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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있는 것들/문학의 갈피

나는 동시를 이렇게 썼다

by 광적 2008. 5. 9.
                         나는 동시를 이렇게 썼다 / 김종상

G.L.L. 뷔퐁은 '글은 곧 사람'이라고 했다. 사람은 환경의 산물이고 글의 내용은 환경이 결정한다고 보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나의 경우도 그러했다는 생각이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55년 상주 외남에 교사로 부임한 것과 때를 같이 한다. 6·25전쟁 직후라 모두가 살기 힘든 때였지만 그 해는 더욱 어려웠기에 '쌍팔년'이라고 불렀다. 1955년이 단기로 4288이었기 때문에 끝 두 글자 88을 따서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학급 담임 외에 문예반(文藝班)까지 맡은 나는 읽을 책이 없는 아이들에게 내가 글을 써서 읽어주며 글쓰기 공부를 시켰다. 곶감과 고치와 쌀로 이름난 '삼백의 고장' 상주는 11월이면 감도 감잎도 모두 빨갛게 물들어 마을은 온통 불타는 숲으로 덮인다. 어느 가을날, 나는 저녁놀이 붉게 드리운 황혼 속에서 고추잠자리를 쫓는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메모장을 꺼냈다. 나는 노을 속의 아이들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듯 글로 스케치했다.

파랗던 풋감도/ 홍시로 익듯/
하늘도 그렇게 익는 것일까?//
하루 해가 서산에 질 때/
하늘이 빨갛게 물이 드네/
세상이 온통 감빛이네.//
빠알간 감잎이 구르는 황톳길에도/
고추잠자리 쫓는 아이들 옷깃에도/
노을이 빨갛게 젖어 있네.// (노을. 1956.)

이렇게 쓴 글을 아이들에게 읽어주는 나는 기뻤고, 내가 쓴 글을 듣는 아이들은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더욱 열심히 글을 썼다. 젊은 날에는 누구나 한 번쯤은 문학도의 꿈을 가져보듯이 나도 이 무렵에는 시인이나 소설가의 꿈이 조금은 있었다. 그래서 1958년에는『새교실』4월호 4.5.6학년 편에 자유시「너를 찾아 가련다」를 발표하고, 8월호에는 소설「부처손」이 독자문예란에 뽑혔다. 그 때부터 몇 편의 시와 소설을『교육자료』와『새교실』등에 발표했으나, 그것은 내 아이들에게 읽어줄 글이 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아이들을 위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동시를 쓰기 시작했고 1959년에는『새벗』현상문예에 동시「산골」이 뽑혔다.

앞산과/ 뒷산이/ 마주 앉았다.//
하늘이/ 한 뼘//
해가/ 한 발자국에/ 건너간다.//
햇볕이 그리워/ 나무는/ 목만 길고.//
바위도/ 하릴없이/ 서로/ 등을 대고/ 누웠는데.//
산마루를/ 기어 넘는/ 꼬불길가에/
송이버섯 같은/ 초가집 하나.//
해 지자/ 한 바람 실같이/ 저녁 연기 오른다.// (산골. 1959.)

이 글은 나중에「외딴집」으로 제목을 바꾸었지만 내가 자란 산골마을 풍경이었다. 위대한 자연 속에서 보면 사람은 참으로 하잘것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산수도에 사람을 그릴 경우에는 점만큼 작게 그려 넣었다. '초가집과 저녁연기'에서 비로소 사람의 존재를 생각하게 하는 이 글은 옛 산수도와도 같은 표현기법이라 하겠다. 이 때 내가 지도한 아이들 글도 여러 편이 뽑혀 상을 받았다. '상주가 어린 문사의 고장―동시의 마을'이란 이름에 걸맞는 큰 자랑이었다.
그 해 나는 군에 입대를 하면서 그 동안 쓴 동시를 신춘문예에 보내서 1960년『서울신문』에 당선됐다. 동시「산 위에서 보면」이 당선 작품이다.

