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그리움'의 시인이다. 이번 시집 {독작}에 수록된 대부분의 시편이 사랑의 상처, 슬픔, 고통, 외로움, 기다림 등의 애조를 띠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게 말해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에게는 그러한 슬픔과 분노가 내장하고 있는 情熱이 시인으로 하여금 '죽음'을 껴안고 구도의 길을 나서게 하는 힘으로 나타난다는 점에 보다 진정한 시적 의미가 놓여 있는 것으로 보였다.
Ⅰ.
어느덧 봄이 왔다. 집 근처 양지바른 쪽의 동백은 이미 핏빛 그리움을 몇 송이씩 피워 올렸고 산수유는 며칠 사이에 깜짝 노란색으로 물들었다. 소쇄원의 매화도 진한 향기를 뿜어 행인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있었다. 이제 조금 더 있으면 벚꽃 분분히 날리는 애잔한 눈부심에 눈 가늘어지고, 아카시아 향기에 취한 봄밤의 뻐꾸기 소리에 몸을 뒤척이게도 될 터이다.
박시교 시인은 '그리움'의 시인이다. 이번 시집 {독작}에 수록된 대부분의 시편이 사랑의 상처, 슬픔, 고통, 외로움, 기다림 등의 애조를 띠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게 말해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에게는 그러한 슬픔과 분노가 내장하고 있는 情熱이 시인으로 하여금 '죽음'을 껴안고 구도의 길을 나서게 하는 힘으로 나타난다는 점에 보다 진정한 시적 의미가 놓여 있는 것으로 보였다. 다음 시편은 그러한 경지의 하나를 잘 보여주고 있다.
공초空超 묘 옆에서 아내와 쑥을 캔다
햇살이 미풍에 흔들리는 사월 한낮
산벚꽃 하르르 하르르 지는 소리 들으며
저렇듯 옆에서는 한 세월이 무너지는데
둘만의 향기로운 저녁 식탁을 위해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봄을 캐 담는다 ([쑥을 캐며] 전문)
시집 {獨酌}의 시편들 중 내 마음에 오래도록 남았던 작품의 하나가 바로 위의 시 [쑥을 캐며]이다. 시집의 뒷부분 은밀한 곳(총 50편 중 42번째 수록)에 놓여 있는 이 작품이 유독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따스한 평화로움의 느낌...그리고 그 뒷면에 놓인 삶과 죽음의 連脈, 그 존재론적 통찰을 가능케 하는 힘 때문이 아니었을까? 삶과 죽음이 별개가 아닌 하나의 전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 자체가 시인의 삶을 구원하고 있는 모습을 이 작품이 그려 보인 때문이 아니었을까?
쑥내음, 따스한 햇살, 그리고 봄바람, 그러한 양지바른 묘 옆에서 쑥을 캐고 있는 시인 부부. 이 모든 情景을 시인은 "햇살이 미풍에 흔들리는 사월 한낮", "산벚꽃 하르르 하르르 지는 소리 들으며" "空超 묘 옆에서 아내와 쑥을 캔다"라고 표현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선, 시인이 그의 아내와 함께 쑥을 캐고 있는 곳, 그 '장소'에 주목해 보기로 하자.
우리는 누구나 시간과 공간의 좌표 위에서 삶을 엮어가고 있지만 문득 어떤 곳에 멈춰서게 되는 순간이 있다. 강렬한 존재감에 한걸음도 떼기 싫은, 자신의 모순과 분열의 흔적들마저 모두 일순간 초월케 하는 그러한 때와 장소도 있을 것인데, 시인에게 '따스한 햇살의 묏등'은 그러한 시공이 會通하는 場所가 아니었을까?
위의 짐작을 뒷받침하듯이, 시 [쑥을 캐며]에서는 자연과 인간의 어울림이 여러 감각들의 교류를 통해 하나의 照應적 空間 속에서 형상화되어 있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 일상[俗]과 성스러움[聖]이 통하는 하나의 제의이자 축제, 감각의 향연場이기도 하다.
