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신춘을 분석한다(시조)
정형 속의 신선함 그리고 새로움
-2008년 신춘문예 당선 시조 읽기-
전 연 희
신춘문예의 열기를 재론한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다. 신년벽두에 신문 지상에 내려꽂히는 뜨거운 응시는 신춘문예 당선자만의 눈길이 아니다. 무어니 해도 이 길을 통해 우수한 작품이 창작, 발표되고 저력 있는 신인이 하루아침에 부각되기도 하여 응모하는 이나 지켜보는 이나 여기에 함께 뜨거운 관심을 쏟게 마련이다.
문학자로 등단을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신춘문예를 통한 눈부신 등단은 문학에 뜻을 둔 많은 이들의 동경이 될 수밖에 없다. 왜 아니겠는가.
불면의 여러 밤을 고뇌하던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넘어 새해 새날 새벽 거센 풍랑을 헤치고 바다 저편에서 해처럼 떠오른 당선의 벅찬 보람과 감격이라니. 하루아침에 지면을 강타하여 문학에 뜻을 둔 모든 이들의 시선을 끌어 모은 그 성취감이라니. 그리하여 수많은 문학도들은 끝없는 도전의식으로 치열한 문학과의 즐거운 투쟁을 감수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때 급부상하여 조명을 받았던 신춘문예 당선작가들 중 지속적인 작품 활동을 보이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어 그 자질이 문제시될 때도 있지만 훨씬 더 많게 신춘문예 당선 작가들이 선명한 내용과 새로움으로 문단의 중요한 자리를 지키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시조는 정형 때문에 단아하고 아름다운 글이다. 정형 때문에 더욱 함축적이고 내용이 샘처럼 맑고 깊다. 전통성과 역사성이 있어 더욱 소중하다. 시대에 맞도록 계승, 발전되어야 함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정형 때문에 짓기 어렵다고 한다. 정형 때문에 그게 그것처럼 비슷하다고 한다.
전통성과 역사성 때문에 오히려 예스럽고 고리타분하다고도 한다. 시조도 변해야 한다고 한다. 신춘문예에 아예 시조를 취급하지 않는 신문사도 많다며 문학자들의 관심이 시조에 별로 없다고 한다. 앞에 언급된 말은 조금도 과장된 말이 아니다.
시조가 이 시점에 머물러 방황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책임이 있다. 이 책임은 우리나라 사람 모두에게 있다. 우리 문학자들에게 있다. 더 좋은 시조를 쓰지 못한 많은 시조시인에게 있다. 외래문화를 전통문화보다 무조건 더 멋진 것으로 치부하는 모든 이에게 있다. 시조를 홀대하여 교과서를 만든 이에게 있다. 소중한 민족정신은 외면하고 싸움만 하는 정치가에게 있다. 민족의 미래를 밝히지 못하는 역사가에게 있다. 아니다, 나라를 빼앗긴 과거의 아픈 역사에 있다.
아무튼 시조의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하기에 늦은 감이 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결코 늦지 않다. 시조에 대한 소중함을 깨달아 문학하는 이면 장르 구별 없이 누구나 시조를 지을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기본 자질이다. 아니 우리 국민이면 즐겨 부르고 지을 줄 알아야 한다. 우리 국민은 가락 속에서 고통과 한을 달래면서 여유와 멋을 알고 인정을 가졌었다. 아름다운 품성을 가졌었다. 그저 옛날로 가자는 것이 아니다. 민족 전통을 찾고 누리면서 잃어버린 뿌리를 찾아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바로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맥락에서도 시조는 소중한 문학이다. 그러므로 지면을 사로잡는 신춘문예를 통한 시조의 역할은 여러 가지로 그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2008년 신춘문예 시조 당선 작품을 살펴보고 참신한 창작 예술작품을 깊이 감상하면서 누구에게나 읽히고 불리어질 바람직한 시조의 앞날을 기대하며 정형 속의 신선함 그리고 새로움을 찾고 열어가는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1. 심사위원의 작품에 대한 관점
2008년도 벽두를 눈부시게 장식한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을 가려낸 심사위원들의 좋은 시조에 대한 생각을 몇 가지 간추려 보았다.