산 위에서 보면/ 학교가 나뭇가지에 달렸어요.//
새장처럼 얽어 놓은 창문에/
참새 같은 아이들이/ 쏙쏙/ 얼굴을 내밀지요.//
장난감 같은 교문으로/ 재조잘 재조잘/
떠밀며 날아나오지요.// (산 위에서 보면. 1960.)

학교 앞 모래고개에서 바라본 학교 풍경이다. 나무 사이로 바라보이는 학교 모습이 나뭇가지에 달린 새장과도 같았다. 학교가 새장이면 아이들은 새들이다.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기도 하고 짹짹거리며 교문을 날아나오기도 하는 참으로 귀여운 새들이었다. 이 무렵의 내 글은 대부분 이렇게 자연 풍광을 스케치하듯 보이는 대로 그려내는 사생시(寫生詩)에 치중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69년에 서울로 자리를 옮겼다. 서울 생활은 대단한 변화였다. 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나는 생활이 몹시 서툴렀다. 출근부터가 그랬다. 아침 버스는 언제나 만원이어서 어물거리다가는 밀려나기가 일쑤였다. 결사적으로 돌진해야 한다. 나는 어린이의 입장이 되어 그 경험을 소재로 시를 썼다.

아침 입석 버스는/ 언제나 만원이다./
이것이 서울이구나/ 모든 것이 비좁기만 한…….//
체면과 질서를 밀치고/ 간신히 올라타도/
손은 천장에 매달리고/ 발은 허공을 딛고/
사람 사이에 끼어/ 남의 몸에 짓눌려/
안간힘을 써도/ 챙길 수가 없구나/ 내 작은 몸뚱이.//
덜커덩!/ 정류장 푯말 밑에/
짐짝처럼 내동댕이쳐진/ 이게 정말 나인가?//
버스는 스컹크/ 매연을 뿜으며/ 저만큼 달려가는데.//
그래도 붙어 있구나/ 내 팔과 다리./
모두 따라 내렸구나/ 내 책가방/ 내 모자.//
(만원버스. 1969.)

이렇게 바뀐 생활환경은 상당 기간 나에게 새로운 글감이 되었고, 나는 그것을 쓰는 것이 큰 위안이었다.「서울 누나」「거리 소음」「공기 오염」「한강 보호」「집 찾기」「빌딩」「다방」「아파트」「네온싸인」등의 동시와「건널목에서」「제비들의 주택난」「택시 기사 이야기」「개가 된 사람들」등의 수필은 모두 한가로운 전원도시인 상주에서 쓴 글들과는 색깔을 달리했다.
나는 시골이 그리우면 밤에 하늘을 쳐다보았다. 서울 하늘은 매연에 그을려 별도 달도 잘 볼 수가 없었다. 어쩌다가 빌딩의 어깨 너머로 달이 보일 때는 참 반가웠다. 그러나 그것은 시골에서 보던 달이 아니었다. 수심이 가득한, 빛이 낡은 달이었다. 나는 그 때의 느낌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서울의 달은/ 아무도/ 보아주는 이 없어/
쓸쓸하고 맥빠진 표정이다.//
억새숲을 헤치며/ 솔가지를 딛고 오르면/
왁자하게/ 손 흔들어 반겨주던/
시골 어린이들을/ 생각하며.//
빌딩 숲 사이로/ 소란스러운 거리를/
두리번거리는/ 서울의 달은//
매연에 그을려/ 부석하고 짜증난 얼굴로/
고가도로 난간에 앉았다가/
슬그머니 떠나간다.// (서울의 달. 1969,)

나는 이따금 택시를 타고 서울 외곽을 돌아오곤 했다. 그것은 다소 경제적인 부담이 있었지만 마음이 울적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밤에 북악을 올랐다. 팔각정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은 황홀했다. 빌딩 창문마다 반짝이는 등불이며 길을 따라 물결처럼 흘러가는 자동차의 불빛과 오색찬란한 네온등으로 서울은 빛의 바다였다. 그것은 밤하늘의 어느 별자리보다도 찬란했다. 문득 나도 한 개의 별이란 생각이 들었다. 별 가운데서도 잠시 흐르다가 꺼져 버릴 반딧불보다도 작고 약한 유성 같은 것이겠지만. 그래서 그 순간의 느낌을 이렇게 적었다.