"햇살이 미풍에 흔들리는 사월 한낮"에서는 시각과 촉각의 조화가 잘 표현되어 있는데, 눈부신 햇살과 그 아래 존재들의 조용한 움직임이 '봄날 아지랑이'에 안긴 듯("산다는 것 모두가 이 봄날 아지랑이 같아" [봄에게]) 흔들리고 있고(視覺), 사월 한낮 따사로운 봄햇살과 미풍의 신선함(觸覺)이 그것이다. 여기에서는 그러한 작은 흔들림과 촉감 속에, 들고 나는 呼吸, 자연과 시인의 고요한 숨소리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한 호흡의 조화에서 차가움과 뜨거움은 다스려지고 평화로운 숨결이 시편 전체를 감싸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어지는 시구 "산벚꽃 하르르 하르르 지는 소리 들으며"의 환몽적 시·청각, '쑥내음'의 은근히 강렬한 후각적 이미지, 2연의 "둘만의 향기로운 저녁 식탁"이 豫表하는 후각과 미각의 만남 등, "작품의 제요소가 사건적인 서로 관계지움으로 인해 거기에 바이브레이션이 일어나고 시공간이 열려 장소가 된다. 곧 장소란 터트려짐의 공간이며 사물이 그러한 현상학적인 펼침에 의해 무한성을 띠는 영역인 것이다."(이우환, {여백의 예술}, 266쪽). 편, 이미 자연과 더불어 호흡하고 있는 시인에게 '꽃잎이 지는 것'은 '한 세월이 무너지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의 형상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이어지는 행에서 시인이 "둘만의 향기로운 식탁을 위해", 즉 삶의 행복한 영위를 위해 "아무 말 없이" "봄을 캐 담는다"고 했을 때, 그가 말한 '행복'이란, 죽음과 이웃한 겸허한 삶의 영위요 행복인 것이며, '쑥내음'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이승의 것도 아니고 저승의 것도 아닌 그 경계 어디쯤, 나와 너의 만남에서 발하는 향기이다. 이 작품에서 "아무 말 없이"라는 구절은 이러한 존재의 안과 밖, 인생의 밝음과 어둠을 모두 감수하고 소통케 하는 '장지문'과 같은 기능을 하며, 부드럽고 고요한 시공간에 參禮하고 그것을 자신의 糧食으로 향유하는 시인의 삶의 자세를 잘 보여주고 있다.
Ⅱ.
시 [쑥을 캐며]의 평화로움과 따스함은 그러나, 기적처럼, 아리아드네의 실처럼 시인이 놓치 않으려는 마지막 희망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독작}에 수록된 대부분의 시편들은 시인의 절규, 자학과도 같은 그리움과 기다림의 情念으로 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박시교 시인의 시적 지향성을 좀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외로움과 상처의 시편들을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상처 없는 영혼이
세상 어디 있으랴
사람이
그리운 날
아, 미치게
그리운 날
네 생각
더 짙어지라고
혼자서
술 마신다 ([독작] 전문)
시인이 시집 제목으로 '獨酌'을 내세운 것, "친구여, 되도록이면 나와 멀리 하시라"([악마의 말])라고 한 말 등에서 우리는 그의 쓰디쓴 외로움과 그에 결부된 위악적인 면모를 발견한다. 왜 시인은 이러한 방식으로 발언하는 것인가?
사람이 "미치게 그리운" 것이나 "독작"은 쓰라리다. 시인은 실상 강렬한 그리움에 떨며 술잔을 기울이는 것인데, 그가 '그리운 이'를 만나볼 수 있는 것도 어쩌면 그 시간 속에서이다. "네 생각/ 더 짙어지라고/ 혼자서/ 술 마신다". 독작의 쓰라림, 고독의 아픔은 그리움을 더욱 짙게 한다. 시인의 '상처'는 그리운 사람과 관계되며, 그 상처를 도지게 하는 일은 고통스럽지만 그것은 또한 그리움의 환기이기도 하다. 이 모순된 의미망 속에 시인의 시편들이 편재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①하르르 하르르 무너져 내리는 꽃잎처럼
그 무게 견딜 수 없는 고통 참 아름다워라 ([이별 노래] 일부분)
②이 봄 나는 더 야위고 생각의 허기도 진다
마음 빈 자리 있어도 그 누구도 들이지 않고
