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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문학장르/좋아하는 詩

이수익 시인 詩 읽기

by 광적 2022. 1. 6.

그리움에 기립(起立)하다 / 이수익
내 몸의 일부는 당신의 것이다/ 당신과 함께 나눈 음식,/ 내 영혼의 일부는 당신의 것이다/ 당신과 함께 나눈 대화,// 당신은 달처럼/ 나도 달처럼// 멀리 떨어져서 더욱 환히 보이는/ 생각,/ 푸른 추억의 빵 하얀 스푼//

사랑이 주고 간 對話 / 이수익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가/ 능금나무 아래서/ 터질듯한 풍선을 만지고 있다// 햇빛은/ 신문지의 행간을 교묘히 빠져나오는/ 냄새처럼/ 잎사귀의 저 멀리서 스미어 오데.// 성숙한 두 사람의 볼은/ 잘 빚은 능금주,/ 제왕의 잔을 찰찰 넘치는/ 요염으로 발그레져 있데.// 서로 말하지 않는/ 두 사람의 시선이/ 한 사람의 약속 위에 머물 때/ 배암의 요설은/ 분과 연지를 찍고/ 한 사람이 손이 그만,/ 공중에 풍선을 놓치고 말 데.// 능금나무 뒤에/ 이미 해가 져버렸는지/ 아니면 신명이 날아났는지/ 어둠의 寂寥를/ 자르는 다리,/ 다리에 한 사람이 와서 울 데.// 세상에 이른바 영원이란/ 믿을 수 없다손 치드래도/ 두 사람의 손길이 마주 잡은/ 사랑의 이메지는 믿을 수 없네/ 믿을 수 없네.//

사진사(寫眞師) / 이수익
처음엔 버릴 것부터/ 잘라가면서/ 나중에야 나무의 미학(美學)을 손질하는/ 정원(庭園)의/ 전지작업(剪枝作業)처럼.// 시야에 비친 풍경 속에서 사진사(寫眞師)는/ 먼저/ 버릴 것부터 생각한다.// 버리고 버리고 버리다가/ 결코/ 버릴 수 없는.// 그 일순(一瞬) 교감(交感)을 영상에 담으면/ 나머지는 공허한 허상(虛像)의 풍경들이/ 울음 우는/ 카메라의 저 바깥 외계(外界).//

​​성냥개비 / 이수익
가연성 유황분의 그 끝을/ 가볍게/ 그슷는다.// 불이 튈 잠재를/ 비위처럼 건드린다.// 확, 댕기는/ 점화의/ 시발.// 이 순간은/ 아마/ 신도 바람을 모았을 것이다./ 보다 머언 흐름을 위하여 강하江河는/ 파도를/ 되풀이해 보냈을 것이다./ 나의 손이 아끼는/ 그 불꽃의 개안開眼의 위하여// 사랑이여,/ 우리의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외길로 교류하는 피의 감전을/ 그대는 또한 느끼는가.//

고별 / 이수익
그때, 잘 죽었지/ 젊은 나사렛 그 사람/ 오늘도 나는 등어리에 솜을 실은/ 나귀의 지혜가 되어/ 잃어버린 것을 찾으러/ 종로로 간다./ 무엇일까/ 잃어버린 그것은,/ 사랑일까 기억일까/ 독을 뿌린 벌의 죽음일까/ 눈앞에서 아찔/ 정말 잘 죽었지/ 그때 젊은 친구 나사렛./ 피와 모래를 노래하다 나는/ 골수를 다친 채/ 종로의 어느 밝은 상점 앞에서/ 시방/ 비를 맞는데/ 웬일일까 자꾸 웃음이 터지는/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여자는,/ 어머니도 아니다 누이도 아니다/ 그렇지 참 잘 죽었지/ 젊은 나사렛 자네/ 얼굴이 타도록 술을 마시고/ 납덩이보다 무거운 솜을 진 채/ 긴 벽을 돌아선 종로에/ 종로에,/ 가려운 피부엔 돋는 부스럼/ 그때 잘 죽었지/ 정말 한이 된다.//

그리운 악마 / 이수익
숨겨 둔 情婦하나/ 있으면 좋겠다/ 몰래 나 홀로 찾아드는/ 외진 골목길 끝, 그 집/ 불 밝은 창문/ 그리고 우리 둘 사이/ 숨막히는 암호 하나 가졌으면 좋겠다.// 아무도 눈치 못챌/ 비밀 사랑,/ 둘만이 나눠 마시는 죄의 달디단/ 祝杯 끝에/ 싱그러운 젊은 심장의 피가 뛴다면!// 찾아가는 발길의 고통스런 기쁨이/ 만나면 곧 헤어져야 할 아픔으로/ 끝내 우리 침묵해야 할지라도// 숨겨 둔 정부 하나/ 있으면 좋겠다/ 머언 기다림이 하루종일 전류처럼 흘러/ 끝없이 나를 충전시키는 여자/ 그/ 악마같은 여자.//

그리운 밀림(密林) / 이수익
저 재빠르고 단순한/ 생각이 깊지 못한 야성 동물과// 그들을 닮아 뜨겁고 성급하며/ 빠르게 자라나고 일찍 죽는/ 억센 풀잎, 혹은 나무들과// 또한 그들을 울창한 숲에 가두고 키우는/ 태양과 비, 바람, 구름/ 그리고 달과 별이 있는// 열대의/ 밀림/ 저 독과 향이 가득 피어오르는 原生(원생)의 대륙으로// 나는 밤마다 날개를 치며 날아간다,/ 누렇게 뜬 조갈의 들판과 江을 건너/ 힘없이 지쳐 누운 산맥들을 지나/ 맑고 푸른 공기 청정한 샘물처럼 용솟음치는/ 젊은 육체의 땅으로, 숲으로// 나는 날아간다, 환희에 떠는 내 심장의 피가/ 솟고 꺼꾸러지며 폭발하는 하늘에서,/ 보다 더 멀리.//