바다를 보았겠지/ 끝없는 물결.//
물방울이 빛이라면/ 밤 바다는/
출렁이는 빛결로/ 살아 있는 별자리겠지.//
끝없이 펼쳐진/ 눈부신 소용돌이/
굽이굽이 빛결 위로/ 부서지는 꽃불.//
돌고 달리고/ 치솟고 퍼지는…….//
육백만 가슴으로/ 저마다 엮는 꿈이/
찬란한 빛으로 피어/ 서울은 끝없는 별의 바다.//
어디서 쏟아져/ 어디로 흐를까/ 이 별자리는.//
은하수 강변을/ 유성이 흘러가듯//
나도 이 밤/ 북악을 흘러간다/
한 개의 외로운 별.// (밤 북악에서. 1970.)

어느 일요일 하루. 시내 구경을 나섰다. 남대문 시장으로 갔다. 장사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다. 충청도 사투리로 멍게를 파는 아주머니, 전라도 말씨로 번데기를 외치는 아저씨, 경상도 토박이말로 싸구려를 부르는 경상도 젊은이 모두가 열심히 살고 있었다. 우리 나라 각처의 사람들이 모두 거기에 와서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서 순박한 시골 농민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농 현상으로 시골의 논밭이 묵어가고 있음을 걱정하는 까닭을 알 것 같았다.

충청도와 전라도/ 강원도와 경상도에서/
고향을 버린 사람들/ 모두 여기 있구나.//
밤늦은 시장 골목/ 가스등 아래/
멍게를 팔고/ 번데기를 외치며.//
서툰 하루를/ 남의 흉내로 사는/
분이네 오빠/ 돌이 아저씨.//
소나기 딛고 간/ 밭이랑마다/
팔 걷고 풍년을 심던/
그 흙빛 주먹엔/ 호미가 없어도.//
착한 황소 눈엔/ 아직도 서려 있구나/
전설 같은 고향 이야기.// (시장 골목. 1970.)

남대문 시장을 나와 덕수궁 뒷길을 걸어 서소문으로 넘어갔다. 길 왼편에 의족원이 있었다. 고무와 프라스틱으로 만든 팔다리가 진열되어 있었다. 한 젊은이가 주인인 듯한 남자의 도움을 받으며 장화를 신듯 의족을 다리에 끼우고 있었다. 어쩌다가 다리를 잃었을까? 전쟁터에서, 공사장에서, 팔다리를 잃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잘려나간 팔다리를 그렇게라도 때워 붙여야 하는 심정들은 어떨까?

전쟁터에서/ 공사장에서
거룩한 이름으로 바친/ 팔과 다리를 위해//
푸줏간 살코기처럼/ 진열장에 내걸린/ 의족, 의수들.//
포탄에 찢긴 다리를 보며/ 조국을 부르던 병사/
톱니바퀴에 뜯긴 팔을 안고/ 어머니를 찾던 사람들.//
모두 여기 와서 찾는구나/ 그 잃어버린 팔과 다리.//
헤진 신발을 바꾸어 신듯/ 뚝 잘려나간 팔다리를/
여기 와서 때워 붙이고/
하늘을 쳐다보는/ 표정 잃은 얼굴들.//
아! 비가 내린다/ 구멍난 가슴 속으로.//
메아리도 없는 여울이/
멍든 마음을 씻어 내린다.// (의족원. 1972.)

건강한 내 다리에 감사하며, 의족원을 뒤로 하고 서대문 로터리를 지나 경기대학 언덕길을 향했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나는 북아현동 친지집에 숙식을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종종 이 길로 다녔지만 그 날은 참 한적했다.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렸다. 귀에 익은 골짝물 소리였다. 반가웠다. 물소리가 나는 곳은 맨홀이었다. 얼굴이 못나고 행동이 나빠도 목소리는 기막히게 고운 사람이 있다. 하수도를 흐르는 구정물 소리가 이렇게 맑을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맨홀을 빠져나온 물소리는/ 숨이 가쁘다.//
발길에 짓밟히고/ 차바퀴에 갈리면서/
회오리바람에 쫓기는/ 나비들처럼/
지친 날개를 파닥이며/ 내 귓가에 매달린다.//
목욕탕 배수구나/ 음식점 구정물통에서/
모여들어/ 하수도를 흐르면서도/
싸리꽃 피는/ 산골짝인 줄만 아는가?//
졸졸졸/ 숨이 끊어질 듯 이어가는/
하수도의 물소리.// (물소리. 1969.)

