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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밭/時調

[월평|時調] 감발, 감동, 감심 / 홍성란

by 광적 2013. 9. 16.
[월평|時調] 감발, 감동, 감심 / 홍성란
[65호] 2013년 09월 01일 (일)

홍성란
시인

조리법과 용기

 

  우리말은 발음이 1만 2천 개나 되고 50만 개의 어휘를 가지고 있다(이근배 〈회초리 맞는 삶, 빈 쭉정이의 글쓰기〉 《월간문학》 2013년 8월호). 그러니 우리말 우리글을 부려 쓸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이런 우리말 우리글이 우리 마음 안에 있으니 쓰지 못할 시가 없겠다. 다만 시인이 시적 대상에 감발하여 붓을 드느냐 못 드느냐가 문제다.

  시적 대상은 외부에 있을 수도 있지만 내 안에 이미 들어 있다. 살며 살아오며 껴안은 경이와 슬픔, 분노와 상처였던 일들이 그 얼마인가. 그 질곡의 갈피에 숨은 이름이며 사연들이 생생하게 시적 대상으로 살아나는 것이다. 그 대상을 어떤 조리법으로 하여 어떤 그릇에 담아낼까 그것이 문제다. 어떤 내용을 어떻게 육화시켜 어떤 시적 형식으로 표현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

 

감심

  이근배 시인은 말한다. ‘우러나는 시’와 ‘만들어지는 시’에 대해. 만들어지는 시가 “언어”를 부려 쓰는 “독특한 기술”이 빚어내는 시라면 우러나는 시는 “자기 속에 있는 진정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쓰는 시다. 이런 체험 속에서 우러난 시는 만들어지는 시에 없는 “정서적 감동”이 있다는 것이다. 설령 표현이 서툴더라도 그 우러나는 시를 높이 치켜들겠다는 것이다.

  그렇다. 감발한 마음을 표현하는 데는 좀 서툴어도 체험적 진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심금을 울린다. 시를 읽어도 감심이 되지 않으면 그 시에 대해 쓰고 싶은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시를 읽고 나서 무언가 내 마음에 전해오는 느낌이 있어야 한다.

  “어?!” 하고 우리를 놀라게 하는 시. “음……” 하며 깨닫고 생각하게 하는 시. “아!” 하고 그 아름다움에 마음이 흔들리는 시. 이것이 감심(感心)이다. 감심이 되어야 필설(筆舌), 붓과 혀가 움직이는 것이다. 물론 “어?!”이거나 “음……” 또는 “아!”라는 반응은 상당 부분 겹치기 마련이다. 한 편의 시가 이런 감화 중 어느 한 가지만이라도 가진다면 성공이다. 좋은 시다.

 

이해의 징검돌

  명나라 말기의 학자 원굉도(袁宏道, 1568~1610)는 소수(小修)라는 이의 시를 평하며 “어떤 이는 너무 솔직하게 드러냈다고 그것을 꾸짖을 수도 있지만, 그들은 감정에 따라 경(境)이 변하고 글자가 감정에 의거함을 모르는 것이다. 뜻을 모두 전달하지 못할까 봐 걱정해야지, 어찌 솔직함을 걱정하겠는가.(而或者猶以太露病之, 曾不知情隨境變, 字逐情生, 但恐不達, 何露之有)”라고 했다. 그렇다. 시가 솔직하게, 알아듣기 쉽게 씌었다고 해서 너무 쉽다고 폄하할 일은 아니다. 시를 어렵게 둘러서 쓰는 것은 독자를 기만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독자는 한 편의 시를 읽고 소통하기를 원하지 독해불능의 시를 두고 ‘가 닿을 수 없이 격이 높아 훌륭하다’고 칭송하지는 않을 것이다. 좋은 시는 장거리에 앉아 나물 파는 할머니도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식자층의 고급독자만이 독자가 아니다. 시는 독자 대중을 생각하며 그 시라는 냇물을 건널 수 있게 적당한 거리에 이해의 징검돌을 떨어뜨려 놓아야 한다. 이것이 시 앞에 겸허한 자세다.

