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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있는 것들/문학의 갈피

시조의 보법에 담긴 인상적인 풍경에 대한 단상/ 추창호 시인

by 광적 2008. 9. 21.

시조의 보법에 담긴 인상적인 풍경에 대한 단상/ 추창호 시인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갖는다. 그 동안 읽기를 미뤄온 시조집을 읽어본다. 사물을 바라보는 저 다양한 눈빛들. 엘리옷의 “위대한 시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 쓰면서 동시에 자기 시대를 그린다.”는 말이 실감난다. 시조의 정형에 담긴 이 아름다움을 어찌 나만 두고 볼 것인가. 내가 읽은 인상적인 작품이 보여준 풍경을 따라 길을 떠난다.

 

예전에,

예전에, 뇌며

꿈꾸는 보리밭에

세상에,

세상에, 뇌다

열 오른 툇마루 앞에

넉넉히 함박눈 오시네,

붉은 빛 벙근

하얀

아침.

 

- 송선영시인의 「院村里의 눈」전문 (시조집 ‘쓸쓸한 절창’)

 

  꿈꾸는 보리밭에서 열 오른 툇마루까지 흐른 세월을 생각해 보라. 어찌 간단한 세월일 수 있을까. 그런데도 시인이 안내하는 상상의 공간으로 타임머신을 타듯 쉽게 오고갈 수 있는 건 함축과 절제라는 시조의 정형이 갖고 있는 매력 때문이리라. ‘세상에,/ 세상에, 뇌다’에서 볼 수 있듯이 삭막하고 험악하게 변한 세태를 넉넉한 함박눈으로 치환하여 ‘붉은 빛 벙근/ 하얀/ 아침’으로 읽는 시인의 메시지에서 희망찬 내일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격으로 치면 단아한 선비의 품격을 가진 시다.

 

생면부지도

집 지으면 한골목 권솔이 되어

배추는 버러지 키우고

나비는 배추꽃 어루고

징그런 목숨이 없다

껴안고 살아간다

겨워도 죽는 날까지 서로서로 돌보겠노라

목숨과 목숨끼리 반지를 나눠 낀 듯

길마다 옥시글옥시글

이야기 새끼를 친다

 

- 서연정시인의 「다정한 골목」전문 (시조집 ‘무엇이 들어 있을까’)

 

  어릴 적 토담 사이로 건네던 수다와 인정이 절로 떠올라 웃음을 짓게 한다. ‘배추는 버러지 키우고/ 나비는 배추꽃 어루고’ 살아가는 세상은 껴안음의 세계이다. 껴안음의 세계에 살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길마다 옥시글옥시글’ 살아가는 그런 골목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진다. 여타 시조와는 달리 첫 수는 장별로 연을 나누고, 둘째 수는 초, 중장을 묶고 종장은 따로 떼어 연을 나누고 있다. 골목의 모습을 형상화하려는 나름대로의 목적을 갖고 이런 배행을 하였다는 시인의 말을 통해 좋은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각고의 정성을 기울이는 시인의 고뇌를 알겠다.

 

파도가 내었을까, 제주시 해안도로

하늘길, 바닷길로

강씨, 문씨 날아와서

털머위 꽃대궁 같은 포구하나 열었다

아버지도 4·3 땅 피를 물려 받으셨나

셋째형 그 이름을 홧술잔에 띄워놓고

당신의 콩팥으로는

걸러낼 수 없던 일엽

그래, 이 그리움을 무엇으로 거를까

신장 투석하듯

숨골 따라 거슬러 온 파도

신제주 관통한 내력 몰래물은 알고 있다

이제 가난한 몸, 집어등이 되고싶다

볏짚에 묻힌 재로 갈피갈피 닦아내면

밤바다 허락도 없이

별자리를 놓는다

 

- 문순자시인의 「사수포구·1」전문 (시조집 ‘파랑주의보’)

 

  가족사를 통해 우리 현대사의 비극인 4·3 사건을 재조명하고 있다. ‘셋째형 그 이름을 홧술잔에 띄워놓고/ 당신의 콩팥으로는/ 걸러낼 수 없던 일엽’으로 육화된 4·3 사건의 아픔은 어쩌면 치유될 수 없는 아픔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인은 간절한 기구로 비극적인 아픔과 한을 볏짚에 묻힌 재로 갈피갈피 닦아내며 승화된 삶을 상징하는 별자리를 놓는 건지 모른다. 이제 4·3 사건을 교훈으로 삼기는 하되 참회와 용서를 통해 그 아픔과 한이 극복되길 간절히 바래본다. 시대의 아픔을 간과하지 않는 시인의 깨어있는 건강한 시정신이 아름답다.

