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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문학장르/좋아하는 時調

♣ 세상의 모든 시조 : 이토록 시인 ♣

by 광적 2020. 10. 30.

세상의 모든 시조 : 이토록 시인 ♣

-2020년 3월 10일 화요일-

 

 

 

드라이플라워

 

 

이 미련은, 내 것도 당신 것도 아니라서

 

유리조각 쏟아진

마음속 골목 같다

 

기어이,

바스러지는 소리

다 들으며 가라고

 

 

한통속

 

 

통속에 물을 받고

애벌빨래 앉힌 자리

잘못 든 검은 옷을 며칠째 두었을까

닳아서

환한 솔기가

검은 물 머금었다

 

우리도 곁을 주어

이만큼 살았으니

당신도 이제는 당신이 아니겠다

나조차

내가 아님을

당신 있어 깨닫듯

 

 

황사

 

 

뼈마디 툭 불거진 자루 같은 노인이다

 

오늘도 옥상 위에 둥둥 뜨는 저 신기루

 

바람이

한 입 가득하게 생쌀을 물고 있다

 

사막을 건너기 전 육탈을 하려는지

 

그는 눕고 혼이 나와

붉은 해를 드는 한낮

 

낙타는

무릎이 터져

모래알로 흩어진다

 

 

쇠뿔

 

 

뿔은 언제

뿔이 솟나

 

이랴, 이랴, 워, 워,

 

몸이 전부

의성어인 아버지는

소였다

 

그 둥근,

눈을 껌벅이며

무릎이 툭 꺾일 때

 

보았다

뿔은 비로소

날 향했다

 

나는

늙은 소의 텅 빈 하늘이었다

 

가슴엔

쇠뿔도 없이

울음만 쿡 박히는

 

 

넝쿨장미

 

 

장미가 가시 품고 담장을 넘어왔다

 

캄캄한 울타리 끝

날 세운 사금파리

 

가슴을

쓰윽 베고 간

피 묻은 편지였다

 

멍울처럼 맺힌 그 꽃 맨손에 그러쥘 때

 

불덩어리 만져지듯

뜨겁게 박힌 가시

 

그것도

사랑이여서

온몸에 불이 인다

 

 

향어

 

 

도마 위 칼자국들, 생사의 골이 깊다

당신 앞에 눈감으니 몸 안에 향이 나네

이 마음 감추었다면 덕장에나 걸렸을까

 

물보다 비리다는 속울음에 몸을 뉘어

생살 아래 고인 숨결 얇게 저며 뜨는 날

천지간 향내 풍기며 당신 혀에 감길까

 

 

 

 

♠ 나누기 ♠

 

 

이토록 시인은 2017년 백수문학상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했습니다. 시조로 등단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시력이 괘 오래 된 시인입니다. 개성적인 시 세계가 눈길을 끕니다. 여섯 편의 시조를 소개합니다.

「드라이플라워」는 마른 꽃 소재인데 단시조로서 의미심장합니다. 첫머리부터 강렬한 인상을 안깁니다. 생화를 선물 받았다가 이따금 말려서 벽에 걸어두고 오랫동안 바라보는 때가 있지요. 드라이플라워를 두고 이 미련, 이라고 설정한 후 이 미련은, 내 것도 당신 것도 아니라는 점을 미리 못 박고 있군요. 살면서 미련을 가지다가, 버리지 못하다가 낭패를 겪게 되는 일이 허다하지요. 미련은 마음이 아직 가까이에서 맴돌고 있다는 뜻이지요. 당신 것도 내 것도 아닌 것이 유리조각 쏟아진 마음속 골목 같다, 라는 형용은 이채롭습니다. 시에서 생생한 비유가 어떠한 것인지를, 어떠해야 하는지를 도드라지게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종장은 별리의 안타까움과 아픔을 기어이, 바스러지는 소리 다 들으며 가라고, 라고 정리하면서 최고조에 이르고 있습니다. 굳이 헤어지면서 바스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가라는 것은 참으로 잔인합니다. 「드라이플라워」는 실로 단시조의 한 모델이 될 만하군요.

 

「한통속」은 빨래에 관한 이야기인데 소위 생활시조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들은 평범함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한통속」은 비범합니다. 통속에 물을 받고 애벌빨래 앉힌 자리에 잘못 든 검은 옷을 며칠째 둔 바람에 닳아서 환한 솔기가 검은 물을 머금고 있는 것을 눈여겨봅니다. 여기까지는 별다른 이야기가 아닌 듯 보입니다. 그러나 한통속인 우리 즉 나와 당신이 등장하면서 의미는 심화됩니다. 우리도 곁을 주어 이만큼 살았으니 당신도 이제는 당신이 아니겠다, 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음을 진술합니다. 당신도 당신이 아니기에 나조차 내가 아님을 깨닫는데 그것은 곧 당신이 곁에 있기 때문이지요. 내 영혼은 네 몸, 내 몸은 네 영혼, 이라는 어느 시인의 시구가 생각납니다. 오래 세월이 저절로 한통속을 이루게 했지만, 그동안 또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을까요?