<새 아침의 언어가 신설처럼 차고 희다. 현대시조 100년을 넘어서면서 신인들이 내딛는 발걸음도 한결 더 빨라지고 있다. 시조가 신춘문예를 만나서 불꽃을 피우며 새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 -이근배 .한분순
<준거를 묵수만 하면 ‘현대’의 시조가 아니며, 지나치게 개척에만 치우치면 현대의 ‘시조’를 벗어난다. 두 요소를 조화시키는 일이 어렵기는 하지만, 동시에 계승과 창조라는 생명력의 본질에 이르는 소중한 작업> -장성진
<신춘문예의 벽을 오르기 위해 모국어의 틀 속에서 오늘의 삶을 깎고 다듬는 손길들이 섬세하고 맵차다> -이근배
<표피적 묘사를 넘어서서 대상의 본질적인 국면을 관통하려는 상상적 언어의 힘을 보여주는 일에 힘을 기울일 때 고유의 형식과 결합하여 보다 밀도 높은 언어 예술적 성취가 가능> -이정환
<언어 감각, 표현력, 이미지 처리 능력, 가락의 유연성, 연과 연 짜임의 필연성, 현실 문제의 조명과 현대시조의 나아갈 방향 제시> -전치탁. 정해송
<시조의 생명력은 개성과 정형적인 서정성에 있다. 참신한 제 목소리인가, 장章 의식, 각 수와의 구성도는 어떠한가> -김교한
<시조의 제한된 3장 6구의 짧은 형식에 촌철살인과 같은 절제되고 밀도 있는 시어 구성> -정인수
<시적 긴장감 유지, 시조라는 형식에 갇히지 않는 느낌, 신선함, 작자의 깨달음에 이르는 이미지 환치> -이우걸
위에서 보듯 시조는 무어라 해도 정형성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면서도 참신하고 개성 있는 목소리를 가져야 함은 물론이다. 진실한 삶을 여과한 유연한 가락과 유기적, 필연적인 구성, 형식과 내용이 어우러져 결합한 높은 언어 예술의 성취 등 심사위원들이 작품을 대하는 시각이 얼른 보면 각기 다르게 느껴지고 까다롭게 보이나 시조는 정형을 바탕으로 깎고 다듬어 형식과 내용이 조화롭게 이루어진 언어 창작물이라는 견해는 크게 다르지 않다.
때때로 신춘문예용 작품이라 하여 끼워 맞추듯 쓴 작품도 있지만 새로운 예술 창작을 위한 고심과 노력에 기성시인이나 신인이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신춘문예에의 도전에는 유달리 패기와 참신한 호흡이 넘치고 있어 문학을 애호하는 이들은 더할 수 없는 신선함으로 그 작품과 작가에게 매료되기도 한다.
2, 꿈틀거리는 시어, 살아있는 작품
꾸준히 창작 시조에 지면과 관심을 아끼지 않는 중앙일보는 신춘문예 방식을 바꾸어 연중에 신인문학상을 운영하고 있다. 연말에 원고마감을 주로 하는 타사와의 차별화이며 새로운 모색으로 좋은 작가, 작품을 발굴하겠다는 또 다른 의지로 보여 그 결실이 기대되는 바이다. 신춘문예의 범주에 넣어도 무관하리라 생각하며 지난 가을 신인 문학상 당선작을 살펴본다.