30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때 쓴 이 시들을 다시 읽으며, 그간 서울도 참 많이 변했다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놀라고 있다. 변화에도 가속이 붙고 있었다. 서울은 더욱 그렇다. 이제는 그 때와는 다른 모습의 서울을 노래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러다가 1973년 나는 어머니를 잃었다. 살아 계실 때는 몰랐는데, 잃고 나니 그의 빈 자리가 너무 넓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사랑과 희망의 불꽃을 끊임없이 피워 주신 불씨였던 것이다. 그 불씨를 피워 뜨거운 사랑으로 우리를 감싸 주시고 밝은 빛으로 가는 길을 밝혀 주시는 어머니는 누구에게나 원초적인 사랑이고 영원한 그리움일 것이다. 그래서 그 불이 꺼지면 모든 빛이 한꺼번에 떠나는 것이다.

한 목숨 산다는 것이/ 불꽃 같은 것이라면/
활활활 날며 타는/횃불일 수도 있을 텐데/
어머니 지나온 일생은/ 잿불 같은 것이었네.//
제 몸을 나누어서/ 새 빛으로 피워 주며/
언제나 아궁이 깊이/ 없는 듯 숨어 있어/
보듬어 속으로 뜨거운/ 그러한 불씨였네.//
그 불이 다 사그라져/ 마지막 꺼지던 날/
하늘과 땅 사이는/ 다 빈 듯 허허롭고/
이 세상 모든 빛들이/ 함께 따라 떠났네.// (불씨. 1973.)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 길러주신 어머니를 나는 한 번도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 서울로 모셔 와도 사흘을 못 넘기고 시골로 내려가시곤 했다. 그것은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흙내와 풀향기가 그립고 자신들이 평생을 땀으로 가꿔온 논밭을 잠시도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는 멀리 두고 생각만 했다. 생각은 아버지보다도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었으니, 어머니는 곧 고향산천이었고 간절하리만큼 가슴 저린 향수였다.

구름 너머 고향을 두고/ 그리움을 앓던 나날/
어머니 무명치마는/ 구비구비 푸른 산자락/
언제나 내가 쉴 곳은/ 거기 두고 있었네.//
괴로움의 그늘에서도/ 즐거움을 기르시고/
미움도 어루만져/ 사랑으로 가꾸시는/
어머니 높은 산맥에/ 나 하나는 무얼까?//
때로는 바람을 맞고/ 눈비에 지친 날에도/
그 품에 깃을 풀면/ 꽃이고 잎이었지만/
끝내 그 높은 뜻은/ 헤아리지 못했네.//
(어머니 무명치마. 1973.)

어머니를 그린 이러한 나의 동시는 초등학교 국어에「어머니」, 특수학교 중등 국어에「그 이름」이 실린 것을 비롯하여,「기다림」「고향 마을」「다시는 오지 않을」등과 나의 서울 생활 모습을 담은 동시를 모아 어머니 1주기가 되는 1974년에『어머니 그 이름은』이란 동시집으로 펴냈다.
이래서 나의 동시는 '전원의 한가로움'에서 '도시의 이방인'으로 옮겨지고, 다시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으로 시점이 바뀌었다. 시상도 보호색을 띠는지 나의 동시는 생활 환경을 따라 이렇게 그 몸빛을 달리 해 온 것 같다. 그 후 어느 정도 서울 생활에 길들여진 뒤에는 새로운 변화를 시도해 보았는데, 그 중의 하나는 동시의 글감을 아이들 속에서 찾는다는 것이었다.