  이해가 어렵지 않은 시도 물론 “어?!” 하는 낯섦과 “음……” 할 수 있는 깨달음과 “아!” 하고 그 아름다움에 놀라 마음이 흔들리는 시여야 한다. 이해가 쉬우면서도 감동이 있는 시. 이런 시가 좋은 시다.

 

 

정치적 알레고리

 

 

밤섬 개나리는 툭하면 봄이란다.
선유도 줄장미는
마음 내키면 피고지고.

 

하늘은 사월 중순쯤에도
눈설레를 뿌린다.

 

 

여의도 그곳 바람은
풍향계가 필요 없지유?

 

그날, 그날
기분, 기분
여름, 겨울
상정, 결렬

 

한강변 개나리꽃이 카카오톡 한창이다.

 

 

— 김춘기 〈여의도 그곳〉(《나래시조》 여름호)

 

  툭하면 집나가는 처녀처럼 양재천변 개나리도 11월에 꽃을 피우고 봄까치풀꽃도 눈발 얹은 검불 아래 파란 꽃들 오종종 피운 지가 오래됐다. 물론 〈여의도 그곳〉이 온난화 문제를 제기하는 건 아니다. 이 시를 읽노라면 정치1번지 여의도에 대한 시인의 관념을 환히 알 수 있다. 시인은 이 관념을 개나리와 줄장미의 생태로 객관화하여 누구나 공감할 수 있게 했고 문면에 드러나지 않은 국회의원들의 행태를 비판하고 있다.

  밤섬 개나리도 툭하면 봄이라고 때 없이 피어나고 선유도 줄장미도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피고진다. 멋 대로인 이 꽃들처럼 의안을 상정했다가는 또 마음 내키는 대로 결렬시켜버리는 국회의원들에 대한 조용한 야유와 풍자. 여의도의 풍향계는 자연의 바람에 따라 풍향과 풍속이 정해지는 게 아니다. 의원들의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뜨거운 감자가 되어 들끓다가도 무슨 속사정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냉랭한 분위기로 급선회하기도 한다. 정치1번지의 “하늘”은 사월에도 찬바람에 눈발이 섞어 치니 개나리만 정신을 못 차리는 게 아니다. 눈설레치는 사월의 난장을 한강변 개나리꽃들이 카카오톡으로 퍼뜨리고 있으니 소문은 와이파이 속도로 이미 제주를 넘어 런던이나 파리에 당도했을 것이다.

  〈여의도 그곳〉은 첫째 수에서 비정상적인 밤섬과 선유도의 생태환경을 보여주고 둘째 수에서 여의도가 상징하는 정치판의 불구적 상황을 제시했다. 이 연시조는 두 수의 의미 내용에 따라 적절한 시적 형식을 구사하여, 근경으로서 개나리와 줄장미의 생태를 제1연으로 하고 그를 둘러싼 하늘의 눈설레는 제2연으로 나누어 제시했다. 둘째 수 초장은 의미에 따라 구 단위로 나누고 중장은 음보단위 행 배열로 정치판의 균열과 파탄을 표현했다. 종장의 1행 이어쓰기는 개나리꽃의 수다스러움을 드러내는 데 적절한 기사 방식이다. 의미 내용과 시적 형식이 조응하는 〈여의도 그곳〉은 깔끔한 정치적 알레고리다.

 

경(境)

  “하늘에서는 상(虛體)을 이루고 땅에서는 형(實體)을 이룬다.(在天性象, 在地成形)”는 《주역》에 따르면 허성(虛性)의 상(象)만이 우주의 기와 통한다. 나의 초보적 이해로는 이 말이 뿌린 대로 거두는 땅의 이치와 달리 하늘의 이치는 우리가 모른다는 말과 같다. 모르기 때문에 신묘하고 오묘한 것이다. 우주의 기와 통한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모르기 때문에 나는 다만 “마음을 맑게 하여 만상을 맛보아야(澄懷味象)”한다. 그러나 마음을 맑게 하여 만상을 맛본다고 해서 그 맛을 얼마나 설명할 수 있을까. 설명할 수 없으니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어렴풋이 안다.

