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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있는 것들/문학의 갈피

짧은 시조, 성찰과 순명의 시조

by 광적 2008. 5. 9.
짧은 시조, 성찰과 순명의 시조 / 박구하



요즘 시조단은 가히 장시조, 연시조의 홍수시대라 할만하다. 첨단시대를 맞아 자유시도 짧
아지려는 마당에 왜 시조는 길어지려고 하는가. 연시조나 장시조가 시조가 아니라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시조의 본령은 아니다. 단시조는 절제와 긴장과 여백이라는 시조의 속성
에 가장 충실한, 말하자면 시조의 적자이다. 장시조나 중시조는 형식도 형식이지만 내용상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또, 연시조가 시조로 행세하려면 각 수가 독립적이면
서도 강한 연대성을 가져야 하고 각 수마다 시상의 완결성을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요즘
발표되는 장시조나 연시조를 보면 단수 내에서 章句法으로 압축되지 못하고 각 수들이 시상
의 단편적 전개나 반복, 나열에 그치고 말거나 마지막 수에 가서 겨우 종결되는 것이 많다.
이런 것을 시조라 할 것인가. 시조는 외양적 형식만 갖춘다고 시조가 되지 못한다. 시조의
유형, 명칭에 상관없이 한 수 안에서 3장6구가 제대로 기능을 하는 내면적 형식을 갖추어야
진짜시조일 것이다. 다음 작품은 시인가 시조인가. 아니면 산문인가.

나무는 언제나 베풀고 있다. 산소(酸素)를 만들어 주고,/ 그늘을 만들어 주고, 날짐승 쉬어
가라 하고, 산사태(山沙汰)를/ 막아주고 있다. 집을 짓는 기둥이 되고, 종이를 만들 수 있고,
맑고 향긋한 향기(香氣)를 내뿜어주고, 홍수(洪水)로부터 사람을 지켜준다.//
묘목(苗木)이 자라나서 큰 숲을 이루리라.//
언제나 베푸는 삶을 얹어놓고 있니라.
-김남준, 「나무처럼」전문 (시조시학 2004 봄호)

아마 장시조라고 발표한 것 같은데 이런 작품(이것이 '작품'인지 모르겠지만)이 어떻게
"정선 11인 신작시조"의 이름으로 발표될 수 있는지 허탈해진다. 이는 외양과 내면의 형식
이 모두 무너진 예에 해당하지만 소위 장시조라고 발표하는 시조시인들 작품에서도 비슷한
예는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단시조 내에서 형식을 무너뜨리는 행위도 문제지만 무잡한 장시
조, 종결 없는 단순연시조나 억지춘향의 혼합연시조는 더욱 문제다. 가령 우리 나라에 자유
시라는 장르가 없다면 이런 것도 광의의 시조로 보아줄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무소불위의
자유시가 있는데 굳이 시조의 처마 밑을 찾아와 더부살이를 하려드는지 모르겠다. 시조가
오늘의 문단에서 제대로 대우받으려면 "시조 같은 시조"가 아닌 "시조인 시조"가 나와야 하
고 시조단부터 그런 작품에 주목하고 이를 우대하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

월간문학 6월호는 10인의 작품 20편을 싣고 있는데 그 중 단시조는 단 4편뿐이다. 나머지
는 연시조인데 다행인 것은 다음 시조를 제외하고는 모두 외형적 율격이 잘 지켜져 있고 길
이도 3수 이내로 마무리되고 있다는 점이다. 서사시조가 아닌 서정적 연시조의 경우 최대 4
수 이내로 마무리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난 달 작품들의 주제는 대체로 개인적 삶의 성찰
과 순명을 보여주고 있다.

소나기 지나간 숲길/ 엷은 햇살이 비친다.
풀잎에 앉은 사마귀 한 마리/ 위장의 눈망울을 굴리다
앞발의 발갈퀴를 쳐든다./ 온 숲 속이 고요하다.
튼실한 등을 타고/ 몰래 오르는 수컷 사마귀
뭔가 각오한 듯/ 덥석 암컷을 껴안는다.
절정쯤 이르렀을까/ 잡아먹히고 마는 수컷의 운명
-김제현, '순명' 전문 (月刊文學 6월호)

이 작품은 전통적 자수율의 입장에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파격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도 이
상한 것은 제목처럼 '순명'적인 정서가 녹아 있어서인지 의미율로는 4음보의 보법으로 읽힌
다. 그 대신 5음절 이상 되는 과음보가 너무 많아 (무려 12군데) 시조 특유의 리듬감과 율격
상 도약과 반전효과가 희생된 감이 있다. 형식문제를 떠나서 내용으로 볼 때 이 작품은 시
도 시인도 없는 지경에서 다만 '사마귀'의 일생을 알레고리로 보여주기만 할뿐인데 이상한
것은 그것만으로 독자에게 심상찮은 想像과 返照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노골적인 정사
장면을 보여주는데도 전혀 에로틱하지 않은 것은 제목을 '사마귀'라 하지 않고 '순명'이라 한
탓이다. 여기에 耳順의 나이를 살고 있는 시인의 숨은 記意가 있다. 螳螂拒轍의 고사나 욕망
의 말로를 알면서도 그 욕망의 불길로 뛰어들다가 자기 파멸 아니면 토사구팽 당하는 우리
네 슬픈 實在界를 돌아보게 한다. 어차피 인생은 도전과 응전, 일거수일투족이 Risk-taking
일 수밖에 없고 그 끝은 결국 자기헌신 아니면 자기희생이지만 그 결과를 겸허하게 접수하
겠다는 시인의 인생 경전의 한 페이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내 것만 잡으려고 움켜쥔 주먹손도
풍진의 고개 너머 불혹의 길을 갈 때
한 풀씩 꺾여지면서 풀어지고 있었다