우리 반 어린이 수는/
내가 있어야/ 60명이 된다.//
우리 나라 인구 속에/
나도/ 한 명으로 들어간다.//
지구의 무게를 계산할 때/
내 몸무게도/ 더해지겠지.//
크고도 넓다는/ 이 우주에서/
내가 차지한 넓이는 얼마일까?//
내가 없으면/ 우리 어머니는/
온 집안이 다 빈 것 같단다.// (나. 1982.)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어머니는 한 분뿐이듯이 세상에 아이들이 아무리 많아도 어머니에게 아들인 나는 하나뿐이다. 그래서 나는 작아도 존재 가치는 큰 것이다.
이 시는 그런 나의 존재 가치를 하나하나 확인해 본 것이다. 우리 반은 내가 빠지면 60명이 못 된다.우리 집 식구, 우리 마을 주민, 우리 나라 인구도 내가 있어야 숫자가 차게 된다.

체격 검사를 했다/ 내 몸무게가/
6Kg이나 불었다/ 일 년 사이에//
땅덩이 무게도 6Kg 더 늘어났겠다.//
새들이 알을 까서/ 식구들이 불어날 때/
씨앗이 싹이 트서/ 큰 나무로 자라날 때//
땅덩이도 그만큼/ 무게가 더해지겠지.//
오늘도 비가 와서/ 시냇물이 불어나고/
마을 앞 저수지도/ 가득히 채워졌다.//
땅덩이 무게도/ 참 많이 늘어났겠다.//
(땅덩이 무게. 1986.)

학급에서 체격 검사를 하는데, 한 여자 아이가 체중이 많이 불었다며 좋아했다. 깡마르고 체구가 작은 그 아이는 키가 크고 몸무게가 느는 것이 소망이었다는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아이의 몸무게가 6Kg 불어나면 땅덩이 무게도 그만큼 늘어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땅덩이 무게만이 아니다. 우주의 부피 계산에도 아이는 자신의 체격만큼 당당히 한몫으로 끼게 될 것이다. 큰 우주 속에서의 아이의 존재를 생각해 본 것이다.

한 옛날에 큰 사람이 있어/ 그의 두 눈은 해와 달이고/
그의 팔과 다리는 산맥이고/ 그의 머리칼은 숲이었단다.//
그 사람은 얼마나 컸던지/ 그의 소리는 천둥이었고/
그의 숨결은 폭풍이었고/ 그의 몸은 곧 우주였단다.//
아가야, 귀여운 내 아가야/ 그 사람이 누군지 아니?/
이 엄마의 마음속에는/ 그게 너란다, 우주만큼 큰.//
(큰 사람. 2001.)

「큰 사람」은 어머니에게 있어서 아기는 얼마나 귀한가를 중국의 천지창조 신화를 가져와 이야기했다. 재미있게 읽는 사이에 사랑의 어머니 마음을 생각해 보게 하려는 글이다. 하지만 어찌 아기만이 크고 귀하랴. 동시의 세계는 세상 만물을 모두 내 몸같이 생각하는 이상의 세계다.
부처님은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란 말로 사람의 존귀함을 가르쳤지만 어머니에게 있어서는 우주보다 큰 것이 아이의 존재다.
교육에서 꼭 생각해야 할 것이 세 가지 있다. '①왜 가르치는가? ②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③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나는 근간에 와서 동시를 쓸 때면 이 말을 자꾸 떠올린다. 동시의 소재나 주제, 효용 가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억지로 꾸며낸 말장난 같은 글, 무엇을 보여주려는지 알 수 없는 글, 기본 문장도 제대로 되지 않는 글들을 동시라는 이름으로 양산하고 있는 일들이 많아서이다. 그런 글들을 왜 쓰며 아이들에게 왜 읽혀야 하는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 읽힐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글이 많기 때문이다.
나는 동시를 통하여 아이들에게 바르고 고운 말, 크나큰 사랑의 마음을 심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인 '천지동근 만물일체(天地同根 萬物一體)'의 크고 높은 사랑을 가슴으로 그려낸 동시를 가장 곱고 아름다운 문장에 실어 보여주고 싶다. 그것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2004년 여름『시와 동화』제2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