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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문학장르/좋아하는 詩

열쇠/오탁번

by 광적 2008. 5. 27.

   열쇠 / 오탁번

 

미아리 삼양동 산비탈에서

삭월 셋방에 살던 신혼시절

주인여자는 대문으로 출입하고

내 가난한 아내는

담벼락에 낸 쪽문으로 드나들었다

쪽문을 열고 부엌을 지나

대여섯 평 좁은 방에서

신혼의 단꿈을 꾸며 살았다

뚱뚱한 주인여자의

짜랑짜랑하는 열쇠소리에 주눅이 들어

사랑을 나눌 때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몇 년 후 장위동에다

전세방 끼고 대출 받아서

스무 평 집을 장만했을 때

아내와 나의 꿈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열쇠고리에 달린

대문 열쇠, 현관 열쇠, 방 열쇠를 보면서

아내는 함박웃음을 웃었다

열쇠고리를 짜랑짜랑 흔들며

당당하게 대문을 따고

우리집을 맘 놓고 드나들었다

 

열쇠가 늘어날수록

아내의 허리도 굵어지고

아들 딸 낳아 살다가

10년 후에는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아파트를 분양받은 것이 아니라

열쇠 꾸러미를 분양받은 것 같았다

현관 열쇠, 방 열쇠, 장롱 열쇠, 싱크대 열쇠

화장실 열쇠, 다용도실 열쇠,장식장 열쇠

그것도 각각 네 개씩이나 되는

묵직한 열쇠 꾸러미를 받아든 아내는

열쇠에 맺힌 한을 풀었다는듯

한동안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토록 자랑스럽던 열쇠도

세월 따라 하나하나 사라지고

이제 아파트도 오피스텔도

디지털 키와 카드 키로 다 바뀌었다

제 집 문을 열 때는

열쇠를 구멍에 찔러 넣고

홱 돌려야 제 맛인데

손끝으로 번호를 톡톡 누르니까

꼭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가는 것 같다

열쇠란 열쇠는

몽땅 다 사라져버렸기 때문일까

이순의 저녁나절도 아득히 흘러간 오늘

아내의 방을 여는

사랑의 열쇠를 어디다 뒀는지

통 생각나지 않는다

삭월 셋방 가난했던 그 시절엔

대문을 따는 열쇠는 없었지만

밤마다 사랑의 방을 여는

금빛 열쇠가 나에게 있었는데

이젠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다

 

<문학사상> 2008.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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