空腹에 쐬주를 들이붓는 아, 짜릿한 赤手空拳 ([春窮] 전문)
위에 인용한 [이별 노래]와 [춘궁]은 시 [독작]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모티프를 보여주고 있다. ①의 시([이별노래])에서 "그 무게 견딜 수 없는 고통 참 아름다워라"라는 구절의 '고통의 아름다움'이라는 모순형용이 발산하는 아이러니는 "네 생각/ 더 짙어지라고/ 혼자서/ 술 마신다"([독작])는 것과 동음이곡인 것이며, ②의 작품([춘궁])에서 보이는 일그러진 웃음("아, 짜릿한/ 적수공권") 또한 상처를 대하는 시인의 위악적 태도를 다시금 보여준다. 즉, 여기에서의 '독작'은 "마음 빈/ 자리 있어도/ 그 누구도/ 들이지 않고// 공복에/ 쐬주를 들이붓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술'은 시인에게 '생각의 허기'를 달래주고 '마음 빈/ 자리'를 대신 채워주기도 하지만 그 '짜릿함'은 다시금 더욱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하고("더 야위고"), 그 공복과 허기는 허허롭다("생각의 허기도 진다"). 그래서 '赤手空拳'이다. '술'은 시인의 모순적 상황에 부합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지는 못하며, 오히려 그 모순적 순환의 틀 속에 가둔다. '춘궁'의 허기와 공복을 넘기려는 시인의 몸부림은 그래서 '赤手空拳'이다. 꽃피는[春] 세상의 요란함 뒤의 굶주린[窮] 시인의 어두운 형상("공복에/ 쐬주를 들이붓는")이 이 시편 뒤에서 웃고 있다("아, 짜릿한").
Ⅲ
앞에서 살펴본 바대로 {독작}의 시적 화자는 자신의 외로움을 더 깊게 하고("마음 빈/ 자리 있어도/ 그 누구도/ 들이지 않고" [춘궁]), 상처를 덧나게 하면서("그 무게 견딜 수 없는 고통 참 아름다워라" [이별노래]) 그리운 이를 만나고 상처를 치유하려 한다. 하지만 그러한 자학적 방식이 본질적인 치유책이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시인은 또 어떠한 시도를 할 수 있는 것일까? 가슴에 깊이 묻은(內) 그리움을 봄풀로 피워내는(外) 방식은 그 중 주목할 만한 시적 변용으로 보인다.
시인은 "그리운 이름 하나 가슴에 묻고" 살며([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 눈물을 자학 속에, 그리고 자학을 시행 속에 숨긴다.("시의 행간마다 숨겼던 자학의 칼날// 그 속으로 흐르던 뜨거운 눈물이여" [길]) "가슴에 묻은 깊이 모를 아픔"([낙화1])은 그러나 숨겨져 있지만은 않는데, 그것은 "그리움도/ 키가/ 크"기 때문이다([겨울 철원에서]).
내가 봄산에 가서 꽃이 되고 숲 되자는 것은
수없이 무너졌던 너에 대한 그리움이
아직도 마음의 나무처럼 자라고 있기 때문
이만치 떨어져서 바라보기만 하자고
한때는 짐짓 거리를 두기도 하였지만
간절한 바람 그마저 허물 수는 없었기 때문
이제 이러면 되겠느냐, 내가 다시 꽃으로
잎으로 싱그러운 푸름으로 펼쳐 서면은,
그래서 내 몸이 봄산과 하나 되면 되겠느냐 ([봄산에 가서] 전문)
위의 시에서 시인은 "이제 이러면 되겠느냐, 내가 다시 꽃으로/ 잎으로 싱그러운 푸름으로 펼쳐 서면은,/ 그래서 내 몸이 봄산과 하나 되면 되겠느냐"라고 절규한다. 여기에서, "내가 봄산에 가서 꽃이 되고 숲 되자는 것", 즉 "봄산과 하나"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리고 이것이 왜 시인의 절규로 이해되는 것인가?
우선, 시 [봄산에 가서]의 '꽃'과 '나무'는 피고 지는 생멸의 운행을 시인의 눈앞에 보여주는 존재이며, 그 무너짐(죽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다시 "꽃으로// 잎으로 싱그러운 푸름으로 펼쳐 서"는 존재이다. "수없이 무너졌던 너에 대한 그리움이// 아직도 마음의 나무처럼 자라고 있"다는 시인에게 '그리움'은 "지워도 돋는 풀꽃 아련한 향기 같은"([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 것으로 이해되고 있기에 그는 이미 '봄산과 하나'인 듯도 하다.
