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고, 방치하고, 어슬렁거릴 수밖에 / 안도현
8. 빈둥거리고 어슬렁거리고 게을러져라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때 이형기 시인은 부산으로 피난 온 조지훈을 만나 술을 한잔 같이 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팔팔하게 젊은 이형기는 대선배 조지훈에게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조지훈은 “그것은 그저 방치해 둘 수밖에 없는 일이오”라고 짤막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조지훈은 이 말을 전에 정지용한테서 들었다고 일러 주었다.
시를 방치하는 일, 그게 시를 잘 쓸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당신은 이 선문답 같은 짧은 일화를 유심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 시의 대가들뿐만 아니라 서양인도 비슷한 충고를 한다. 브렌다 유랜드는 <참을 수 없는 글쓰기의 유혹>에서 창의적인 글은 “오랫동안 비효율적이고 행복하게 게으름을 피우고 빈둥거리며 시간을 낭비하는 동안 생겨난다”고 말하고 있다.
노동의 효율성과 경제적 이윤 추구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견해는 야만이거나 무책임한 언설일 뿐이다. 열심히 시간을 쪼개 공부해도 다다르지 못할 판에 빈둥빈둥 게으름을 피우라니!
당신은 오해하지 마라. 좋은 시를 쓰기 위해 무조건 한가하고 낭만적인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그 누구나 빈둥거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루 종일 책을 보면서 머리를 쥐어뜯어 본 적이 있는 사람, 그래도 시 한 줄 떠오르지 않아 발을 동동 굴러본 적이 있는 사람, 이러다가 영영 시를 쓰지 못하는 게 아닐까 두려워해 본 적이 있는 사람, 그리하여 아예 시를 포기해버리고 싶다고 자조 섞인 푸념을 내뱉어본 적이 있는 사람만이 빈둥거릴 권리가 있다.
<노는 시간은 ‘발효와 숙성의 시간’그래야 세상 뒤편 응시할 수 있어>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매혹적인 제목의 글에서 버트런드 러셀이 한 말은 우리에게 힘이 된다. 그는 노동이 미덕이라는 믿음이 현대사회에 막대한 해를 끼치고 있다고 단언한다. “우리는 생산에 관해선 너무 많이 생각하고 소비에 대해선 너무 적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루의 노동시간을 4시간으로 줄여야 한다고 파격적인 의견을 내놓는다. 하루에 4시간만 일을 하고 나머지 시간을 불성실하게 보내라는 말이 아니다. 그 나머지 시간에 지금보다 더 많은 즐거움을 누리도록 더 적극적인 태도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빈둥거리며 노는 시간을 발효와 숙성의 시간이라고 부르고 싶다. 만약에 당신이 맛있는 술을 마시고 싶거든 술이 제대로 익기를 기다려라. 열흘이라도 백일이라도 기다려라. 좋은 술일수록 절대로 혼자 병마개를 따고 홀짝이며 마셔서는 안 된다. 함께 마실 친구가 저녁 어스름 무렵에 당신을 찾아올 때까지 기다려라. 그렇게 기다리는 시간에 초조하게 담장 바깥을 기웃거리지 마라. 당신은 그냥 뒷짐을 지고 어슬렁거리며 걸어라.
나는 어슬렁거리며 걷는 시간을 좋아한다. 어슬렁거려야 미세한 데 눈길을 줄 수 있고, 세상이 요구하는 질서의 뒤편을 응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신이 있다면, 아마 그도 어슬렁거리며 걷는 일로 하루를 다 소비하는 자일 것이다. 시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도 나는 특별한 이유 없이 되도록 많이 걸을 것을 주문한다. 한적한 오솔길이나 들길이 아니더라도 좋다. 재바르게 걷지 말고 ‘따복따복’ 걸어라. 모든 길은 세상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훌륭한 통로다.
그런데 아뿔싸! 학교 앞 거리에 어느 날 이런 현수막이 나붙은 것을 보고 말았다.
‘이유 없이 배회하는 자를 112에 신고합시다’
학교 부근 파출소에서 내건 이 현수막을 보고 입이 딱 벌어졌다. 이유 없는 걷기가 바로 배회인데, 그렇게 하다가는 우리 학생들이 모두 파출소에 붙잡혀 가는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닌가? 한편으로는 웃음이 킥킥 터져 나왔다. 이 현수막의 폭력성은 빈둥거리는 일이야말로 시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거꾸로 입증하고 있으니까.
그러니 시가 오지 않으면 아등바등 시를 찾아 나서지 마라. 그냥 놀아라. 빈둥거려라. 시를 써서 무슨 이름을 얻겠다는 허영심을 버리고, 시가 실패할지 모른다고 초조해하지도 마라. 소나기가 내려도 마당에 널어놓은 고추를 치우러 허겁지겁 뛰어나가지 말 것이며, 개수대에 설거지 할 그릇들이 산처럼 쌓여 있어도 잊어버려라.
