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생명으로 들어가보는 거야 / 안도현
10. 제발 삼겹살 좀 뒤집어라
크레파스 덮개를 열어보면 그 아이가 그림을 잘 그리는지 못 그리는지를 단박에 알 수 있다. 그림을 잘 못 그리는 아이는 하늘을 그릴 때 하늘색만 쓰고, 나뭇가지를 그릴 때 고동색만 쓰고, 나뭇잎을 그릴 때 녹색만 쓰고, 사람의 얼굴을 그릴 때 ‘살색’만 쓴다. 그래서 크레파스의 길이가 들쭉날쭉 고르지 않다. 이에 비해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는 대체로 크레파스의 키가 가지런하다. 색깔을 어떻게 배합해야 사물의 실제에 가까운 색이 나오는지 아는 것이다.
묘사의 일차적인 목적은 사물이나 풍경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다. 표현의 사실성은 묘사를 통해 획득된다. 여기 한 그루의 나무가 있다. 햇빛의 양과 각도에 따라서 나뭇잎은 감청색·청록색·녹색·연두색·노란색 등 다양한 색깔로 나타난다. 색깔을 사실적으로 구분할 줄 아는 힘은 역시 관찰에서 나온다.
나는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단순히 그 음식의 냄새를 맡고 혀로 맛보는 것으로 음식을 다 알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먼저 그 음식에 어떤 재료가 들어갔는지 곰곰 따져본다. 아무리 궁리해 봐도 모르면 음식점 주인의 옷자락을 잡고 물어본다. 그리고 음식의 재료가 어떤 순서로 조리되었는지 생각해본다. 즉 음식을 나름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이 음식을 만들어줘야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관찰한 것을 잘 기억해야만 음식을 원래의 맛에 가깝게 재생할 수 있다. 시란 내가 먹어본 맛난 음식, 내가 바라본 멋진 풍경을 언어로 재현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맛있는 음식 곰곰 따져봐야>
<언어의 연필로 그릴 수 있어>
이때 기억은 시의 중요한 질료가 된다. 삼겹살을 구울 때 고기가 익기를 기다리며 젓가락만 들고 있는 사람은 삼겹살의 맛과 냄새만 기억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고기를 불판 위에 얹고, 타지 않게 뒤집고, 가스레인지의 불꽃을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은 더 많은 경험을 한 덕분에 더 많은 기억을 소유하게 된다. 그런 사람이 시인이다. 그러니 삼겹살을 먹게 되거든 제발 고기 좀 뒤집어라.
당신이 들길에서 낯선 들꽃을 만났다고 치자. 우선 그 꽃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동행하는 사람에게 물어보거나 집에 돌아가 식물도감을 뒤적여야 한다. 관찰의 목적은 다르지만 시인의 관찰은 과학자의 관찰에 버금가는 것이어야 한다. 당신은 식물도감과 조류도감과 곤충도감 들을 옆에 끼고 살아라. 어떤 생명의 이름을 알게 되면 그 생명을 함부로 대하지 않게 되고, 그 생명의 존재 속으로 들어가 보려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리고 묘사는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할 수도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와 냄새는 오로지 묘사를 통해서만 언어로 그릴 수 있다. 장미 꽃잎이 열릴 때 나는 소리, 단풍이 햇볕에 빨갛게 물드는 소리, 배고플 때 맡는 짜장면 냄새, 감나무에서 우는 매미소리가 내 귓가에 닿기까지의 길, 나비가 날개를 너울거리며 날아가는 허공의 길을 언어의 연필로 그리는 게 묘사다.
또한 묘사는 개념을 해체한다. 밤은 어둡다, 여름은 덥다, 꽃은 아름답다, 개나리는 노랗다와 같은 문장은 고정관념이 만든 개념적 표현이다. 묘사는 개념을 구체화하거나 해체하는 데 기여한다. 예를 들면 ‘시장에는 여러 가지 채소가 많다’고 쓰면 죽은 문장이다. ‘가락시장에는 배추, 시금치, 상추가 많다’고 쓰기 시작해야 문장에 조금이라도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신석정의 시 <작은 짐승>을 읽으며 묘사가 어떻게 한 편의 시를 열고 닫는지 살펴보자.
난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난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난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가는
붉은 산호와 흰 대리석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빛 섬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지러지게
흩날리는 느티나무 잎새가
난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난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에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순하디순한 작은 짐승이었다.