그리고 너를 위하여 / 이수익
타오르는 한자루 촛불에는/ 내 사랑의 몸짓들이 들어있다./ 오로지 한사람만을 위하여/ 끓어오르는 백열의 침묵속에 올리는 기도,/ 벅찬 환희로 펄럭이는/ 가눌길 없는 육체의 황홀한 춤,/ 오오 가득한 비애와 한숨으로 얼룩지는/ 눈물,/ 그리고 너를 위하여/ 조금씩 줄어드는 내 목숨의 길이.//

천 년의 사랑 / 이수익
산이/ 깊은 호수에 잠겨 있습니다./ 호수가 산을 그 가슴으로 조용히 끌어안고 있습니다./ 천 년 세월 그러합니다.// 이따금/ 선착장을 떠난 쾌속보트가 흰 물보라를 날리며/ 호수 위를 씽씽 달립니다./ 천 년 호수의 눈동자에 한 줄기 그림자가 흔들립니다./ 그러나 잠시…… 그뿐입니다.// 다시 산이/ 깊은 호수에 잠겨 있습니다./ 호수는 지아비를 우러러보는 지어미처럼/ 산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交合의 풍경입니다.//

천 년의 강 / 이수익
나는/ 너의 살 한 움큼씩 뜯어먹고/ 오래 산다/ 너는/ 나의 생생한 피 한 됫박씩 훔쳐 먹고/ 오래 오래 산다/ 나와 너 사이에는/ 차마 죽을 수 없는 천년의 강물이/ 굽이치고 있다/ 사랑아.//

강변에서 / 이수익
저음의/ 흑인가수들이/ 노래 부르는 서러운 이빨같이/ 저 반짝거리는 잎들,/ 새로/ 보겠네.// 그것은 잃어버린/ 유년기의/ 사진첩/ 넘어가는 소리,/ 회상의 어느 小路에다 나를 버려두고/ 다시/ 떠나가네.// 위로/ 단속의 햇빛/ 깔리는 자갈들 相韻하고 있고/ 그 푸른 육안들 마주칠 때// 뼈처럼 삭아버린/ 내 오뇌의 꽃잎/ 또 보겠네.//

추락을 꿈꾸며 / 이수익
최고봉이 수직에 가까운/ 급경사를 이룸으로써/ 하늘의 뜻과 가까워지려는 듯,// 萬年雪 덮인/ 해발 4,478미터의 마터호른 山은/ 오늘도/ 은빛 낭떠러지 빙벽에 매달린/ 알피니스트들을 조용히 거부하듯 밀어 내지만// 저 죽음의 향기에 마취된 이들은/ 벼랑이 뿜는 현란한 추락의 상상력에 몸을 떨며/ 天刑처럼 암벽을 기어오른다./ 세상의 때를 묻히고 싶지 않은/ 고고한 山이 날카롭게 세우는 죽음의 벼랑 아래로/ 아득하게,// 죽음에 취한 이들이 걷는 길이 있다.//

밥보다 더 큰 슬픔 / 이수익
크나크게 슬픈 일을 당하고서도/ 굶지 못하고 때가 되면 밥을 먹어야 하는 일이,/ 슬픔일랑 잠시 밀쳐두고 밥을 삼켜야 하는 일이,/ 저 생(生)의 본능이,/ 상주(喪主)에게도, 중환자에게도, 또는 그 가족에게도/ 밥덩이보다도 더 큰 슬픔이 우리에게 어디 있느냐고.//

절정 / 이수익
아름다움은/ 늘/ 우수이다./ 아름다울수록 그것은 더욱 슬픈 빛/ 외로운 형상/ 눈물겨운 침묵으로/ 위태롭게 제 스스로를 견딘다.// 언젠가는 무너져가야 할 역사의 문전에서/ 지금 눈부시게 빛을 뿜어올리는/ 저 황홀한 넋/ 의/ 배후에,/ 우수는 울음처럼 짙게 심연을 흔든다.// 사랑이여,/ 참으로 눈물 나고 가슴 아픈 사랑이여,/ 우리 어찌/ 이 절정을 견디어내리//

우울한 샹송 / 이수익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풀잎 되어 젖어 있는/ 비애를/ 지금은 혼미하여 내가 찾는다면/ 사랑은 또 처음의 의상으로/ 돌아올까// 우체국에 오는 사람들은/ 가슴에 꽃을 달고 오는데/ 그 꽃들은 바람에/ 얼굴이 터져 웃고 있는데/ 어쩌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얼굴을 다치면서라도 소리내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사람들은/ 그리움에 가득 담은 편지 위에/ 애정의 핀을 꽂고 돌아들 간다/ 그때 그들 머리 위에서는/ 꽃불처럼 밝은 빛이 잠시/ 어리는데/ 그것은 저려오는 내 발등 위에/ 행복에 찬 글씨를 써서 보이는데/ 나는 자꾸만 어두워져서/ 읽질 못하고,//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기진한 발걸음이 다시/ 도어를 노크/ 하면,/ 그때 나는 어떤 미소를 띠어/ 돌아온 사랑을 맞이할까//

이름을 지우면서 / 이수익
나는 오늘 文人住所錄에서/ 그의 이름을 지웠다./ 사람 하나를 지우기란/ 너무 쉬워. 볼펜으로 줄 긋기, 또는/ 살 빠진 가랭이에 묵은 바지를 끼워 입기.// 그리고 나는 더 이상/ 그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대뇌 깊숙이 꽝 꽝 몇 개의 굵은 못을/ 박았다, 사납게. 그를 생각하면/ 갑자기 우리가 함께 씹던 빵이 가슴에서/ 부풀어오르고, 잔을 건네며 마시던 술/ 피가 된 그 술이 다시 한번/ 나를 취하게 만들므로.// 그의 눈이 빛으로부터 차츰 멀어져/ 마침내 깜깜한 어둠의 돌로 굳어졌듯이/ 그의 하얀 몸으로부터 영혼이 떠나면서/ 그리운 불빛 같던 우리의 옛 추억도/ 떠나간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오늘 추억에 관하여/ 비겁해지기로 했다.//