‘활’하고 무사처럼 차분히 발음하면
입 안의 뼈들이 벼린 날처럼 번뜩이고
사방은 시위 당겨져 끊어질 듯 팽팽하다
가만히 입천장에 감겨오는 혀처럼
부드럽게 긴장하는 단어의 마디마디
매복한 자객단처럼 숨죽인 채 호젓하다
쏠 준비를 하는 순간 모든 게 과녁이다
호흡 없던 장면들을 노루처럼 달리게 하는
활활활 타오르게 하는 날쌔고 깊은 울림
허공의 누군가가 ‘활’하고 발음 했는지
별빛이 벌써부터 새벽을 담 넘어가
내일로 촉을 세운 채 쏜살같이 내달린다
정상혁<활> 중앙일보
시조를 읽는 재미와 맛이 이렇게 크다니.
한 마디로 살아있다. 시상이 살아 있고 감각이 살아 있고, 이미지가 살아 있다.
<입 안의 뼈들이 벼린 날처럼 번뜩이고> 마디마디 꿈틀거리는 시어가 <시위 당겨져 끊어질 듯> 읽는 이로 하여금 긴장 속으로 몰아넣는다. 두려움의 긴장이 아닌 팽팽한 삶의 긴장, 즐거움, 신바람의 긴장이다.
첫째 수 초장의 완만함을 넘자마자 중장, 종장의 휘몰이가 팽팽한 시위를 당긴다. 이어 둘째 수 초장 또한 가만한 부드러움으로 운을 떼면 부드럽게 긴장하는 숨죽인 호젓함이 매복한다. 셋째 수의 활활활 타오르는 날쌔고 깊은 울림을 통과하면 넷째 수 <별빛이 벌써부터 새벽을 담 넘어가/ 내일로 촉을 세운 채 쏜살같이 내달린다> 마지막 맺는 자리에 이르러서야 작품을 읽는 이도 ‘활’하고 모았던 긴장을 비로소 풀게 된다.
심사평에서 <시적 발상이나 언어감각, 이미지 처리 능력이 뛰어나고 신선하다. ‘활’을 이만한 상상력과 조형력으로 그려내기란 쉽지 않다. ‘쏠 준비를 하는 동안 모든 게 과녁’이라는 자신의 시구를 보여줄 수 있는 시인의 길에 들어섰다>라고 말하지만 작가는 시조의 음악성을 십분 살리면서 각수의 유기적 짜임이나 그 표현에 얼마나 천착했는지 이 작품은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신인다운 패기와 도전정신, 참신함과 시적 에스프리가 조화로운 수작이다.
시조의 나아갈 바를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어 든든하고 반갑다.
윤오월 밑그림은 늘, 눅눅한 먹빛이다
노란 물감 풀린 들녘 이랑마다 눈부신데
그 많던 사이프러스 다 어디로 가 버렸나
소리가 죽은 귀엔 바람조차 머물지 않고
갸웃한 이젤 틈에 이따금 걸리는 햇살
더께 진 무채색 삶은 덧칠로도 감출 수 없네
폭풍이 오려는가, 무겁게 드리운 하늘
까마귀도 버거운지 몸 낮춰 날고 있다
화판 속 길은 세 줄기, 또 발목이 저려온다
모든 것이 떠나든 남든 내겐 아직 붓이 있고
하늘갓 지평 끝에 흰 구름 막을 걷을 때
비로소 소실점 너머 한뉘가 새로 열린다
임 채 성 < 까마귀가 나는 밀밭> 서울신문
-‘오베르’**에서 보내온 고흐의 편지
*빈센트 반 고흐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유화그림.
**오베르 쉬르 와즈:파리 북쪽의 시골마을.‘생레미’의 정신병원을 퇴원한 고흐가
약 두 달간 살다가 죽은 마지막 정착지로 그의 무덤이 있다
정형에 갇히어 딱딱하고 어색한 옷을 입는 표현이 유난히 시조에 많다. 그래서 시조는 어렵기도 하다. 이 어려운 면에 있어서 임채성은 시어를 풀고 놓는 솜씨가 일품이다.