이 시의 1연은 시적 화자가 머물러 있는 곳의 위치와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담담하게 제시한다. ‘좋았다’ ‘푸르렀다’라는 직접적 어법의 두 서술어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행위에 일체의 가식이나 허황한 포즈가 내재되어 있지 않음을 암시한다. 바다와 화자 사이에는 나무들이 서 있다. 여기에서 시인은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라고 나무들의 이름을 한 행씩 처리해 배치하였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하고 흔한 나무 이름을 이렇게 행을 나눠 쓴 이유는 무엇일까? 화자가 머무르고 있는 산에 이러한 나무들이 자란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나무들은 뒤에 나오는 ‘다문다문’이라는 부사의 도움을 받아 촘촘한 간격으로 서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독자들은 한 행씩 처리한 이 나무 이름을 보며 나무들이 바다를 향하고 있는 두 사람의 시선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화자의 마음 상태가 현재 지극히 평온하다는 것도 눈치 채게 된다. 묘사의 묘미가 시작되는 부분이다.
<비가시적인 것 가시화하고
‘관념’을 구체화해 표현하라>
시인이 특별한 장식이나 화려한 수사를 동원하지 않았는데도 단순하고 평범한 나무 이름 몇 개로 우리는 시가 제시하는 정황을 어렵지 않게 머릿속에 그릴 수 있는 것이다. 묘사의 힘이다.
그런데 난이와 나는 왜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까? 2연은 그 궁금증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통사 구조상 1연의 반복과 발전 단계인 2연에서 시의 표제이기도 하면서 이 시의 의미를 푸는 키워드인 ‘작은 짐승’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짐승은 시에서 종종 본원적 생명을 갈구하는 존재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길들여지지 않은 야성, 인간의 문명과 대척을 이루는 지점에서 생을 영위하는 존재가 짐승이다.
여기서는 날뛰고 포효하는 사나운 짐승이 아니라 ‘작은’ 짐승이라는 점에 주목하자. ‘작은’ 이라는 형용사로 인해 짐승은 원래의 상징적 의미보다 훨씬 순화된 성격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바다를 앞에 두고 난이와 작은 짐승처럼 앉아 있는 까닭은 복잡한 삶의 정황이나 들끓는 현실에서 한발자국 물러나 있다는 것이다. 격정의 바다가 말없이 평온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난이와 나도 말없이 앉아 있음으로 해서 바다와 일체를 이루려고 한다.
3연에서는 풍경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가 비교적 화려하게 등장한다. 그래서 3연은 시에 아연 활기를 불어넣으며 흐름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데 기여한다. 화자의 호흡은 길어지고, 이제까지 원경을 비추던 시의 카메라는 ‘난이의 머리칼’로 클로즈업된다. ‘붉은 산호와 흰 대리석 층층계’는 구름이 변화하는 모양을 시각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그 속을 거닌다는 것은 현실 너머에 있는 환상의 세계로 빠져 들어가고 싶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야만 ‘청자기빛 섬을 어루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 너머의 환상적 세계를 바라보는 일이 현실에서 발을 빼고 싶은 의도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인지 한번 의문을 가져볼 법하다.
“망국의 백성으로 짓밟힐 대로 짓밟힌 당시의 우리는 차라리 한 마리 짐승으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탄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역시 자연의 일부로 존재하면서 미쳐서 날뛰는 일제를 되도록 멀리하고 싶었던 고달픈 작가의 심정을 읽어주었다면 이 시가 지닌 정신에 접근한 독자라고 나는 생각한다.”
<상처 입은 작은 역정의 회고>라는 자작시 해설 형식의 글에서 시인은 ‘작은 짐승’을 두고 이렇게 속내를 비친 바 있다. 시인은 ‘작은 짐승처럼 말없이 앉아서’ 구름 속을 거니는 꿈이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현실과의 거리 두기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가슴속에 쌓인 울혈을 침묵과 관조로 풀어보려는 시로 해석할 수 있다.
바다에서 구름으로 이동했던 화자의 시선이 다시 지상의 느티나무로 옮겨오는 것은 그래서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느티나무 잎새가/ 난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바라보는 장면은 이 시의 절정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느티나무 잎새가 머리카락에 붙음으로 해서 난이는 자연스럽게 느티나무와 한 몸이 된다. 난이와 느티나무의 연결은 ‘난이=느티나무=작은 짐승’이라는 등식을 만들어내기에 충분한 것이다.
안도현 (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관심있는 것들 > 문학의 갈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도현 시창작론12 (0) | 2008.08.14 |
---|---|
안도현 시창작론11 (0) | 2008.08.14 |
안도현 시창작론9 (0) | 2008.08.14 |
안도현 시창작론8 (0) | 2008.08.14 |
안도현 시창작론7 (0) | 2008.08.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