나에겐 병이 있었노라 / 이수익
강물은 깊을수록 고요하고/ 그리움은 짙을수록 말을 잃는 것// 다만 눈으로 말하고/ 돌아서면 홀로 입술 부르트는/ 연모의 질긴 뿌리 쑥물처럼 쓰디쓴/ 이 사랑의 지병을.// 아는가...그대 머언 사람아.....//

편지 / 이수익
참으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것은/ 밤새 꽃망울을 벙글인/ 새벽/ 백목련처럼/ 눈부신 몸짓으로 내게로 와 있는.// 아,/ 말없는 무수한 발언이여/ 백색 찬란한 빛깔이여/ 존재여!// 오늘은 내 오랜 눈물겨운 기다림 끝에/ 너의/ 편지를 받는다.//

거울 / 이수익
겨울바다의 물결이/ 어느 때는 그 연안을/ 휩쓸었을 것이다/ 바람처럼 예감을 몰고오는/ 소리라면 모두가/ 그 깊은 수면으로 흘러들었을 것이다.// 아,/ 지금은 조용한 내계의 얼굴을/ 가진이여./ 내가 무심히 그 앞에 앉으면/ 거울은/ 기억에 들리는 이오니아 앞바다의 물결소리/ 사라져가는 그 해조음으로하여 눈먼,/ 반신의 푸른 석상---// 나는 무엇을/ 연연히/ 그리워하는 것일까.//

나의 고향은 / 이수익
나의 고향은/ 대청마루를 지나 문지방을 건너 안방으로 들어오던/ 눈부시고 따사로운 아침햇살에 있다./ 새벽이면 어머님이 길어 올리시던 우물/ 그 두레박 넘치던 충만에 있다. 물빛/ 맑은 순결에 있다.// 나의 고향은/ 들어도 자꾸만 다시 듣고싶은 옛이야기로 쌓아올린/ 돌각담 길게 이어져간 골목에 있다./ 담 넘어 집집의 뜨락에서 닭들이 쪼아먹던/ 고요한 마을 평화에 있다. 그 무사함에 길들여진/ 단순성에 있다.// 나의 고향은/ 밥 짓는 연기 가물가물 피어오르던 저녁 무렵/ 배고픈 시장기에 있다./ 먼 논밭에서 돌아오는 농부와/ 나뭇짐을 지게 지고 하산하는 아이들이/ 잠시 그리운 눈빛으로 서서 바라보던 원경의 보금자리,/ 그 포근하고 넉넉한 품속에 있다./ 아, 어쩌면/ 지금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 듯한......//

이제는 / 이수익
이제는/ 썰물이 좋다./ 더/ 가득한 때를 바라지 않으리라.// 갯벌에 드러난 추한 상처들/ 다 내 것이고/ 휑하게 뚫린 절망의 공간 또한/ 내 것이니,/ 나를 이 음습한 바닷가에 그냥 있게/ 내버려 두라.// 이제는 다시/ 흡사 저 피의 부름 같은 물결의 소리로/ 나를 취하게 하지 말라.// 숨가쁜 아우성으로 넘칠 듯, 넘칠 듯 차 오르는/ 밀물의 시간이 정말 나는 싫다.//

호수는 조용히 있고 싶어한다 / 이수익
바람이 불 적마다/ 흔들리는/ 나무는,/ 흔들려서 차츰 가지가 굵어지고/ 흔들려서 잎들은 더욱 파랗게 짙어지고/ 흔들려서 뿌리도 더욱 땅속 깊이/ 튼튼히 박히는 것이겠지만// 나는/ 흔들리는 것이 싫다,/ 육지가 먼 곳으로 나를 가두듯/ 별이 뜨는 밤과 해가 솟아오르는 낮,/ 낮의 구름이며 숲과 새들을/ 그저 평온한 가슴으로 바라보고 싶다.// 누구든 나를 가만히 있게 내버려다오,/ 나는/ 저 무지하게 날아오는 돌멩이가 싫다.//

해동(解凍) / 이수익
겨울바람 칼끝 스친 자리에/ 싸늘한 얼음조각 박힌 자리에/ 피는 삭는가 가려움증은 발진처럼 돋아/ 살을 핥퀴는 내 손톱자국의/ 붉은/ 생기(生氣)여//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 너/ 어둡고 긴 겨울의 늪을 지나며/ 학대 받은 억새풀 모진/ 그 가슴으로도/ 찬란한 봄을 맞으리란 것을/ 믿으며, 기다리며, 지내왔구나.// 오오 장한 내 육신/ 오오 장한 만큼 슬픈 내 육신/ 이제 햇빛 따사롭게 날씨 풀리니/ 눈물 밖에 더 날 것 없는 봄날/ 이/ 자유!//

봄에 앓는 병(病) / 이수익
모진 마음으로 참고 너를 기다릴 때는/ 괜찮았느니라.// 눈물이 뜨겁듯이 그렇게/ 내 마음도 뜨거워서,/ 엄동설한 찬 바람에도 나는/ 추위를 모르고 지냈느니라./ 오로지/ 우리들의 해후만을 기다리면서...// 늦게서야 병이 오는구나,/ 그토록 기다리던 너는 눈부신 꽃으로 현신하여/ 지금/ 나의 사방에 가득했는데/ 아아, 이 즐거운 시절/ 나는 누워서/ 지난 겨울의 아픔을 병으로 앓고 있노라.//

봄날에 1 / 이수익
봄에는/ 혼자서는 외롭다, 둘이라야 한다, 혹은/ 둘 이상이라야 한다.// 물은 물끼리 흐르고/ 꽃은 꽃끼리 피어나고/ 하늘에 구름은 구름끼리 흐르는데// 자꾸만 부푸는 피를 안고/ 혼자서 어떻게 사나, 이 찬란한 봄날/ 가슴이 터져서 어떻게 사나.// 그대는 물 건너/ 아득한 섬으로만 떠 있는데.....//