<윤오월 밑그림은 늘, 눅눅한 먹빛이다> 첫째 수 초장에서 보듯 정형에 한 음절의 오차도 없이 들어맞는데도 자유롭게 느껴지는 것은 언어를 다루는 작가의 솜씨일 것이다. <비로소 소실점 너머 한뉘가 새로 열린다> 넷째 수 마무리 종장에서 역시 세련되고 매끄럽게 매듭을 맺고 있다. 시조가 널리 읽혀지고 보급되기 위해서는 정형 속에서 좀더 자유로운 가락과 시어로써 창작되어야 한다는 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자칫 시조의 절제미와 함축미를 놓칠 수 있어 이것 또한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시어를 풀어놓되 절제의 아름다움을 갖추지 않으면 비록 자수는 맞더라도 시조라고 할 수 없다. 서술하는 글이 자수만 일정하게 되풀이 한다고 어떻게 음률을 가질 수 있을까.
소재를 선택함에 있어 이 작품은 많은 위험성을 내재하고 있다. 어떤 인물이나 예술작품을 소재로 삼았을 때 사람의 생애나 작품 묘사에만 치중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시적화자인 ‘나'를 통해 고흐와 동일하게 치열한 창작세계를 통한 삶의 가치와 희망을 열어가는 작가의 모습이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즉 ‘나’는 고흐인 동시에 작가를 의도한다. 현재형의 시제를 통해 과거 속의 인물을 생생히 살려내고 있으며, 현재의 ‘나’와 과거의 ‘고흐’가 시간을 초월하여 오감으로써 고통을 승화한 작가의 예술 정신으로 함께 ‘한뉘를 새로 열고’ 있는 것이다. 만일 시간을 자연스럽게 넘나들지 못했다면 ‘고흐’의 단편적인 삶을 그리는 한계를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네 수의 시조를 나누지 않고 연결해서 쓴 점이다. 물론 시조의 새로운 모습을 위한 작가의 의도적 배치라고 생각하지만, 숨가쁜 전개일 뿐 작품 이해에나 시조의 절제미에나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
또한 ‘이랑마다 눈부신데’, ‘모든 것이 떠나든 남든 내겐 아직 붓이 있고’ 등의 상투적, 서술적 표현이 시 전체의 긴장감을 놓치게 한다. 참신한 시조를 위한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고 가장 적합한 표현을 위해 모름지기 시조작가는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고뇌와 땀방울 없이 전통적 정형성을 지키면서 자연스럽게 다듬어진 격조 있는 시조를 쉽게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살아 네 가슴에 푸르게 가 닿기 위해
어수선한 욕망의 깃발, 하나 둘 걷어내고
무저갱 아래로 아래로 조심 조심 내려간다
지상의 교만함도 지하의 비굴함도
기꺼이 마음 열어 함께 하고 싶었네
내 먼저 너를 만나서 큰 강이 되고 싶었네
이제 길을 열어 흘러가고 흘러오고
우리 서로 비우면 이토록 깊어지나
하늘과 땅이 맞닿아 한 몸으로 출렁인다
이남순 <마중물> 경남신문
*마중물-펌퍼로 물을 퍼 올릴 때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 먼저 윗구멍에 붓는 물
‘마중물’이라는 제목이 신선하다. ‘마중가는 물’, ‘마중하는 물’이라니, 유성음으로 이루어진 세 음절을 자꾸만 반복해서 불러본다. 소재를 찾아 건져내는 눈이 예사롭지 않다. 깊이, 신중히 작품을 다듬어가는 손길이 저 조각가의 예리한 날을 닮았다. 작품을 캐기 위해 조심스럽게 ‘무저갱 아래로 아래로’ 시선을 깊이 묻는다.
수돗물이 널리 보급되기 전에는 우물물을 긷거나 펌프질을 해서 물을 퍼 올려야 했다. 우물물을 긷는데 비해 펌프질은 한결 후련한 일이다. 그러나 처음 몇 번의 펌프질은 헛일이다. 이 때 마중물을 부으면 이윽고 콸콸 물이 솟아올랐다. 한 바가지의 물이면 되었다.
