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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문학장르/좋아하는 詩

바지를 다리며/윤경희

by 광적 2021. 1. 22.

바지를 다리며/윤경희

 

 

몸이 빠져나간 뒤

바지는 힘없이 누워 있다

수많은 시간들을

앉았다 일어섰다 걷다가 뛰는 사이

견디다 못해 잡힌 주름들

뭇 세월에 접힌 얼굴의 주름보다 더 진하고

구겨진 지폐보다 더 초라하다

 

먼지와 커피와 먹다 흘린 국물

조금씩 비치는 여러 자국까지

세탁기 안에서 몸부림치다

세정제와 함께 씻겨 나가

새로운 모습으로 세상에 나온다

 

아직 남은 물기를

뜨거운 열기로 짓누르면

신혼 방의 아침햇살처럼

퍼지는 주름들

해진 발목과

무릎허벅지를 지나

복잡미묘한 부분을 조심스레 지나

허리춤에 다다르면

다시 오는 젊음처럼

빳빳해지는 감촉

새로운 출발을 위해

쭉 펴진 채 똑바로 걸려 있지만

몸이 빠진 바지는 힘이 없다

몸에 맞춰서야 움직일 수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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