봄날에 2 / 이수익
화냥기처럼/ 설레는/ 봄,/ 봄날이다.// 종다리는 까무라치게/ 자꾸/ 울어쌓고// 산마다/ 피가끓어/ 꽃들 피는데// 아,/ 나는 사랑도 말로 못하는/ 버어리 사내// 봄밤/ 꿈에서만/ 너를 끌어안고 죄를 짓느니......//

차라리 눈부신 슬픔 / 이수익
신(神)은/ 이 아름다운 며칠을/ 우리에게 주셨다.// 생애의 절정을 온몸으로 태우며/ 떨기떨기 피어 오른 하얀 목련/ 꽃잎들, 차라리 눈부신 슬픔으로 밀려 드는/ 봄날!// 나머지 길고 지루한 날들 열려 있어/ 이 황홀한 재앙의 시간도/ 차츰 잊으리.//

한 잔의 기쁨 위에 / 이수익
초봄에는/ 가만히 앉았어도 왠지 눈물겹다/ 봄풀이 돋아나도 그렇고/ 강물이 풀려도 그렇다/ 말없이 서러운 것들/ 제가끔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는 이 길목의 하루는/ 반가움에 온몸이 젖어/ 덩실덩실 일어나 춤이라도 추고 싶다/ 바람같은 언덕을 달리고 싶다// 오오, 환생하는 것들/ 어리면 어릴수록/ 약하면 약할수록/ 나를 더욱 설레이게 하는/ 만남의 희열이여, 무한 축복이여/ 초봄에는/ 가만히 앉았어도 왠지 눈물겹다/ 한 잔의 기쁨 위에/ 또 한 잔의 슬픔처럼//

가을 서시 / 이수익
맑은 피의 소모가 아름다운/ 이 가을에,/ 나는 물이 되고 싶었읍니다.// 푸른 풀꽃 어지러워 쓰러졌던 봄과/ 사련으로 자욱했던 그 여름의 숲과 바다를/ 지나/ 지금은 살아 있는 목숨마다/ 제 하나의 신비로 가슴 두근거리는 때.// 이 깨어나는 물상의 핏줄 속으로/ 나는 한없이 설레이며/ 스며들고 싶습니다.// 회복기의 밝은 병상에 비쳐드는/ 한 자락 햇살처럼/ 아, 단모음의 갈증으로 흔들리는 영혼 위에/ 맺힌 이슬처럼.//

가을편지 / 이수익
네가 오는 것은/ 눈물겨운 기다림만으로 족하다/ 늘 그렇게 생각한다, 이별은 상처처럼/ 깊이 두렵고/ 가슴 저미는 일이지만/ 너는 왔다간 금세 가야 하니까// 내 마음 위로 한닢 바람기 같은/ 뜬소문 같은 흔적이나 남겨 놓고/ 머물렀던 몇날 밤 쌓아올린 정분도 미련 없이/ 서둘러야 하는 발걸음처럼, 총총 떠나 버리는 너,// 그래도 너를 기다리던 지난 여름 숱한 날들은/ 달력에 금을 긋고 바닷물의 간만을 지켜보며/ 한없이 즐겁고 떨리기만 하였는데..../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더 이상 바람이란/ 품어서는 안 될 허튼 나의 욕심/ 네가 잊지 않고 찾아와 주는 것만 해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데,// 아, 젊은 情夫처럼/ 잠시 머물렀다간 훌쩍 가 버리는/ 가을,//

가을에 / 이수익
나를 낳으신 가을에/ 어머니,/ 당신의 옷고름처럼 애정으로 물든/ 과원果園에 하나씩 잎은 지고/ 내 하아프의 금선琴線은 울리고// 잃어버린 연인의 발자욱이 남은/ 계단마다 침몰하는 달빛은/ 이제/ 어두운 눈으로 옛 편지를 읽는다// 아,/ 주위에 뿔뿔이 흩어지는 가랑잎은/ 창으로 와서/ 눈물로도 못 다하는 그림을/ 그리고 가고 ---// 내가 처음 본 가을에/ 어머니,/ 당신의 가장 부드러운 손길마저/ 빈 가지에서 떠나고 있을 동안// 나는 하아프의 금선 琴線 위에 쓰러진다//

낙엽 / 이수익
언젠가는 한 번씩 돌아가야 할/ 착잡한 계절의 질서 속에 서면/ 10월을 상실하는 우리들 마음 허전한 사이로/ 떨어져오는 잎사귀-// 이건/ 오래토록 소망하여 재이던 보람의 사멸인가/ 아니면 아리운 절후(節候)의 신음에/ 부치는 나래 짓 같은 것?// 시시로 소슬한 갈바람 길에 붉게 달은 나뭇잎 져 내린/ 뜨락에 겹겹이 쌓인 낙엽을 밟으면/ 허수히/ 통곡하고픈 이 오후의 햇빛 아래// 오늘은/ 얼룩진 표정으로 참 슬퍼하는 내 누이 모습을/ 탓하지 말자// 한 점 바람만 스쳐도 목숨 다하는 잎/ 나뭇가지 끝엔/ 조용히 흐려가는 내 눈시울//
* 부산사범학교 시절 《학원》 잡지에 우수작으로 실렸던 작품

겨울 초상 / 이수익
못에 빠져 죽은 여자의 얼음/ 사이로 나온/ 손,/ 그 희디흰 손은 가지를 내고/ 햇빛을 받아/ 성장하고 있었다.// 장미꽃처럼/ 타오르는 윤활유의 난로에서/ 사막에서/ 나와/ 그 여자는, 함께 있었던 것일까.// 겨울에 표현되는/ 강/ 유역을/ 빗기어가는 새들---/ 저 이름 모를 영혼의 악사들은/ 나의 지대에서/ 주둔했던 모든 것을/ 거두어 갔다.// 망고와/ 잎사귀 진 나무와/ 조용한 이 계절의 석모夕暮를 노래하는/ 우리 아이들의 식탁에 와서/ 하나씩 잠이 드는 고향.// 못에 빠진 여자는 죽어서/ 손은/ 가지가 되고/ 가지마다 꽃은 난만히 피었는데,/ 누가 겨울철의 이 눈물을/ 그릴 수 있을 것인가.//

