시가 갖고 있는 의미의 이중성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런 시는 무엇이 표면적 의미이고 무엇이 내면적 의미인지 쉽게 가늠되지 않는다.

이런 모호성은 정작의 시적 형상이 구체적이면서도 추상적이고, 추상적이면서도 구체적인 데서 비롯된다. 그러니까 시 속에 추상과 구상이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대개의 이런 시는 풍경이 겹쳐져 드러난다. 하나의 장면을 걷어내면 또 하나의 장면이 나오는 시, 양파껍질처럼 거듭해서 장면을 벗겨낼 수 있는 시가 이런 시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장면이 겹쳐 짜여져 있는 시를 좋아하는 셈이다. 물론 각각의 장면을 이루는 중심은 정신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고, 자연일 수도 있다.

4. 닫는 글

지금까지 '좋은 시' 혹은 '좋아하는 시'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인 내 생각을 중언부언 떠들어 왔다. 실제로는 '좋은 시'나 '좋아하는 시'가 아니라 '쓰고 싶은 시'에 대한 이런저런 사변을 무질서하게 토로해온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지금 내가 매번 이런 뜻에서의 '좋은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객관적으로 '좋은 시'라기보다는 주관적으로 '좋아하는 시'에 대한 내 생각을 몇 토막 언급해 본 것일 따름이다.

이른바 등단이라는 것을 하고 시인으로 행세를 해온 지도 벌써 20년이 넘었다. 등단을 한 이후 줄곧 나는 시에 목을 매고 살아왔다. 그동안 나는 단 하루도 '좋은 시'를 써야 한다는 자기다짐을 버린 적이 없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이 말에 대해 확신을 할 수 있다. 내가 좋은 시를 쓰기 위해 좋은 시가 갖는 특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뇌하고 고민해온 것은 사실이다.

물론 내가 써온 시는 아직 크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독자들이 내가 써온 시의 코드를 미처 충분히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크게 섭섭해하지는 않는다. 나날의 삶이 만드는 이런저런 국면에 대해 언제나 내가 시를 통해 온몸으로 대응해왔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일이지 않은가.

좋은 시를 말하는 데 그것이 지니고 있는 방법적 장치를 도외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좀더 중요한 것은 다양한 시적 국면과 마주하는 시인 자신의 진정성이다. 여기서 진정성을 강조하는 까닭은 비교적 단순하다.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시인 지신의 진정성이 없이는 어떤 시도 제대로 된 감동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매 편의 시에 시인 자신의 온몸이 실리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온몸을 던지지 않은 시가 독자들의 영혼을 사로잡을 리는 만무하다. 진정한 마음이 무르녹아 있을 때 시는 저 스스로 독자의 심장을 꿰뚫는 화살이 된다. 심장에 꽂혀 있는 화살을 타고 줄줄 피가 흘러나올 때의 흥분을 상상해 보라.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보면 어차피 시는 허구의 세계를 함축하기 마련이다.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그럴듯한 상상력을 펼쳐내는 것이, 곧 거짓 세계를 꾸며내는 것이 시의 언어용법이다. 이런 언어용법이 깨어 있는 진실로 되살아나는 과정에 작용하는 것이 시의 진정성이다. 그렇다.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의 토로 없이는 좋은 시가 되기 어렵다.

시에 투사되어 있는 진정성은 거칠 것 없는 대자유의 세계를 꿈꾼다. 활기 있고 탄력 있는 運氣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 시의 진정성이다. 솟구쳐 오르는 순간의 염력이 창출하는 시의 언어들만이 저 스스로 완미한 자기형식을 갖추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이런 시는 이미 자본주의적 근대의 제반 문제의식을 하나의 화살로 꿰뚫는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이렇게 해서 태어나는, 어딘가 좀 흠집 있으면서도 튼실한 자기형식을 갖는 시를 좋아한다. 차돌처럼 단단하고 딱딱하면서도 인절미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시가 이런 시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시는 이처럼 항상 역설적 자기모순을 끌어안고 있다.({충북작가}, 2003. 12.)

'관심있는 것들 > 문학의 갈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는 상상력으로 쓴다  (0) 2008.05.09
좋은 시의 조건  (0) 2008.05.09
낮설게 하기의 아름다움  (0) 2008.05.09
시적 상상력을 구사하는 7 가지 방법  (0) 2008.05.09
시작 과정의 이론  (0) 2008.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