사실 마음을 여는 일은 작은 것에서부터이다. 우리의 마음은 매사에 움츠려 들어 상대방의 눈치를 기웃거릴 때가 많다. 옳은 일에도 망설이고 마땅히 해야 할 일에도 머뭇거리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내가 마중물로 마음을 연다면 어떤 일에서건 만남에서건 주저할 것이 없다. 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어수선한 욕망을 지우고 너에게 가 닿으면 길을 열어 흘러가고 흘러오는 깊고 푸른 세상. 단절은 뚫리고 분열은 아름다운 화합으로 돌아올 것이니, 마침내 우주가 합일하는 아름다운 세상이 거기 있으리라.
작은 소재를 통해서 깊고 큰 울림으로 번지는 작가의 넓은 마음과 이상이 상징적으로 잘 그려져 있다. 세 수의 유기적 구조, 자연스런 리듬, 소망을 그릴 때에는 서술형 어미 -네로, 동작을 그릴 때에는 현재형 어미 -ㄴ다로 구별하는 등 섬세한 마음을 깎고 다듬은 흔적이 생생하다. 무엇보다 시인의 따뜻하고 건강한 시선이 미덥다.
그러나 작은 소재에서 큰 세계로의 확대는 자칫 과장적이 되거나 시선이 고정적일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3. 현실 감각과 삶의 자세
1.
비정규직 가슴 속에 안개비가 내리는 밤
여의도길 전주 한켠 둥지 튼 황조롱이
옥탑방 살림살이가 긴병처럼 힘에 겹다
2.
산 능선 너럭바위에
건들바람 불러 모아
풋풋한 날개 저어
억새 탈춤에 신명나면
제일 큰 나무에 올라
흐벅진 몸 곧추세우던 너
3.
오늘은 밤섬에서
찢긴 비닐 비집고는
마포대교 어깨에 앉아
깃털 훌훌 털어내고
북악산 여름 숲으로
건듯 날아오르는구나
4.
순환선 철길 위를 에도는 내 발자국
휴대폰에 떠오르는 눈빛 모두 잠재우고
물소리 푸른 강가에서 시계 풀고 살고 싶다
김춘기 <서울 황조롱이> 국제신문
시조를 쓰는 태도가 진지하다 못해 경건하기까지 하다.
<서울 황조롱이>에는 온몸으로 살고 온몸으로 시를 쓰는 작가의 모습이 눈물처럼 번져 있다. 그러나 좌절하는 눈물은 아니다. 이 시대의 고달픈 삶을 대변하는 ‘서울 황조롱이’, 왜 하필 황조롱이인가. 그것도 서울 황조롱이.
실상 황조롱이는 스스로 둥지를 틀지 않는다. 새매나 말똥가리가 지어 놓은 둥지에 무상으로 살거나, 하천 흙벽이나 암벽 오목한 곳에 산다. 텃새로서 천연기념물로 대접받는 새이다. 이 시에서는 서울에 와서 일정한 일도 잡지 못하고 옥탑방에 세들어 사는 고달픈 삶을 대변하고 있다. 한때 유유히 하늘을 누리던 시절도 있었다. ‘제일 큰 나무에 흐벅진 몸을 곧추 세우던’ 옛날에 비해 ‘찢긴 비닐 비집고는’ ‘깃털 훌훌 털어내고’ ‘건듯 날아오르는’ 그래도 기상과 품위를 놓지 않는 황조롱이를 통해 끝내 좌절할 수 없는 경건한 삶을 본다.
황조롱이를 통한 감정이입은 쉽게 표출되고 말지만 ‘서울 황조롱이’에게는 작품 전체를 흐르는 품격이 있다.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닌 살아야 할 둥지를 찾고 마음을 비워내는 건전하고 튼튼한 삶의 자세이다. 그렇다. 돌아갈 아름다운 자연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모든 괴로움을 벗고 ‘물소리 푸른 강가’에 ‘나’는 돌아가리라고 작가는 소망한다.
