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 설 / 박경리
섣달 그믐날 어제도 그러했지만
오늘 정월 초하루 아침에도
회촌 골짜기는 너무 조용하다
까치는 모두 어디로 갔는지
흔적이 없다
푸짐한 설음식 냄새 따라
아랫마을로 출타 중인가
차례를 지내거나 고사를 하고 나면
터줏대감인지 거릿귀신인지
여하튼 그들을 대접하기 위해
음식을 골고루 채판에 담아서
마당이나 담장 위에 내놓던
풍습을 보며 나는 자랐다
까치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음식 내놓을 마당도 없는 아파트천지
문이란 문은 굳게 닫아놨고
어디서 뭘 얻어먹겠다고
까치설이 아직 있기나 한가
산야와 논두렁 밭두렁 거리마다
빈병 쇠붙이 하나 종이 한조각
찾아볼 수 없었고
어쩌다가 곡식 한알갱이 떨어져 있으면
그것은 새들의 차지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목이 매이게 척박했던시절
그래도 나누어 먹고 살았는데
음식이 썩어나고
음식 쓰레기가 연간 수천억이라지만
비닐에 꽁꽁 싸이고 또 땅에 묻히고
배고픈 새들 짐승들
그림의 떡, 그림의 떡이라
아아 풍요로움의 비정함이여
정월 초하루
회촌 골짜기는 너무 조용하다
어머니 / 박경리 어머니 생전에 불효막심했던 나는 사별 후 삼십여 년 꿈속에서 어머니를 찾아 헤매었다 고향 옛집을 찾아가기도 하고 서울 살았을 때의 동네를 찾아가기도 하고 피난 가서 하룻밤을 묵었던 관악산 절간을 찾아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전혀 알지 못할 곳을 애타게 찾아 헤매기도 했다 언제나 그 꿈길은 황량하고 삭막하고 아득했다 그러나 한 번도 어머니를 만난 적이 없다 꿈에서 깨면 아아 어머니는 돌아가셨지 그 사실이 얼마나 절실한지 마치 생살이 찢겨나가는 듯했다 불효막심했던 나의 회한 불효막심의 형벌로써 이렇게 나를 사로잡아 놓아주지도 않고 꿈을 꾸게 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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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의 그 집 / 박경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꾹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현대문학 2008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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