우울한 초상 / 이수익
오, 어머니/ 왜 당신은 눈물을/ 글썽이나요?// 왜 당신은 앞으로 바라보질 못하고/ 옆으로만 보시나요?/ 어머니// 그전부터 나는 당신에게서/ 우리는 매일 아름다운 비잔틴을 향해/ 걸어가고 있노라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새들이/ 천상 높이 떠서 노래하고/ 사방에서 꽃들이 악상樂想처럼 피어남을/ 보고// 내가 마치 영광의 정문을 통해/ 입장하려는 걸/ 느끼는데// 오, 어머니/ 당신은 왜 말없이 눈물만/ 흘리나요?//

길일(吉日) / 이수익
보도블록 위에/ 지렁이 한 마리 꼼짝없이/ 죽어 있다./ 그곳이 닿아야 할 제 생의 마지막 지점이라는 듯.// 물기 빠진, 수축된 환절(環節)이 햇빛 속에 드러나/ 누워 있음이 문득 지워진 어제처럼/ 편안하다.// 부드럽고 향기로운 흙의 집 떨치고 나와/ 온몸을 밀어 여기까지 온 장엄한 고행이/ 이 길에서 비로소 해탈을 이루었는가,/ 금빛 왕궁을 버리고 출가했던 그/ 고타마 싯다르타같이./ 몸 주위로 밀려드는 개미떼 조문 행렬 까마득히,// 하루가 간다.//

달빛체질 / 이수익
내 조상은 뜨겁고 부신/ 태양체질이 아니었다. 내 조상은/ 뒤안처럼 아늑하고/ 조용한/ 달의 숭배자이다// 그는 달빛그림자를 밟고 뛰어 놀았으며/ 밝은 달빛 머리에 받아 글을 읽고/ 자라서는, 먼 장터에서/ 달빛과 더불어 집으로 돌아왔다.// 낮은/ 이 포근한 그리움/ 이 크나큰 기쁨과 만나는/ 힘겨운 과정일 뿐이다// 일생이 달의 자양속에/ 갇히기를 원했던 내 조상의 닽빛 체질은/ 지금/ 내 몸 안에 피가 되어 돌고 있다// 밤하늘에 떠오르는 달만 보면/ 왠지 가슴이 멍해져서/ 끝없이 야행의 길을 더듬고 싶은 나는// 아, 그것은 모태의 태반처럼 멀리서도/ 나를 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보이지 않는 인력이 바닷물을 끌 듯이//

상처와 만나다 / 이수익
인도고무나무 손바닥 크기만 한 잎사귀들이/ 고개 싹 돌린 채 변절해 있다. 오늘 아침/ 몇 날 밤의 한파가 겨우 기세를 꺾은 다음/ 베란다로 나가는 창문을 열었더니,// 잎사귀들 사력을 다하듯 따스한 햇살폭포 쪽을 향하여/ 해바라기 한 것이 하도 아픈 뒤틀림이어서/ 저런 배신이라면 아무 말 없이 긍정해주어야 한다고,/ 부드럽게 용서해주어야 한다고,/ 이파리마다 나는 부드러운 눈길로 쓰다듬어주었다.// 머잖아 봄이 와도 저 불구의 몸짓은/ 쉽사리 복원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좌우 균형을 잃은 체형이야 어찌되었든/ 살아야 한다고, 살고 싶다고, 제 육체를 한껏 비틀어/ 버틸 수밖에 없었던 저 단말마의 비명이/ 베란다 차디찬 타일바닥 위로 떨어져 뒹굴고 있다.// 내 입을 닫게 하는/ 고통의 극점이/ 이파리마다 기념비처럼 굳어 있다.//

빈집 / 이수익
뒷마당의 몇 그루 대추나무엔/ 빠알간 대추열매가지 무겁게 열렸건만/ 따는 사람 없어 사람의 것이 아닌/ 하늘의 열매 같고/ 사립문 늘 열린 채 경계를 지운 빈집에는/ 이 방 저 방 기웃거려보는 아이들 앞에/ 머리 가득 푼 처녀귀신 나타날지 몰라/ 삐걱거리는 방문소리에 쭈룩쭈룩 하얗게 소름끼치는// 이 집에 ,그러나 벌레들 편안한 거처 마련되고/ 손닿지 않는 뜨락엔 잡풀들 소리치며 돋아나/ 폐허의 아름다운 향연 한창 벌어지고 있으니// 빈집 ,그 쓸쓸함, 기막히게 좋은 맛이다./ 빈집, 그 황폐함, 눈부시게 좋은 눈요기다./ 빈집, 그 적막함, 가슴 저리게 좋은 위안이다.// 지금, 빈집 한 채 화사하게 버려져 있다.//

폐가(廢家) / 이수익
빈 山幕엔/ 능구렁이처럼 살찐 고요가/ 땅바닥에 배를 깔고 숨을 몰아쉬고 있다./ 흙담이 무너져내려 썩고, 나무기둥이며 문살이/ 오랜 비바람에 썩고 썩어/ 향기로운 부식의 냄새를 피워 올리는,/ 이 버려진 山幕 하나가 고스란히 해묵은 포도주처럼/ 맑은 달빛과 바람소리와 이슬을 먹고 발효하는/ 深山의 특산품인 것을.// 神이 가끔 그 속을 들여다보신다//

초당(草堂) 한채 / 이수익
마음에/ 초당 한 채 짓자./ 혼자만, 혼자서만 있고 싶은 시간/ 은밀히 드나들게/ 마음의 변두리 어느 한적한 터에/ 불빛도 없고, 기척도 없는.//

