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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문학장르/좋아하는 詩

형이하학 / 김찬옥

by 광적 2020. 11. 30.

형이하학 / 김찬옥

 

이브의 손끝에서

똬리를 틀고있던 뱀의 입이 열린다

부드럽고 탄력있는 깊고 깊은 구멍이

그녀의 아랫도리를 서서히 점령한다

 

발끝을지나정강이를지나무릎을지나허벅지를지나

깊은골짜기를지나엉덩이를지나배꼽언저리에서멈춘다

 

아무리 올려다보아도

뱀은 저 북방의 경계를 침범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아랫도리와 더욱 밀접하다

 

이글거리던 태양이 어둠에 들 즈음

다시 체위를 바꿔

 

배꼽을지나엉덩이를지나깊은골짜기를지나

허벅지를지나무릎을지나정강이를지나

발뒤꿈치를지나발끝을빠져나온다

 

작은 상처 하나에도 민감한 뱀이

온 종일 그녀와 한 몸일 수 있었다

 

그녀가 없는 방 한 쪽 구석에

똬리를 틀고있는 고탄력 팬티스타킹,

 

이브의 형이상학을 모르는 저 뱀!

 

시집 『물의 지붕』 2009년 종려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