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암동 일기
김춘기
기적도 다 떠나고, 철길만 남은 마을
해방 전 경암동에 열차가 처음 선보였지. 젊은이들이 모여들고, 건널목 간수도 휘파람 불며 오고, 서울의 부나비도 여럿 덤으로 왔지. 이곳 종이공장에서 군산으로 물자 실어 나르던 유일한 길, 철길이 몸 흔들면 금성라디오는 쉬지 않고 땅콩을 볶았지. 심야엔 열차의 마지막 칸에 잠 없는 바람까지 잔뜩 실려와 판잣집 창문 두드려 집집 아들딸이 여나문씩은 생기고. 하지만 이젠 중늙은이 햇살이나 종일 쉬었다 가는 길. 조석으로 성당 공소의 십자가가 지나가고, 어쩌다 하굣길 아이들 몇이 보이기도 하지만. 여름이면 민들레 질경이 강아지풀이 그곳 주인 행세하지. 해질녘이면 평상 위에서 막걸리 두어 잔이나 가끔 오가며 옛 추억 떠올리기도 하고. 허리굽은 낮달이 검버섯 핀 하늘 끌고가는 한낮, 무말랭이가 멍석 위에서 죽은 누에처럼 흩어져 있지. 선로 위에 내걸린 빨래가 허공 한 쪽을 접었다가 펴는 하오, 살구나무 그늘에서 졸던 들고양이 꼬리에 아지랑이가 감기면 돌담길을 길게 잡아당겼다가 다시 놓곤 하는. 오늘도 서녘바다를 채운 노을이 갈매기를 불러 긴 하루의 마지막 책장을 넘기는 그곳.
늦가을 고욤나무가
아기 불알만한 전등을 올망졸망 켜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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