군더더기 없이 잘 짜여진 작품이다. 소재 선택과 현실 문제, 황조롱이와 작중화자와의 일체감, 각 수의 유기적 구조와 절제된 시어사용 등 현대적 감각이 선명하고 시조가 나아갈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하겠다. 마치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오늘에 맞게 그려낸 듯하다.
앞서간 어머니의 가슴 아린 발자국 길
혼자서 더듬더듬 그믐밤 걸어간다
눈 내린 책갈피에도 무릎 꺾어 세우며
손끝에 힘을 모아 온몸으로 읽는 음절
어두운 마음속을 뇌문雷紋처럼 뻗어 와서
하나둘 놓는 징검돌 꽃이 되어 피는데
점자가 등불이라면 손끝은 눈동자인 것
애벌레 기어가듯 느릿한 보행 끝에
아득히 잔돌들 박힌 길 하나가 열려온다
이서원 <눈길을 걷다> 부산일보
‘잔돌들 박힌 길 하나’ 를 열기 위한 그의 보행은 ‘무릎 꺾어 세우며’ ‘온몸으로 읽는 음절’ ‘뇌문처럼 뻗어’ ‘하나둘 놓는 징검돌’ 등 시조를 지어온 길과 다름 아니다. 비록 어둡고 험한 길을 ‘애벌레 기어가듯 느릿한’ 보행으로 살아가지만 그의 걸음에는 힘이 넘치고 있다.
세 수의 긴밀한 짜임, 적절한 언어 배치, 아름다운 이미지가 있어 긴장감을 잃지 않고 시선을 한곳으로 집중시킨다. 혼자서 더듬어 가야만 하는 아득한 길이지만 힘들지 않게 사뿐히 어두운 눈길을 환하게 열어가는 것은 단단히 다져가는 삶의 자세, 성실한 창작의 자세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시어 하나도 함부로 다루지 않는 오랜 성실함으로 이루어낸 좋은 결실이다.
잇몸 다 드러내고 철썩이며 들먹인 어깨
얼마를 대끼고 대껴야 흰 뼈 되어 만날 건가
투명한 허물을 끌고 여기까지 흘러온 지금.
남은 상처 자투리를 누가 또 들여다보나
떠밀리고 넘어지다 등에 감긴 푸른 멍울
한걸음 이어달린 길, 그길 하나 밀고 와서.
낮은 데로 에돌아와 오랜 날 빗장 잠그고
옮겨 앉은 짭짤한 바다 거친 숨 몰아쉬면
바람결 다듬고 벼려 스스로 낮추는 키.
어디쯤 붙잡지 못한 잔별 죄 쏟아지고
햇빛 가득 그러모아 제 가슴에 피는 꽃들
몸 바꿔 떠나고 있나, 비탈진 세상을 향해.
연선옥 <염전에 들다> 경남일보
오늘도 서산댁은 낮은 바다 막고 선 채
뒤축의 무게로 새벽 수차를 돌린다
바람은 빈 가슴 지나 먼 바다를 일으키고
지친 오후 밀어내고 살풋 잠이 들자
잠귀 밝은 수평선 해류 따라 뒤척이며
뒤틀린 창고 이음새, 덴가슴도 삐걱인다
남편은 태풍 매미에 귀항하지 못했다
소금기 절은 목숨 몇 잔 술로 달랠 때
눈시울 노을로 번져 잦아드는 썰물빛
설움으로 풍화된 닻 말없이 내려두고
무명의 소금봉분, 메다 꽂힌 삽자루여
가슴엔 뱃고동 소리 야윈 달이 차오른다
김남규 <염전에서> 조선일보
공교롭게도 <염전에 들다>와 <염전에서>의 연선옥, 김남규는 같은 대학교 재학생이다.
같은 소재로 글을 쓴다는 것이 우연만이 아니다. 살고 있는 환경이나 방식 이 모든 것은 생각의 소재인 동시에 글의 소재이다.
