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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있는 것들/문학의 갈피

안도현 시창작론9

by 광적 2008. 8. 14.
 

허리 낮춰 들여다봐 달개비 속에 뭐가 보이나 / 안도현



9. 감정을 쏟아 붓지 말고 감정을 묘사하라


학교에서 시를 공부하면 할수록 왜 시와 멀어지는 것일까? 시를 왜 어렵고 모호하고 복잡하고 이상한 물건으로 여기게 될까? 혹시 교과서가 시에 대해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교과서에서는 시를 이렇게 정의한다. ‘시는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로 표현한 글’이라고.

나는 이 케케묵은 사전적인 정의를 대폭 수정하거나 폐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의 내용을 이룬다는 ‘인간의 사상과 감정’이라는 용어는 지나치게 포괄적이고 애매하다. 이 말을 ‘사람의 생각과 느낌’으로 순화시켜 읽어도 마찬가지다. 또한 시 아닌 다른 문학 장르에서는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다루지 않는가, 하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함축과 운율’이 시의 형식적 특성을 드러내는 용어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우리 시는 운율적 결속력이 대단히 미미해서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운율을 따지는 게 난처할 때가 많다. 한 비평가는 시의 함축성보다는 오히려 시가 비유적인 표현이라는 점을 뚜렷이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긴 이야기를 짧게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비유적인 표현의 사용”이 시의 특성에 가깝다는 말이다.(이남호, <교과서에 실린 문학작품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현대문학) 매우 정확하고 적절한 의견이다.


<함축보다는 비유가 중요>
<과장·감상·현학 배척하고>
<나 대신 사물이 얘기하게>


시를 느끼고 이해하려는 사람뿐만 아니라 창작자도 시의 사전적인 정의에 갇혀 있으면 좋은 시를 쓸 수 없다. 인간의 사상을 한 자루의 펜으로 표현하겠다고 대드는 일은 무모할 뿐이다. 한 편의 시가 인간의 사상적 체계에 관여하고 거기에 기여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사상을 해설하거나 추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특히 시가 단순히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감정과 유사한 용어인 감성·정서·느낌을 종이 위에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감정을 드러내고 쏟아 붓는 일은 시작법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이다. 슬프다거나, 기쁘다거나, 당신이 보고 싶다거나, 풍경이 아름답다거나 하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우리는 ‘고백’이나 ‘넋두리’ 혹은 ‘하소연’이라고 부른다. 그런 것들이 시의 일부분이 될 수는 있어도 시의 모든 것은 아니다.

시가 고백적 양식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범하기 쉬운 게 세 가지가 있다. 당신은 시를 쓰기에 앞서 우선적으로 이것들을 과감하게 배척해야 한다. 첫 번째는 과장이다. 제발 시를 쓸 때만 그리운 척하지 마라. 혼자서 외로운 척하지 마라. 당신만 아름다운 것을 다 본 척하지 마라. 모든 것을 낭만으로 색칠하지 마라. 그런 것들은 우습다. 두 번째는 감상이다. 이 세상의 모든 슬픔을 혼자 짊어진 척하지 마라. 아프지도 않은데 아픈 척하지 마라. 눈물 흘릴 일 하나 없는데 질질 짜지 마라. 그런 것들은 역겹다. 세 번째는 현학이다. 무엇이든 다 아는 척, 유식한 척하지 마라. 철학과 종교와 사상을 들먹이지 마라. 기이한 시어를 주워와 자랑하지 마라. 시에다 제발 각주 좀 달지 마라. 그런 것들은 느끼하다.

자신에게 감정을 고백하고 싶으면 일기에 쓰면 된다. 특정한 상대에게 감정을 고백하고 싶으면 편지에 쓰면 그만이다. 시는 감정의 배설물이 아니라 감정의 정화조다. 속에서 터져 나오려는 감정을 억누르고 여과시키는 일이 바로 시인의 몫이다. “시란 개인적인 욕망에서 이루어지는 욕망의 발산 형식이 아니라 개인적인 ‘나’의 욕망을 억제하고, ‘나’의 욕망 가운데 가치 있는 어떤 경험을 선택하고 객관화하는 작업을 통해서 남과 다른 세계를 유형화해 보여주는 의도적 행위이다.”(오규원, <현대시작법>, 문학과지성사)

“내가 내 감정을 말하지 않아도 사물이 대신 이야기해 준다”고 눈에 번쩍 뜨이는 말을 해준 이는 연암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감정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물이 하는 이야기를 받아 적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시인의 받아 적기는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감정을 언어화하는 이 과정을 ‘묘사’라고 한다. 그러니까 묘사란 감정을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언어로 그려내는 것이다. 시인이 묘사한 언어를 보고 독자는 머릿속에 어떤 그림을 그리게 되고, 그 그림을 이미지라고 한다.