  원굉도의 말대로 감정에 따라 경(境)이 변하고 글자는 감정에 의거한다. 그럼 경이란 무엇인가. 지금 나는 말로 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는 난관에 처했다. 명대 중기의 서예가 축윤명(祝允明, 1460~1526)에 따르면 경은 “몸과 사물이 접촉하여 생겨나는 것(身與事接而境生)”이다. 몸과 사물이 접촉한다는 것은 무언가. 여기서 경은 미적인 경(境)으로 현실의 경(景)과는 구분된다고 했다. 실경(實景)으로서 경(景)이 아니라 작가가 실경 속에 들어가 보고 느끼고 체험한 결과로서 경(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상에 대한 작가의 남다른 느낌과 이해와 해석이 깃든 것이 경(境)이다. 의경(意境)이다.

  경(境)을 공부하며 허체요, 허성인 “상(象)을 위주로 한다는 것을, 예술형상이 하나의 범주로 정확하게 표현해 내려고 한 것이 바로 경(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안다. 정확하게 표현해 내려고 하는 것일 뿐 정확하게 표현했다고는 말할 수도 없는 것이 경(境)인지 모른다. 의경(意境)인지 모른다. 그러니 유우석(劉禹錫, 772~842)의 말대로 “시가 어찌 글자를 쌓아 놓은 것이겠는가? 뜻을 얻으면 말은 잊어야 한다. 그런 고로 세밀하게 쓸 수는 있지만 이에 능하기는 어렵다. 경(境)은 상(象) 밖에서 생겨난다. 그런고로 정교할 수는 있지만 조화롭기는 어렵다.(詩者其文章之蘊耶? 義得而言喪, 故微而難能, 境生於象外, 故精而寡和)” 그렇다. 우리가 세밀하고 정교하게는 쓸 수 있을지는 몰라도 조화롭기는 참 어렵다.

 

자연의경

 

빨래 쉬이 마르지 않는 우기가 이어진다
노각나무 흰 꽃도 내게 오지 못해서
마음은 먼 곳을 향하고
위로가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먼 곳, 도피안사에 갔었지
거기 피안(彼岸)은 없고 남은 꽃 두어 송이
쓸쓸한 후일담처럼
조용히
간결하게……

 

— 정혜숙 〈절연〉(《유심》 8월호)

 

  노각나무 그 아름다운 꽃이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니 무슨 연유일까. 무슨 연유에서 내 마음도 빨래 쉬이 마르지 않는 우기일까. 마음의 우기는 위로가 필요하겠지. 시인은 곁에 없는 위로를 찾아 먼 곳 도피안사에 갔나 보다. 갔더니 피안은 없고 남은 꽃 두어 송이가 있다. 그 꽃이 쓸쓸한 내 추억을 잔잔히 들려주는 것 같다. 후일담처럼.

  피안. 왜 피안일까. 시인은 지금 고해(苦海)에 빠져 젖은 마음을 말려 줄 위로 같은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복잡하지도 않고 시끄럽지도 않은 무위(無爲)의 언덕, 이 고해를 벗어날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기를 원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거기 먼 곳에도 피안은 없다. 내 마음을 바꾸지 않는 한 피안은 없다. 그러니 쓸쓸한 후일담처럼 말없이 노각나무 흰 꽃만 두어 송이 눈에 들 뿐. 절연한 뒤 그 쓸쓸한 마음이, 전에 없이 마음에 와 닿지 않는 살가운 것들을 떠나 도피안사를 찾게 했다. 마음이 자연을 묘사하고 그 자연이 시인의 감정을 말해준다. 아름다운 자연의경(自然意境)에 다다른 시다.