연선옥은 소금처럼 짜고 힘든 삶을 아픈 시어로 그려내고 있다. ‘흰 뼈, 허물, 상처, 멍울, 빗장, 거친 숨, 비탈진 세상’ 등 작품 전체로 흐르는 것이 아직 삭지 못한 채 ‘떠밀리고 넘어지다’ ‘햇빛 가득 그러모아 제 가슴에 피는 꽃들’로 승화하지만 그 꽃은 소금꽃, 가슴에 아프고 따갑게 와 쓰리다.
작품을 그려내는 태도가 십자가를 진 듯, 시지프스의 돌을 져 나르듯 고통스럽다. 젊은이의 꺾이지 않는 도전정신으로 보인다. 쉽게 타협하지 않거나 아니면 안주하지 않고 달려가는 풋풋한 삶의 자세로 보여 미덥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기교가 지나치고 관념적인 표현이 많아 참신함을 잃고 있다.
김남규 <염전에서>는 <염전에 들다>에 대조적으로 서사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남편을 잃은 서산댁의 ‘바다를 막고 선’ 치열한 삶의 현장을 그려낸다. ‘바람은 빈 가슴 지나 먼 바다를 일으키고’, ‘ 잠귀 밝은 해류’, ‘설움으로 풍화된 닻’ 등 빼어난 글귀로 이루어져 있고 네 수가 소금밭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삶이 그럴듯하도록 짜여져 있지만 ‘나’ 없는 서술적인 삶은 공허한 울림으로 감동과는 거리가 있다.
다른 삶이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아니 일치하는 삶이어야 한다. 즉 제 목소리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시나 시조는 결코 이야기만일 수는 없다. 비록 다른 이들의 삶의 이야기일지라도 ‘나’를 관통하는 삶이어야 한다. 진실하고 온몸을 다한 치열한 시정신으로 살아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피상적으로, 묘사적으로 끝나고 말기 때문이다.
4. 신선함 그리고 새로움
광년을 달려와 빛이 된 투명한 새
망막에 앉은 기억, 때 늦은 아픈 고백
이른 봄
번갯불 튄 그대 스르르 한 점 불이었던
빅뱅의 환상이거나 눈부신 기록이었을
이별 뒤 하얀 여백 지울 수 없는 허공 같아
가락지
흰 원을 걸어 필생의 울음 가둔 걸까
수축하는 잔등, 달이 팽창하는 저 언덕
환각처럼 눈 속의 새 쪼그려 앉아있는데
우수수
눈망울 털어내면 겨울 그 후, 빈 고요
황성곤 <눈 속의 새> 대구매일신문
감각적이다. ‘번갯불 튄 그대’ ‘하얀 여백’ ‘흰 원을 걸어 필생의 울음 가둔’ ‘수축하는 잔등’ ‘달이 팽창하는’ ‘우수수’ ‘빈 고요’ 등 이미지로써 언어를 직조하는 솜씨가 세련되었다. 그만큼 사물에 대한 인식과 통찰이 깊고 그윽하며 노련하고 섬세한 세공으로 심미적 세계의 미세한 떨림까지 오묘하게 그려낸다.
정형을 들키지 않도록 은밀히 흔들면서 그러나 음보율은 맛깔나게 지키면서 시어를 풀었다 놓았다 희고 차가운 시각과 촉각을 오가며 맑고 순수한 겨울 정적 속으로 어느 새 마음을 들여앉힌다. 신선하고 참신한 눈 속의 새가 환상처럼 쪼그린다. ‘겨울 그 후, 빈 고요’ 모든 것이 일시에 끝나버린 듯한 정적. 새의 날갯짓도 그친 맑고 깨끗한 세상, 신선함, 마음까지 촉촉하게 젖는다.
이렇듯 감각적인 묘사에는 성공하고 있지만 ‘빅뱅의 환상’ ‘이별 뒤 하얀 여백 지울 수 없는 허공’ 같은 표현은 진부함을 벗어나기 어렵다. 세 수를 붙여 놓은 것 또한 수와 수를 끊어 읽는데 오히려 어려워 글을 이해하는데 장애를 일으킬 뿐이다. 시조 형식에 알맞게 다듬은 시어선택과 시적 배치 또한 시조쓰기에 있어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요 과제이다.