있어도 없음같이 비워도 채움같이
잔잔한 나여울의 물보라로 흐르다가
빈 뜨락 번지는 햇살/ 햇살 한 줌 안아볼까
-이영주, '손등을 보고' 전문 (月刊文學 6월호)

똑같은 생의 성찰이라도 불혹의 그것은 아직은 도전의 기가 남아 있던가. 움켜쥔다고 다
내 것이 아님을 알게되면서 욕심의 주먹도 그 힘줄이 느슨해질 수밖에 없다. 지금 사과가
내 손안에 있다고 해서 내 것이 아님을 안다면 남의 손에 있는 것이 내 것이 될 수 있음도
알게 된다는 성찰이 유추된다. 그런데 이 작품은 둘째 수에 가서 느닷없이 覺者의 흉내를
냄으로써 시의 맛을 떨어뜨리고 있다. 시가 왜 주장(claiming)이 아니라 showing이어야 하
는지를 생각케 해주는 대목이다.

비행기는 겁이 나고
차도 또....
그냥 걷자

신발은 괜찮을까
고놈도
가끔 헛딛지

벗어라
신은 벗겨지는데 발이 안 벗겨진다
-박종대, '달마의 신발' 전문 (月刊文學 6월호)

이 시조는 '신발'을 '신'과 '발'로 해체하여 인생의 正道를 가는 것과 집착의 굴레를 벗기 어
려움을 묘파하고 있다. 모든 불확실성, 不可信性을 벗어나서 가장 확실한 것은 두발로 걷는
것인데 그 보행도 자세히 보면 맨발이 아니라 '신발'로 하고 있다. 그 '신발'은 '신'과 '발'의
합작품인데 우리는 그 둘을 동일시하여 바로 가고 있다고 자기합리화를 하거나 '신'을 벗음
으로써 집착을 버렸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직설적 언어유희를 빙자하여 섬뜩한 생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런 점도 단시조를 읽는 재미 중 하나일 것이다.
시조를 기법상 크게 사설조 시조(=읊은 시조)와 회화조 시조(=그린 시조)로 나눈다면 이
작품은 전자에 속하고 다음 작품은 후자에 속하는 예다.

길의 상처를 핥는 혓바닥 같이 고인 물
다 버리고 뎅그러니 가장자리만 남은...
그믐달,
물웅덩이 속으로
미늘처럼 꽃힌다
-선안영, '거울' 전문 (시조시학 2004 봄호)

이 시조의 이미지는 명징하다. 물웅덩이에 비친 그믐달을 보여줄 뿐인데 그 함의는 만만치
않다. '고인 물'은 그냥 물이 아니라 무수한 '상처'를 입은 길을 제 '혀'로 핥아 주는 연민의
물, 봉사의 물이다. 혀는 인체에서 가장 직접적이고 헌신적인 부분이다. 이 작품의 겉제목은
'거울'이나 속제목은 '그믐달'이다. '그믐달'은 임무를 다하고 사라지는 달이다. 물웅덩이는 상
처 입은 '길'의 반면교사로서 '거울'이 된다. 여기서의 '거울'은 라캉이 말하는 자기인식이 수
반되지 않은 이미지를 나타내는 은유이다. 헌신의 일생의 보내고 '가장자리만 남은' 달은 아
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곧 사라질 '물웅덩이'에 빈 낚시바늘로 자신을 투사(projection)한
다. 이처럼 하나의 주제를 여러 객관물로 상관시킴으로써 많은 상상의 공간을 독자에게 열
어준다. 앞의 시 '달마의 신발'과 달리 소위 관념을 숨긴 채 이미지의 전경화에 성공한 예다.
사라질 달이 사라질 물에 사라질 육체를 투사함은 만물변전과 諸行無常을 말하는 것이다.
잔류자의 허망 같은 것, 재생의 빌미 같은 것을 복합적으로 상징하는 이 작품은 각각 다른
질료들이 하나로 의미적 통일을 이루면서 이 글 첫머리에서 말한 단시조의 기능을 다하고
있다. 다만, 내용상 쓸데없어 보이는 구두점이 거슬린다.

이외에 월간문학 6월호에 나온 시조작품 중 이낙금은 '가을강'에서 "지난여름 흙탕물에 남
김없이 비운 가슴"으로 성숙한 가을의 맑은 서정을 그려 독자에게 공감을 주고 있고, '백로'
에서는 백로를 통하여 지난날의 회억과 앞날에의 순명을 의탁한 독백들이 평이하나 저속하
지 않다.
천옥희는 평생 손에 이름 한 번 붙여주지 못했던 자신의 '손'을 통해 여인의 일생을 '사랑'
의 보법으로 조명하고 '첫사랑'에서 "아껴둔 보석같이 처박아둔 사람아" 라든지, "언제나 그
쯤에서 선 채로 웃고 있는/ 그렇게 그려 가는 우리의 평행선을" 같은 유려한 진술로 전편에
흐르는 시상이 애조를 띄면서도 밝고 활달하다. 이들 작품들은 시조를 읽는 또 다른 맛을
느끼게 해주는 소품들이지만 지면관계로 길게 언급치 못하는 점 아쉽게 생각한다. (끝)


<출처: 월간문학 2004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