  시조는 절제와 압축을 미덕으로 삼는 극서정시(極抒情詩)다. 이 시를 찬찬히 읽노라면 겹치는 이미지와 시어가 마음에 걸린다. “우기가 이어진다”라는 말이 걸리고 “위로가 필요했다”와 “그래서 나는”이라는 설명이 걸린다. “조용히”와 “간결하게……”도 “쓸쓸한”이 주는 이미지와 상당 부분 겹친다. 우기(雨期)는 비가 계속해서 많이 내리는 시기, 비가 집중적으로 내리는 기간을 가리킨다. 우기가 이어지는 게 아니라 연일 비가 내리는 것이다. 시어 운용을 어떻게 하여 적확한 표현을 이룰 것인가 숙고해야 할 것이다. 절연의 쓸쓸함이 한적한 도피안사 뜰에 핀 두어 송이 노각나무 흰 꽃 이미지로 아름답게 형상화되어 있으나 부사와 형용사의 중첩으로 글자를 쌓아서 형식을 채운 격이 되었다. 뜻을 얻으면 말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정교할 수는 있으나 조화롭기는 참 어렵다. 자연의경의 아름다움을 얻은 이 시는 얼마나 삭혀두었던 시인가.

 

푸른 물과 붉은 물이
서로 덥석 손을 잡네

 

어디서 왔는지도,
가는지도 묻지 않네

 

사랑이
비루한 과거를
온 몸으로 껴안듯이

 

— 민병도 〈두물머리〉(《시조21》 여름호)

 

  지금 빗줄기가 세차다. 글을 쓰다 멀리 포성 같은 천둥소리 듣는다. 알아차리지 못하게 번개 지나갔는가. 자연이 주는 선물, 비와 낙뢰. 좋다. 천지자연의 이치는 오묘해서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를 푸른 물과 붉은 물이 덥석 손을 잡는다. 두물머리. 남한강과 북한강의 두 물줄기가 합치는 곳 양수리.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고, 푸른 물과 붉은 물이 서로 덥석 손을 잡는 두물머리 같은 사랑. 비루한 과거가 지난 일인 것처럼, 비루한 지난 일을 묻고 따져 무얼 하겠나. 다 지난 일인 걸.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냥 온 몸으로 받아 안아주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같은 지면에서 〈한때, 꽃〉을 읽는다. “네가 시드는 건/ 네 잘못이 아니다// 아파하지 말아라/ 시드니까 꽃이다// 누군들/ 살아 한때 꽃,/ 아닌 적 있던가”. 생로병사. 화무십일홍. 꽃도 사람도 왔다 가는 것. 피었다 지는 것. ‘나’라는 꽃은 얼마나 갈까. 나라는 꽃의 발육개화는 얼마큼 진행되어온 것일까. 꽃봉오리일까, 반개인가 만개인가. 아니면 시드는 중일까.

  어쨌든 좋다. 꽃봉오리는 꽃봉오리대로 어여쁘고 반개한 복사꽃은 반만 피어 예쁘다. 활짝 핀 꽃이 아니면 좋겠다. 활짝 피었다는 것은 시듦이 시작된다는 것이니까. 그러나 시드는 꽃도 꽃이고 낙화도 꽃이다. 능소화나 동백꽃이 투신한 흙마당을 보았는가. 오롯이 얼굴 들고 있는 낙화. 낙화도 꽃이다. 져서는 흙으로 가 거름이 되고 거름이 되어서는 내가 알지 못한 어느 생명의 작은 세포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 그럴 수만 있다면 좋겠다. 누군들 한때 꽃 아닌 적 있던가. 한때라도 꽃이기만 하면 된 것 아닌가. 화무십일홍이다.

 

바람에 흔들리며
풍경은
껄껄 웃었다

 

제 자신을 때리며
언제까지
울 수만은 없었다

 

바람이
거세질수록
큰소리로 웃었다.