하지만 자연과 시인의 이러한 소통은 수사적 기법("마음의 나무처럼", "풀꽃 아련한 향기 같은")을 통해, 그 비유 속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다. 즉, '나'의 결핍, 그리움과는 대조적으로 "싱그러운 푸름으로 펼쳐" 있는 자연의 생명은 '너'에 대한 '나'의 그리움을 더욱 아프게 환기하는 '거리'를 둔 것이며, 따라서 시인이 '봄산에 가서 꽃이 되고 숲'되는 것, "그래서 내 몸이 봄산과 하나 되면 되겠느냐"라고 말할 때 그것은 안타까운 그러한 자연과의 '거리'를 반향하고 있는 절규로 들린다. "이제 이러면 되겠느냐...그래서 내 몸이 봄산과 하나 되면 되겠느냐"
따라서 이 작품의 울림은 이중적 '거리'의 겹침과 긴장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허물고 허물어 보지만 끝내 허물 수 없었던 너에 대한 그리움과 '간절한 바람'이 환기하는 나와 너 사이의 거리와 시인의 모순된 태도가 일으키는 긴장이 그 하나이고, '봄산'과 하나 되어 보려하지만 결코 소멸되지 않는 나와 자연의 그 존재론적 '거리'와 안타까움 등이 그것이다. 그러한 긴장된 울림의 겹침이 이 시의 어조tone를 '절규'로 읽게 한 것이리라.
Ⅳ.
시인은 자학적 고통 속에서 그리운 이를 떠올려 보기도 하고, 상상적 합일을 통해 그 간극을 무화시켜 보고자 하지만, 그러한 만남은 언제나 '거리'에 대한 인식의 강렬함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에서 비극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이 가야할 길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무엇이 그리움이고
무엇이 안타까움인가
그 경계 안팎으로
드센 눈발이 친다
이제는
놓아버려도 좋을
사랑이라는
끈 하나. ([폭설] 전문)
시인은 "무엇이 그리움이고/ 무엇이 안타까움인가/ 그 경계 안팎으로/ 드센 눈발이 친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리움'과 '안타까움'은 '경계'를 나누기 어려운 인간적 '집착'에 다름 아니며, 나와 너, 시인과 자연 사이에 놓인 '거리'에서 유발된 결핍된 욕망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따라서 시인이 '경계'란 말을 했을 때 필자에게 주목되었던 것은 그 다음 시행이었다. "그 경계 안팎으로/ 드센 눈발이 친다"
이 작품에서 '드센 눈발'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제는/ 놓아버려도 좋을/ 사랑이라는/ 끈 하나", '그리움'과 '안타까움', 그 인간적 공간 위로 퍼붓는 '눈발'은 모든 집착을 벗어나라는 깨달음의 말이기에 다른 무엇도 아닌 '드센'으로 수식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 [폭설]은 그 경계, 즉 인간적 집착의 현장과 그 벗어남의 시도가 이루어지는 그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 보는 것이 좀더 인간적이며 시적인 진실에 부합될 듯하다. "공문(空門)의 안뜰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깥뜰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수도도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살이의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어서, 중도 아니고 그렇다고 속중(俗衆)도 아니어서......"(박상륭, {죽음의 한 연구}, 9쪽) 욕망과 무욕, 그리움과 깨달음의 그 '경계', 즉 애련의 정을 여전히 짐진 채 깨달음의 길을 가고자 하는, 경계에서 '드센 눈발'을 맞고 있는, 비로소 길 위에 서게 된 시인의 모습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독작]에서의 쓰라림과 [봄산에 가서]의 절규가 그리움과 안타까움, 인간적 집착과 욕망에 기원하는 것이라면, [폭설]은 그 고통스런 삶의 현장에서 들려오는 깨달음을 향한 시인의 發願인 것이며, [쑥을 캐며]는 시인이 이르고자 하는 세계의 일단을 그려보인 것이라고, 나는 박시교 시인의 이번 시집 {독작}의 주요 시편들의 의미를 구조화해 본다. 하지만 이들 시편들 모두 그가 처한 "벼랑의 끝"([암병동일지])에서 일구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시편 하나 하나에는 죽음과 삶, 상처와 치유의 고통스러운 싸움의 흔적이 배어 있다는 점에서 다른 것이 아니다. ...이 봄, 슬픔 속에 있는 이들 모두 위로 慈悲의 '꽃비' 내리소서.
박시교 시집 {獨酌}(작가, 2004.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