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동 할머니/ 서정홍
이보게, 자네 전화번호 좀 적어 주게. 저기 농협 달력에
크게 적어 주게. 요즘 이 늙은이가 죽을 때가 되었는지 밤
만 되면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진다네. 영감 일찍 죽고
이날까지 혼자 외롭게 살았는데 죽을 때는 혼자 죽고 싶지
않아. 내가 몸이 아파 전화하거들랑 미안하지만 얼른 와
주겠나? 얼른 와서 내 손이라도 좀 잡아 주게.
자식 놈들이야 많지만 제 살길 찾아 다 도시로 떠났어.
큰 아들놈은 서울에 있고, 작은 아들놈은 인천에 있고, 큰
딸년은 광주에 살고, 작은 딸년은 대전에 살아. 모두 먼 곳
에 살고 있으니, 이늙은이가 막 숨이 넘어간다고 전화를
해도 언제 오겠나. 내 숨이 끊어져야 오지 않겠나.
며느리 년들은 겨울 앞에 앉아 화장하는 데 한두 시간
걸릴 테고, 차 몰고 오는데 대여섯 시간 걸릴 텐데.... 조
금 가까이 사는 딸년들도 애들 밥해 주랴 빨래하랴 공부
뒷바라지하랴 이래저래 바쁜데, 이 늙은이한테 마음 쓸
겨를이 어디 있겠나. 그러니 이 늙은이가 아프다고 전화
하거들랑 귀찮더라도 잠시 왔다 가게. 사람 죽는 거 잠깐
이니까.
- 서정홍 선생님 시집 " 내가 가장 착해질 때" (나라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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