 

허기진 세월 앞에 그 넓던 뜰 다 내주고

마루턱에 걸터앉아 가슴에 품을 듯이

흙물 든 손톱 끝만큼 반 평 남짓 일군 꽃밭.

어머닌 기다림처럼 모란을 심으셨다

한 생을 다독이며 살아오신 그 손길로

북받친 한을 삼키듯 꾹꾹 눌러 심으셨다.

그 가슴속 지난 내력도 어슴푸레 이젠 먼 산

무거운 짐을 부리듯 손을 털고 돌아서신

봄 햇살 아우는 뜰엔 무심함만 가득하다.

 

- 유권재시인의 「어머니의 뜰」전문 (시조집 ‘때로는 하루도 길다’)

 

  전형적인 우리의 어머니상이 떠오른다. 황톳빛 가난뿐인 그런 험난한 세월을 살면서도 있는 것 없는 것 모두 베풀며 자식을 위해 헌신하던 어머니의 사랑은 ‘그 가슴속 지난 내력도 어슴푸레 이젠 먼 산’이 되어도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시인의 어머니에 대한 잔잔한 회상이 가슴 깊이 감동으로 스며드는 건 우리 모두가 어머니의 자식이기 때문이리라. 지금쯤 ‘흙물 든 손톱 끝만큼 반 평 남짓 일군 꽃밭.’이 있는 시인의 마음 밭에는 ‘북받친 한을 삼키듯 꾹꾹 눌러’ 어머니께서 심던 모란이 화사하게 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부석사 가는 길, 시야가 눈부시다

가지가 휘도록 내다 건 붉은 등

마음에 칼금을 긋듯,

통증도 환한 통증

잘라낸 나무의 등걸을 눈여겨보면

고산자의 지도 같은 물관부가 보인다

쉼 없이 걸었던 궤적

정직하고 지난한 길

길이 끝나는 곳마다 둥글고 달콤한 과육

그 세월 시치미 떼고 오늘 저리 환하다

난 지금 사과나무의

배후를 읽고 있다

 

- 정혜숙시인의 「사과밭을 지나다」전문 (시조집 ‘앵남리 삽화’)

 

  사과나무를 보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 배후를 읽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지가 휘도록 열린 사과를 ‘환한 통증’으로 읽는 역설도 역설이지만 ‘고산자의 지도 같은 물관부’를 읽어내는 상상력 또한 예사롭지 않다. 적절한 비유와 상징으로 보여주는 사과나무의 배후를 읽다보면 문득, 우리 삶이 사과나무의 삶과 진배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한 길도 정직하게 쉼 없이 걷다보면 둥글고 달콤한 과육 같은 삶을 건져들 수 있는...

 

  시조의 보법에 담긴 다양한 소재와 시각으로 연출된 풍경을 보면서 우리 민족 고유의 정형시인 시조에 대해 자부심과 긍지를 가져본다. 더러 단견일 수도 있는 감상이지만 시조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작은 도움글이 되길 기대해 본다. 끝으로 시조를 배우고 쓰는 사람들을 위해 백수 정완영선생의 ‘시조의 다섯 가지 보법’의 일부를 소개하며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  이 보법에는 대략 5가지의 수칙이 있으니, 첫째가 定型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정형은 궁색하거나 옹색한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가 필연적으로 다듬어 놓은 그릇이어서 정제된 우리말이면 무엇이나 다 담고도 남음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두 번째가 가락이 있어야 되겠다는 것인데, 우리 일상생활의 음률, 그 내재율이 무리 없이 다듬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시조는 쉬워야 한다는 말씀인데, 까닭은 시조가 국민시이기 때문이다. 쓸 적에는 깊이 오뇌하고 무겁게 思量하고 곰곰 성찰하되 다 구워낸 작품은 쉬워야 된다는 이야기이다. 言短意長하라는 이야기이다. 네 번째는 根脈이 닿는 시조, 즉 喜·悲·哀·樂·妙·玄·虛, 그 밖의 어디엔가 뿌리가 닿는 작품을 쓰라는 것이다. 심심풀이, 더러는 화풀이 같은 작품이 눈에 띄는 것은 민망한 일이다. 끝으로 시조는 격조가 높지 않으면 그것은 이미 시조가 아니다. 비속어, 천속어가 난무하고 제 몰골도 수습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되면 이것은 이미 시조가 아니다.』

 

* 2008 상반기 두레문학 117-123쪽

 

<출처: 시조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