시를 쓰다가 슬럼프에 빠지면 어떻게 해결하나 물어보지 마라. 시를 한 편 한 편 쓸 때마다 슬럼프인 것이니 시를 쓰는 사람에게는 별도의 슬럼프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정말 시를 쓰고 싶거든 슬럼프마저 사랑하고 즐길 도리밖에 없다. 스스로 슬럼프에 빠졌다고 생각되거든 승용차를 버리고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보라.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이곳저곳 일없이 기웃거려라. 바다로 가거든 휴대전화를 물 속에다 던져버려라. 저녁이 찾아오면 전등을 켜지 말고 어둠 속에서 어둠과 한 몸이 되어 보라.
<허영심 버리고 초조해 하지도 말기를>
<슬럼프마저 사랑하고 즐길 도리일 뿐>
위선환 시인은 30년 간 시를 끊었다가 근래에 빛나는 시를 생산해내고 있는 분이다. 그 시간 동안 시를 ‘방치’한 것이다. 다시 시를 쓰면서 그는 주로 걸으면서 시를 생각했다고 한다. “시를 다시 쓰면서부터는 신문을 끊었고 티브이를 거의 끊었고 외출을 거의 끊었다. 내가 문 밖으로 나오는 것은 아침저녁 아파트 옆 구릉 위로 난 산책로를 걷는 때로 거의 한정되어 있었다. 그 길을 걸으면서 시를 생각하고, 머릿속에다 집을 짓듯 시를 짓고, 지은 시를 외우며 돌아와서는 외워온 시를 입력하고, 한밤중에도 일어나 앉아 시를 고쳐 쓰곤 했었다.” (<현대시> 2008년 5월호)
빈둥거리며 걷다가 보면 운 좋게 이런 풍경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김종삼의 <묵화(墨畵)>다. 이 시의 앞 두 줄을 이렇게 바꾸어 읽어본다.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가 손을 얹었다.” 피동접미사 ‘히’를 빼고 나면 시의 호흡이 별안간 빨라진다. 할머니의 손길이 소 목덜미까지 가 닿는 시간도 빨라진다. 그렇게 되면 소를 쓰다듬는 할머니 손길의 경건함도 지긋한 사랑의 느낌도 사라지고 만다. 시가 여유를 놓치는 순간이다.
능동적인 생각과 행동만이 우대 받는 세상을 우리는 통과해왔다. 느림이나 게으름 따위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악성 종양처럼 알고 지냈다. 학교의 선생님도 집안의 부모도 우리에게 좀 더 빨리, 좀 더 높은 곳으로 가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래야만 행복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하지만 지금, 소 목덜미에 손을 얹는 할머니는 얼마나 낮은 곳에 살고 있는가. 우리는 할머니가 얼마나 천천히 부엌에서 걸어 나왔는지, 얼마나 느리게 소한테 여물을 갖다 주었는지, 소가 여물을 우물거리는 동안 얼마나 그윽하게 소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다 안다. 그리고 소와 함께 무엇을 하며 하루를 보냈는지도 충분히 안다.
저녁 무렵, 할머니에게 이미 소는 집에서 기르는 가축이 아니다. 서로의 아픔과 외로움을 들여다볼 줄 알고, 서로를 쓰다듬어줄 수 있는 동병상련의 관계다. 비록 여섯 줄밖에 안 되는 짧은 시이지만, 행간과 행간 사이에 여백은 무한하고, 시행은 끝났건만 마지막 쉼표는 소와 할머니의 상처와 그 둘 사이의 적막이 오래 지속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적막을 사랑하라. 적막에 사로잡힌 적막의 포로가 되라. “풀숲에 호박이 눌러앉아 살다 간 자리같이/ 그 자리에 둥그렇게 모여든 물기같이/ 거기에다 제 얼굴을 가만히 대보는 낮달과도 같이”(졸시 <적막> 전문)
적막 속에서 빈둥거리다가 보면 문득 소란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그렇다고 세상의 소란 속으로 단번에 뛰어들지 말고, 가능하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라. 그러다 보면 시를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시간이 찾아올 것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을 알면서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 시인이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주체하기 힘든 표현 욕구를 옛사람들은 ‘기양(技양)’이란 말로 표현했다. ‘양’이란 가려움증을 말한다. 아무리 긁어도 긁어지지 않는 가려움이 있다. 이런 가려움은 어떤 연고나 내복약으로도 고칠 수 없다.”(정민, <한시미학산책>)
안도현 (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관심있는 것들/문학의 갈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