<묘사는 본질에 이르는 관문>
<대상과 일정한 ‘거리 유지'>
<하고 싶은 말 참을 줄 알아야>


시를 쓰는 사람이 묘사의 중요성을 모른다면 마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미술에서 데생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모르는 것과 같다. 두 말 할 것도 없이 묘사는 관찰에서 시작된다. 관찰하기 위해서는 허리를 낮추거나 무릎을 구부릴 줄 알아야 한다. 옛 시인들이 산정에 올라 천하를 둘러보며 호연지기를 노래했던 일은 감정의 움직임에 충실한 것이었다. 현대의 시인들은 그걸 따라 흉내내면 안 된다. 산에 오르기 전에 눈에 띄는 식물들을 자세히 들여다봐야 하고, 귀에 들리는 새소리를 언어의 그림으로 그릴 준비를 해야 한다.

혹시 들길을 걷다가 당신은 달개비 꽃잎 속에 코끼리가 한 마리 들어앉아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달개비 떼 앞에 쭈그리고 앉아/ 꽃 하나하나를 들여다본다/ 이 세상 어느 코끼리 이보다도 하얗고/ 이쁘게 끝이 살짝 말린 수술/ 둘이 상아처럼 뻗쳐 있다.”(황동규, <풍장 58> 중에서) 나도 이 시를 읽고 실제로 달개비를 찾아 꽃잎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랬더니 정말 달개비 꽃잎 속에는 코끼리가 들어 있었다! (믿어지지 않으면 허리를 낮추고 가만히 달개비 꽃잎 속을 한 번 들여다보라.) 이 구절 때문에, 한 발 늦었다는 자괴감 때문에 나는 요즈음도 꽃잎을 보면 무조건 오래 들여다본다.

어떤 시가 언어예술로서의 기본적인 꼴을 갖추었는가의 여부도 묘사의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물에 대한 묘사 능력으로 시의 품격을 판단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묘사는 시쓰기의 출발이면서, 또한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세상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자가 아니라, 세상을 세밀하게 그리는 자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을 최대한 정확하고, 절실하게 언어로 그릴 책임이 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까발려 드러내면 시가 추해진다. 내 마음을 최대한 정성을 들여 그려서 보여주기, 그게 시다.

다음은 조선 후기 한욱(韓旭)이라는 시인이 쓴 한시다. (정양·부사회 공역, <한국 리얼리즘 한시의 이해>, 새문사)

① 小築依山似鶴巢 산등에 붙은 오막살이 까치둥지 같다

② 荒籬生色鑽春梢 그래도 울타리에는 가지마다 봄꽃이 곱다

③ 東風似惜吾蘆弊 집이 너무 헐어서 바람도 딱하게 여기나 보다

④ ?送飛花覆破茅 꽃이파리 휘몰아다가 낡은 지붕을 깁는다

서정시에서 흔히 자아가 대상에 스며드는 것을 ‘동화’ 혹은 ‘감정이입’이라고 하고, 거꾸로 어떤 대상한테 자아를 맡기고 비춰보는 것을 ‘의탁’ ‘투사’ 혹은 ‘투영’이라고 한다. 주체와 객체의 동일시라는 전통적인 서정시의 문법이 여기에서 발생한다. 이 시에서 ①과 ②는 자아가 풍경에 동화되는 순간을 제시한다. 이에 비해 ③과 ④는 자아의 감정을 바람에 의탁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산등성이 오막살이집의 낡은 지붕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화자의 심정을 바람이라는 자연현상에 투사하고 있는 것이다. 애처롭고 딱한 감정(惜)을 단순히 토로하는 게 아니라 꽃잎이 낡은 지붕을 덮는 객관화된 풍경과 동일시하는 이 기법은 묘사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묘사는 무엇보다 구체적 형상화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시에서 구체성은 감동의 원천이고, 삶의 생생한 근거이기 때문이다.

“대나무를 그리는 자는 반드시 완성된 대나무의 모습이 가슴속에 있어야 한다”는 중국의 시론이 있다. 본질을 그리기 위해서는 묘사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바꾸어 읽어도 좋을 것이다. 시에서 묘사에 충실해야 하는 이유는 대상의 현상을 생생하게 그리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 묘사의 생생함이 대상의 본질에 이르는 관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묘사는 시의 화자인 ‘나’를 객관화하는 데 기여하는 형상화 방식이므로 묘사를 통해 대상과 시적 화자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된다.

시로써 말할 수 있는 게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묘사 한 줄 없이 자기 뱃속에 든 것을 줄줄이 쏟아 놓기만 하는 시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얼마나 말을 하고 싶었으면 시라는 형식을 빌려 일방적인 고백을 할까 싶기도 하지만, 시의 옷을 입고 이리저리 시달리는 그 언어는 또 얼마나 몸이 아플 것인가. 말을 하고 싶어도 참을 줄 알고, 노래를 시켜도 한 번쯤은 뒤로 뺄 줄 아는 자가 시인일진대, 어두운 노래방에서 혼자만 마이크를 잡고 있는 시인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안도현 (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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