또 다른 생각 / 이수익
뭉개지는 것도 방법이다./ 세상을 사는 데에는/ 내가 각을 지움으로써 너를 편안하게/ 해줄 수도 있다. 선창에서/ 기름때 묻은 배끼리 서로 부딪치듯이/ 부딪쳐서 조금 상하고 조금 얼룩도 생기듯이/ 그렇게, 내 침이 묻은 술잔을 네가 받아 마시듯이/ 자, 자, 잔소리 그만하고 어서 술이나 마셔!/ 취한 기분에 붙들려 소리를 버럭 내지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시간도 참으로 소중하고/ 그래서는 안 되는 관계도 소중하다./ 시퍼렇게 가슴에 날을 세우고/ 찌를 듯이 정신에 각을 일으켜/ 스스로 타인 절대출입금지 구역을 만들어 내는 일/ 그리하여 이 세상을 배신하고 모반하는 일은/ 네게는 매우 소종한 덕목이다./ 안락한 일상의 유혹을 경계하고 저주하라, 그대/ 불행한 시인이여.//

 

늦은 점심 / 이수익

당신의 몸이/ 하얀 뼈로 타오르고 있을 동안/ 우리는 화장장 구내식당으로 찾아가서/ 늦은 점심을 함께 했지요/ 당신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우리끼리 설렁탕을 시키고, 육개장을 시켜 먹으며/ 남아 있는 목숨을 건사했지요/ 소주도 한잔씩 돌렸어요/ 당신이 화로에서 살과 뼈를 태우고 있을/ 동안이 아니면 영영 식사시간을 놓치게 된다면서/ 불같이 점심 한 그릇을 뚝딱 비웠지요/ 당신과 나눈 식사가 바로 며칠 전이어서/ 생각하면 가슴이 메어 숟가락을 내려놓아했는데도/ 아아, 당신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거역할 수 없는 사실로 받아들이면서부터/ 슬픔보다는 눈앞의 배고픔이 더욱 절실했거든요/ 이런 우리가 밉지 않았나요?// 누님//

저녁 무렵의 시 / 이수익
자신이 살고 있는 숲을 한 번도 떠나 본 적이/ 없는 새는 눈 감아도/ 그 숲의 사계四季를 알고// 자신이 살고 있는 늪을 평생 떠나 본 적이/ 없는 물고기는 잠을 자는 동안에도/ 그 늪의 조류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새는/ 더 큰 숲의 이야기를 알지 못하고/ 물고기는 더 깊은 늪의 흐름을 헤아리지 못한다.// 그러나, 또한/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더 많이 안다고 하는 것은?// 오늘은 하늘에/ 무덤을 만드는 새 한 마리/ 빠르게 해가 지는 쪽으로 떨어지고 있다.//

한 마리 새가 / 이수익
공중을 높이 날기 위해서는/ 바람 속에 부대끼며 뿌려야 할/ 수많은 열량들이 그 가슴에/ 늘 충전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보라, 나뭇가지 위에 앉은 새들은/ 노래로서 그들의 평화를 구가하지만/ 그 조그만 몸의 내부의 장기들은/ 모터처럼 계속 움직이면서/ 순간의 비상이륙을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오, 하얀 달걀처럼 따스한 네 몸이 품어야 하는/ 깃털 속의 슬픈 두근거림이여.//

새 / 이수익
한 마리의 새가/ 공중을 날기 위해서는/ 바람 속에 부대끼며 뿌려야할/ 수많은 열량들이 그 가슴에/ 늘 충전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보라, 나뭇가지 위에 앉은 새들은/ 노래로써 그들의 평화를 구가하지만/ 그 조그만 몸의 내부의 장기(臟器)들은/ 모터처럼 계속 움직이면서/ 순간의 비상 이륙을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오, 하얀 달걀처럼 따스한 네 몸이 품어야 하는/ 깃털 속의 슬픈 두근거림이여//

붉은 말 / 이수익
붉은 말이 달리고 있다/ 붉은 그 피가 뛰고 있다/ 붉은 혓바닥이 한없이 펄럭이고 있다/ 좀처럼 멈출 것 같지 않은 그 말의 재빠른/ 건각(健脚)이, 죽음을 훨씬 벗어나 성큼성큼 물어뜯는/ 부푼 말의 기운이, 결코 화해할 수 없는 그 말의/ 시퍼런 절망이/ 앞을 건너뛰며 던지는 나의 질문에/ 답할 수 있을까, 없을까를 알아보기도 하는 것이지만// 참으로 붉은 말이 달리고 있다는 것/ 붉은 그 피가 뛰고 있다는 것/ 붉은 혓바닥이 한없이 펄럭이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울부짖는, 자유 같아서!//

산갈치 / 이수익
세상에서/ 가장 긴 물고기들이 찬란하게/ 퍼덕였다/ 선홍색 번쩍이는 띠를 두르고서/ 움직일 때는 반듯이 일어서서 나아가는 그 모습이/ 물속에서 하늘의 계시를 보는 듯/ 영롱하였다// 바다에서 산으로, 또는 산에서 바다로/ 비행하는 순간이 있었다 그때는/ 그 몸의 신비의 일체를 온통 드러내는/ 일대 거사였다/ 보일 듯, 보이지 않을 듯/ 경련으로 떨리는 눈부신 비상의 한 장면이었다// 나는 지금/ 산갈치의 꿈을 꾸고 있다/ 나를 바라보는 이 세상 사람들의 눈이/ 온통 캄캄하게 어둠 속에 잠겨버리도록, 그리고/ 거대한 불기둥이 청천벽력처럼 나를 휘몰아치기를/ 성급히/ 기대하면서//