시조의 신선함이나 새로움은 시적으로 표현하거나 정형을 벗어나 보는 데에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조를 쓰는 많은 이들은 새로움과 변화를 주기 위해 앞의 방법을 종종 찾아 쓴다. 그렇다면 시조 대신 아예 시를 쓰고 말 일이다. 시인지 시조인지 정체모를 글에서 새로운 변화를 모색했다고 스스로는 생각하지만 이것은 시조를 버려놓는데 불과하다.
아무튼 시조가 시조다워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무어니 해도 시조를 시조답게 하는 감칠맛은 어디까지나 정형에 있다. 3장 6구, 일정한 자수, 음보가 반복되므로 리듬감이 생기고 음악적 가락이 발생하는 것이다. 여기에 절로 일어나는 흥이 있고 신명이 있다. 이 흥과 신명으로 인하여 예부터 우리 민족은 슬픔과 고통을 여과할 수 있었다. 이 속에 담아낸 여유로운 말과 생각이 한결 삶을 아름답게 해 주었다. 아니 견뎌낼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후부터인지, 바깥의 제도나 방식을 무분별하게 들여와서부터인지 무섭게 변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다. 하나 예로 교육 현장이 변해가는 모습을 들 수 있겠다. 절제와 통제가 자율이란 미명아래 무너진 현실을 염려와 우려로 지켜볼 뿐 거의 방관하고 있는 실정이다. 여러 가지로 잃어버린 것에 대해 꼼꼼히 살펴보아야 할 때이다. 소중한 전통을 찾아 미래를 밝게 비쳐내야 할 때이다. 그 한 방편이 시조를 찾고 지어 부르는 일이다. 쉽고 참신한 음악적 가락이 흐르는 다듬어진 글, 시조 말이다.
신춘문예용 작품이라는 말이 있다. 뜻이 심오하고 형식에 변화를 만드는 실험용 작품의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특히 시조에는 이런 경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바이지만 이를 무조건 도외시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변화도 좋고 실험정신도 좋다. 그러나 시조는 쉬워야 한다. 깊이가 있으면서도 지나치게 무겁지 않고, 어렵지 않은데 격조가 있으며 생각과 표현이 참신해야 한다. 누구나 공감하면서 가까이 선뜻 다가갈 수 있는 노래여야 한다. 참신함으로, 경이로움으로 짓고 다듬어져야 시조는 살아날 수 있다. 시조의 새로움이란 결코 정형의 이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교도 아니다. 과장된 기교는 오히려 작품을 그르칠 뿐이다. 진실한 마음과 정형과의 조화로운 만남으로 자연스럽게 다듬어진 시조에는 내용과 형식이 완벽할 정도로 어우러진 아름다움이 있다.
어려운 관문을 통한 신춘문예 당선자들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억지로 만들고 지어낸 노래가 아닌, 열매가 저절로 익어 번 우리 정서에 들어맞는 좋은 시조를 쓸 것을 기대한다.
전 연 희 <시조문학 천료> 부산시조시인협회 부회장, 신라중학교교장
시조집 <숲 가까이 산다네> 등
<출처: 부산광역시 문인협회>
'관심있는 것들 > 문학의 갈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더기의 삶 그러나 눈부신 순간 / 안도현 (0) | 2008.09.24 |
---|---|
시조의 보법에 담긴 인상적인 풍경에 대한 단상/ 추창호 시인 (0) | 2008.09.21 |
[스크랩] 한국 문학의 4대 비극/이승하 (0) | 2008.09.20 |
시인 안도현 ‘신춘문예와 나, 그리고 예비작가들을 위하여’ (0) | 2008.09.03 |
김용택 시인의 마지막 수업 (0) | 2008.08.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