 

「황사」에서 동원된 비유는 낯선 것이어서 새롭습니다. 흥미로운 전개가 눈길을 끄는군요. 뼈마디 툭 불거진 자루 같은 노인이다, 라는 첫줄은 놀랍습니다. 그러면서 오늘도 옥상 위에 둥둥 뜨는 저 신기루를 바람이 한 입 가득하게 생쌀을 물고 있는 것으로 본 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막을 건너기 전에 육탈을 하려는지 그는 눕고 혼이 나와 붉은 해를 드는 한낮이라는 형상화 과정도 이채롭습니다. 끝내 낙타는 무릎이 터져 모래알로 흩어진다, 라고 진술하면서 끝맺고 있는데 뼈마디, 자루 같은 노인, 신기루, 바람, 생쌀, 사막, 육탈, 혼, 붉은 해, 한낮, 낙타, 무릎, 모래알, 이라는 시어들이 다수 동원되어 개성적인 세계를 축조하고 있습니다. 짧은 시에서 이토록 많은 이미지들을 자연스럽게 담아낸 점은 출중한 기량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쇠뿔」은 연행갈이에 변화가 크군요. 적절한 배치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뿔을 보면 신기하게 여기지요. 사람에게는 왜 뿔이 없을까 생각하다가도 가끔 뿔이 불쑥 튀어나와서 상대방을 곤혹스럽게 할 때가 있지요. 보이지 않는 뿔의 돌격……. 뿔은 언제 뿔이 솟나, 라면서 별안간 이랴, 이랴, 워, 워, 하면서 몸이 전부 의성어인 아버지가 소였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 둥근, 눈을 껌벅이며 무릎이 툭 꺾일 때였지요. 그리고 뿔은 비로소 나를 향했던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늙은 소의 텅 빈 하늘이었던 것까지도. 더구나 가슴엔 쇠뿔도 없이 울음만 쿡 박히는 텅 빈 하늘이었던 것을 아프게 상기하고 있군요. 이렇듯 「쇠뿔」의 상상력은 종횡무진 중입니다. 새로운 시조의 한 모델입니다.

 

「넝쿨장미」에서 장미가 가시를 품고 담장을 넘어온 것을 두고 캄캄한 울타리 끝에 날 세운 사금파리, 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종장에서 이를 두고 가슴을 쓰윽 베고 간 피 묻은 편지였다, 라고 말합니다. 장미를 두고 일찍이 고금동서에서 이런 이미지를 구현한 것은 처음일 거라고 봅니다. 또한 멍울처럼 맺힌 그 꽃 맨손에 그러쥘 때 불덩어리 만져지듯 뜨겁게 박힌 가시로 은유하고 있는 대목도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화자는 그것도 사랑이여서 온몸에 불이 일고 있다고 말하고 있군요. 그것은 엄연히 사랑이지요. 진실로 사랑이고말고요.

 

「향어」는 치밀하고 치열합니다. 도마 위의 칼자국들을 보면서 생사의 골이 깊은 것을 읽습니다. 화자는 향어가 되어 당신 앞에 마침내 눈을 감으니 몸 안에 향이 난다고 고백합니다. 당신을 향한 화자의 마음이 어떠한 장도인지를 헤아릴 수 있겠습니다. 결국 속마음을 드러낸 것인데 혹여 이 마음을 감추었다면 덕장에나 걸렸을 지도 모르리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물보다 비리다는 속울음에 몸을 뉘어 생살 아래 고인 숨결 얇게 저며 뜨는 날 천지간 향내 풍기며 당신 혀에 감길까, 라는 둘째 수는 더욱 극적인 결말을 보여줍니다. 사랑도 이러한 사랑이라면 극광의 왈츠쯤 되지 않을까요? 언어유희와는 거리가 먼, 진정성이 담보된 미학적 성취가 우뚝합니다. 아무나 추종할 수 없는 경지이군요.

 

이토록 시인이 보여주는 시조 세계는 다채롭고 참신합니다. 낯선 것이되 생소하지 않습니다. 삶이 얼마나 진중하고 깊어질 수 있는 지를 정형의 율격을 통해 감동적으로 보여줍니다. 도저한 깊이에 닿아 있는 시편들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새 힘을 얻습니다.

2020년 3월 10일 <세모시>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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