들고양이 / 이수익
놈은 필시/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격랑에 치어/ 원통하게,/ 한을 품고 숨진 어느 사대부의/ 넋의 재현임이 분명하다.// 밤의 컴컴한 화단이나/ 아파트 주차장 숨죽인 차들 사이에서/ 느닷없이 불쑥 나타나는, 무슨 자객 같은/ 놈은 나와 맞딱드리는 순간 멈칫하는 듯도 싶지만/ 그러나 결코 도망가는 법 없이, 민첩한 몸을/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다. 날카롭게 나를/ 쏘아보면서.// 이제는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히 보복하리라는 일념만이/ 놈의 저 검은 등줄기 위로 털을 꼿꼿이 서게 하고/ 적의에 떨리는 몸을 바짝 웅크리게 하고/ 동그란 두 눈엔 인광처럼 새파란 불을 켜서/ 저주의 불꽃을 날리게 만드는 것이다. 들고양이,// 오늘밤에도 三生을 건너뛰며/ 어둠의 내부를 샅샅이 뒤지고 있는/ 저/ 불운한 피의 테러리스트.//

고양이 엘르 / 이수익
고양이 엘르는 강한/ 눈빛을 번쩍이며, 앞으로 조금/ 옆으로 조금/ 살펴보고 있다, 바짝 고개를 수그린 채/ 고요히 떠오르는 물체를 향하여, 소리 죽여// 부서질 듯 어금니/ 꽉 물고/ 이번만이야, 달아오르는 유혹에 가득 침 흘리며/ 조금씩 더 앞으로, 조금씩 더/ 앞으로/ 움직이는// 고양이 엘르/ 푹신한 이불 위에서 느긋하게 눈 뜨다가, 덤벼드는/ 어린 아이 장난감을 물어뜯기도 하고/ 얼른 제 몸을 옆으로 뒤집기도 하고, 함부로 껴안기도 하면서/ 시간은 수평적으로, 좌우방향 없이, 뒹굴어 가는 것이라는/ 사실에 혼곤히 적셔진 채, 목적도 없이 부드러운 제 살결을/ 자꾸만 어루만지던, 그 어리석음과 나태함을 멀리 떠나서/ 뛴다, 엘르,/ 폭풍처럼/ 순간의 기미를 놓침이 없이/ 저 앞서 달리는 날쌘 쥐의 등 쪽을 내리칠 듯이/ 파닥이는 가슴 쪽을 바싹 후려갈길 듯이/ 처음으로 다가서는 비릿한 약탈의 냄새 후루륵 끼치며/ 오른 발로 쥐를 붙들어/ 맨다// 한번만에!/ 너의 무서운 본능이/ 뛰쳐나왔다//

아직 우리는 말하지 않았다 / 이수익
나는 강물에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강물도 내게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본 것은/ 순간의 시간, 시간이 뿌리고 가는 떨리는 흔적,/ 흔적이 소멸하는 풍경일 뿐이다.// 마침내 내가 죽고, 강물이 저 바닥까지 마르고,/ 그리고 또 한참 세월이 흐른 다음에야/ 혹시, 우리가 서로에게 하려고 했던 말이 어렴풋이/ 하나 둘 떠오를지 모른다. 그때까지는/ 우리는 서로 잘 모르면서, 그러면서 서로/ 잘 아는 척, 헛된 눈빛과 수인사를 주고받으며/ 그림자처럼 쉽게 스쳐 지나갈 것이다. 우리는/ 아직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문(門) / 이수익
여자가/ 사내의 몸을 가로 질러/ 그 사내의 목이 기우뚱, 왼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것./ 여자가 더욱 집중적으로, 품위 있게/ 탐닉하고 있는 것은/ 저들 스스로의 에로티시즘의 황홀한 기교가/ 지극히 파괴적이라는 것./ 그녀는 왼쪽 팔로 사내의/ 수세에 밀린 듯한 입맞춤에 기꺼이 동조하려는 듯/ 깊고 깊은 언덕 아래로 자기 몸을 내던지는, 불가피한 수난을/ 당하고 있다는 것.// 청동으로 된/ 여자와 남자가/ 하나로 엮어진 채/ 문(門)이라는 이름으로, 너무나도 뜻밖에//

회전문 / 이수익
대형 빌딩 입구 회전문 속으로/ 사람들이 팔랑팔랑 접혀 들어간다/ 문은 수납기처럼 쉽게/ 후루룩 사람들을 삼켜버리고/ 들어간 사람들은 향유고래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간/ 물고기 떼처럼 금방 잊혀진다/ 금방 잊혀지는 것이 그들의 존재라면/ 언젠가는 도로 토해지는 것은 그들의 운명,/ 그들은 잘 삭은 음식 찌꺼기 같은 풀린 표정으로/ 별빛이 돋아나는 시간이나, 또는 그 이전이라도 회전문 바깥으로/ 밀려난다/ 그렇다니까, 그것은 향유고래의 의지 때문이 아니라/ 빨려들어간 물고기 떼의 선택 때문이지/ 오로지 그들 탓이라니까/ 그러나 대형 빌딩은 이런 무거운 생각과는 멀리 떨어져/ 하루종일 팔랑팔랑 회전문을 돌리면서/ 미끄러운 시간 위에서 유쾌하게 저의 포식을 노래한다/ 룰루랄라 룰루랄라 룰룰루......// 지금은 회전문의 움직임이 완고하게 멈춘/ 시간, 대형 빌딩은 수직의 화강암 비석처럼 깜깜하게/ 하늘에 떠 있다/ 낮에 삼켰던 사람들의 머리에서 솓아져 나온 생각과/ 말들, 일거수일투족의 그림자, 그들의 홍채와 지문까지/ 다시 기억을 재생하고 판독하고 복사하고 지우면서/ 대형 빌딩은 눈을 감고도 잠들지 않는다/ 회전문은 묶여 있어도, 그렇다고 쉬는 것도 아니다//