 

— 김윤철 〈풍경〉(《서정과현실》 2013년 상반기호)

 

  〈풍경〉에는 시인의 웃음철학이 들어 있다. 같은 지면에 발표한 〈용서의 대화법〉에서도 웃음의 경영학이 들어 있다. 웃음이란 무언가. 나를 보여주기. 혼자 좋아 그냥 웃을 수도 있지만, 내가 웃고 있다면 앞 사람에게 웃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거울 속 나를 향해 내 먼저 웃어”보듯이 앞 사람에게 내 웃는 모습을 먼저 보여주는 것이 웃음의 경영학이다. ‘웃는 낯에 침 뱉으랴’는 속담처럼 내가 웃고 있는데 앞 사람이 화를 내고만 있을 수 있나. 살며시 웃는 인상을 지니고 산다면, “웃어야 할 때”를 굳이 찾지 않아도 되겠다.

  웃음에 대해 생각한다는 건 어쩌면 풍경처럼 제 자신을 때리며 울고 있기 때문 아닐까. “젖은 셔츠의 첫 단추를 다시 채”운다는 말이 그렇게 생각하게 한다. 왜 젖은 셔츠일까. 왜 거울 속 나를 향해 내 먼저 웃는다는 걸까. 젖은 셔츠처럼 내 마음도 젖어있기 때문이다. 제 자신을 때리며 울고 있기 때문이다. 회한일까 후회일까. 그러나 언제까지 울 수만은 없다. 풍경은 바람이 거세질수록 큰 소리를 내게 되고 관념은 풍경이 큰 소리로 운다고 할 테지만, 시인은 세상을 달리 본다.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은 우는 것이 아니다. 바람이 거세질수록 큰 소리로 껄껄 웃는 것이다. 마음을 바꾸면 세상이 바뀐다. 시인의 젖은 셔츠는 마르고 더 이상 울음은 없으니 껄껄 웃는 날이 도래할 것이다.

  이 시는 풍경이 운다는 관념을 확 뒤집고 세상을 껄껄 웃게 한 웃음의 경영학이 돋보이는 시다.

 

  이런 시도 있고 저런 시도 있다. 이런 시가 있어야 저런 시가 의미 있고, 저런 시가 있어야 이런 시가 돋보인다. 두루 한데 어울려야 구경꾼 몰리는 판이 이루어진다. 한 패거리만 있으면 판의 흥이 일지 않는다. 논쟁이 없는 세상은 고여 썩는 우물과 같다. 한국시가의 역사는 장르사적 흐름에 어떤 일정한 법칙이 있다면, 손자가 아버지에 대한 반발로 할아버지를 닮는 과정의 반복적 연쇄라 규정할 수 있다(김학성). 사뇌가의 3구6명이 퇴조하면서 속요의 3음보가 들어오고 속요가 퇴조하면서 시조의 4음보 3장6구가 들어온다. 시조의 4음보 3장6구가 답답하게 고인 자리에 무한자유의 현대시가 밀고 들어온다. 이 자유시의 발랄함이 지나쳐 리듬을 잃고 장황 난삽의 지경에 이르니 서너 행 정도의 극서정시를 주창하는 세력이 나왔다. 한국시단은 다시 시조의 압축과 긴장, 절제와 균형의 미학을 찾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시단이 시조 일색으로 가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자유시와 정형시인 시조가 경쟁적 상보적 기능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국시의 발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자유시가 할 수 있는 것을 시조가 다 할 수는 없다. 시조는 자유시가 따르지 못하고 할 수 없는 것을 해야 한다. 시조는 자유시가 할 수 없는 것을 해내야 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홍성란 srorchid@daum.net
시인. 1989년 중앙시조백일장으로 등단. 시조집 《겨울 약속》 《바람 불어 그리운 날》 《춤》 등이 있고, 시조선집 《명자꽃》 《백여덟 송이 애기메꽃》 시조감상 에세이 《하늘의소리, 땅의소리―백팔번뇌》 등이 있다. 유심작품상, 중앙시조대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 수상. 현재 성균관대 강사, 유심시조아카데미 원장.

 

(유심 2013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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