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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문학장르/좋아하는 時調

애월 바다/이정환

by 광적 2021. 12. 13.

        애월 바다/이정환

 

사랑을 아는 바다에 노을이 지고 있다

애월, 하고 부르면 명치끝이 저린 저녁

노을은 하고 싶은 말들 다 풀어놓고 있다

누군가에게 문득 긴 편지를 쓰고 싶다

벼랑과 먼 파도와 수평선이 이끌고 온

그 말을 다 받아 담은 편지를 전하고 싶다

애월은 달빛 가장자리, 사랑을 하는 바다

무장 서럽도록 뼈저린 이가 찾아와서

물결을 매만지는 일만 거듭하게 하고 있다

시조집 『분홍 물갈퀴』 (만인사, 2009)

   제주출신 문충성 시인은 <제주 바다>란 그의 시에서 ‘제주 사람이 아니고는 진짜 제주 바다를 알 수 없다’고 했다.

남들은 모두 그 빼어난 풍광의 아름다음에 환호하지만 모르는 소리 말라며 시인은 그 제주바다를 치열한 싸움터로 노래했다.

   제주의 바다를 시에 담더라도 상투적인 바다의 이미지만 빌려 막연한 동경, 낭만적 유희, 어머니 품속, 관념적 사랑 따위의 뭣 모르고 함부로 채색되는 게 못마땅하다는 속내인 것이다.

   시인이 자라면서 내내 코앞에서 보아왔던 바다는 제주인의 거친 삶을 지탱해주는 생생한 삶의 현장이었고, 역사적으로도 풍요와 평화와는 거리가 먼 유배의 땅이었다.

   특히 애월은 30년간 일곱 차례나 고려를 침범했던 몽고에 항거한 삼별초의 마지막 격전지이기도 하다.

그러한 내면의 비극성을 태생적으로 체득하고 있는 시인으로서는 그 바다를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의 벽이고 싸움터로 인식한 것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금의 제주 바다, 더구나 애월 바다에 당도해서는 속되거나 경직된 생각들이 단박에 무너질 치명적인 아름다움에 한담포구를 감싸는 잔잔한 바다의 결이 안온함을 더해주어 다른 상념을 챙길 겨를을 주지 않는다.

제주시 서쪽에 위치한 ‘涯月(애월)’은 단애가 많고 그 앞바다에 지는 달과 물가에 비친 달이 아름답다 해서 비롯된 지명이다.

   시인은 그 애월을 愛月(애월)로 바꿔 불러보는 것인데, 가만 명치끝이 저려온단다. 노을져서 달 뜰 때면 마침내 영혼의 뼛속까지 그 이름이 새겨지는 느낌이란다. 노을에 짙푸른 바다 절경에 감탄사 대신 ‘누군가에게 문득 긴 편지를 쓰고 싶다’고 한다. 그 감동에 자신의 잔잔한 격정을 실어 그대로 전하려고 했던 것이 이렇게 한 편의 시가 되었다.

   ‘벼랑과 먼 파도와 수평선이 이끌고 온’ 그 말을 다 담은 편지는 어떤 내용일까? 유장하고도 절절한 세상 모든 사랑의 우듬지에 가닿을, 닿아서 저릿저릿하게 사랑을 관통시킬 그 무엇. ‘사랑을 하는 바다’ 사랑을 아는 바다에서 ‘무장 서럽도록 뼈저린 이’의 가슴으로 그 물결 매만지며 넘실대며 이 순간 그대에게 건너가고 싶은 것이다.

그렇듯 사랑을, 서둘러 봄을 당겨 맞이하러 어제 오후 제주로 날랐다.

   마치 오래전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삼순이가 한라산을 오르며 새 출발을 다짐하듯 제주로 와서 나 마찬가지로 남은 생을 출발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서귀포에 와서 깊고 푸른 밤을 보내고 지금 지긋이 바다를 보며 엎드려 있다. 나도 오늘 밤이면 그 애틋한 애월, 푸른빛이 눈부시게 아름답다던 그 바닷가 마을에 가서 ‘물결을 매만지는 일만’ 얼마간 거듭하리라.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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