처음으로 사랑을 들었다 / 이수익
한 여성은/ 드디어 고막이 터져버렸다네, 깊고 캄캄하게,/ 너그러운 휴식을 맞이했다네, 아무렇게나 들을 수 없는/ 편안함이 그의 몸속으로 흘러들면서, 오래 오래,// 처음으로 그는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네, 처음으로 그 세상의 남자가/ 여자를 만나서 온몸과 마음을 울리며 하던 말,/ 참으로 눈부신 열애의 고통을 떨어뜨리며/ 울부짖던 말, 한없이 숨 가쁜 사랑의 묘약이/ 백년이고 이백년, 삼백년을 거듭 견디며 내뱉던 말,/ 황홀한 눈물 없이는 차마 못 들을 그런 말, 말, 말,// 강렬한 입맞춤은 귀의 내이 사이에서 공기압력에/ 불균형을 가져와 고막이 터져버린다는 것인데,/ 그런 ‘푸’ 하는 소리와 함께 세상의 모든 소리들은/ 꺼지고 사라지고 말아, 그럼으로써 한 여성은 참으로/ 세상에서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네,// 오래 오래 무너져 내려야 할/ 거대한/ 사랑의 지옥 같은 것!//

나무에게 말걸기 / 이수익
나무는/ 뿌리가 땅속으로 어느 정도/ 박혀 있음으로써/ 그것이 처음, 세상을 향하여 발길질해 나올 때처럼/ 푸릇푸릇 꿈을 먹은 듯하지만// 글쎄, 그 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면/ 높이높이 떠오를수록 나무는 점차 뿌리가 작아져서/ 사람들은/ 줄기와 잎사귀, 꽃잎에게서 활짝 발화하는 흥망성쇠의/ 눈부신 주류와 개별적인 빈부를 한창 그려 낼 뿐/ 혹은 구름, 바람, 빗줄기들이 던져 줄 터무니없는/ 시중 루머나 스캔들에 온몸 달아올라/ 사람들은 그런 일로만 나무를 늘 기억할 뿐/ 그리하여 한 번 다시, 나무를 죽여 버리기 위해 나선다는 것을// 나는 생각하네, 저 뿌리의 힘으로 말해야 할 것들/ 거친 숲에 휘감겨서 우중충하게 말 못하는 것들/ 여전히 살아 있듯/ 뿌리가 없으면 세상에 더 일어설 수도 없다는 것을/ 한 번 더 보여주자는 듯// 나는 나무를 글썽이며, 이야기하네//

닫힌 입 / 이수익
입을 봉하라. 당신의/ 풀렸던 정신을 꽁꽁 옭아 매고 이제는/ 마음을 단속하라. 그동안 너무 많이/ 지껄였으니, 텅 빈 구석 더러 생길 법/ 했을 듯./ 입을 봉하라, 차라리 그전이 더욱 그리웠던 것처럼/ 최초의 이전으로/ 돌아가라./ 보다 더 커다란 믿음이 당신을 누르고서 지배할 수 있도록/ 어둡게, 끝이 보이지 않도록/ 멀어져라. 당신의 눈과 귀와 입이/ 온통/ 허물어질 때까지//

오체투지 (五體投地) / 이수익
몸을 풀어서/ 누에는 아름다운 비단을 짖고// 몸을 풀어서/ 거미는 하늘 벼랑에 그물을 친다// 몸을 풀어서/ 몸을 풀어서/ 나는 세상에 무얼 남기나// 오늘도 나를 자빠뜨리고 달아난 해는/ 서해바다 물결치는 수평선 끝에/ 넋 놓고 붉은 피로 지고 있는데.//

이 나이쯤의 편애 / 이수익
내 마음속에/ 누런 구렁이 한 마리 살고 있네./ 휘번뜩이며 시퍼런 갈구의 뿌리/ 어디 몸 둘 곳 몰라 서성이고 있네./ 입을 벌리면 두 편으로 갈라터진 혓바닥으로부터/ 서늘한 냉기와 긴 엄습함이 불타오를 듯/ 숨죽이고 있는 이 편애의 고집/ 나는 사랑하리// 최후의 쇠사슬에/ 몸을 가득 묶고서/ 어디 갈 곳 없는가, 숨찬 서성거림으로/ 기다랗게 도 한번 목을 늘려서 바라보는// 이 나이쯤의/ 견고한 결핍, 또는 위태로운 사랑.//

애월 / 이수익
제주에 가면 꼭 한번 가보라던/ 애월, 그 바닷가 마을은/ 결국 가보질 못했다.// 파란 바닷빛이 눈부시게 아름답다던/ 네 말이 무슨 비망록처럼 자주 떠오르곤 했지만/ 제주가 초행인 아내를 위해서는/ 성산일출봉과 민속촌, 정방폭포, 산굼부리 등속의/ 관광명소를 먼저 보아야 했으므로/ 결국 그 곳은 가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잘된 일,/ 애월은 이제 “다음에......” 하고 내 가슴 깊이 묻어둘/ 애틋한 그리움의 한 대상이 되었으므로/ 미지의, 선연한 푸른 바다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오랜 날들을 나는 즐겁게 시달리리라.// 애월, 가슴에 품고 싶은/ 작은 기생妓生 같은,/ 그 이름 떠오를 적마다.//

검은 抒情 -변시지의 제주풍화집에서 / 이수익
제주/ 바닷가에는/ 까마귀떼만 자욱하다./ 耳鳴같은 파도소리에 묻히는/ 까마귀떼 울음소리만 자욱하다./ 해 뜨기 前,/ 예감의 시간에 바닷가로 나온/ 검은 점술의 巫女들이 부르는/ 降神의 휘파람 소리,/ 휘파람 소리만 자욱하다./ 솟구치는 파도의 이랑보다 더 깊은/ 저 生者와 죽은 이의 靈界를 넘나들며/ 슬픈 혼백들을 달래는.....//

내 마음 안에 구릉(丘陵)이 있다 / 이수익
대지는 하늘을 향해 높이/ 솟구치려 하고/ 하늘은 대지의 상승욕구를 힘껏/ 억누르려 하고// 상승하려는 그 힘과/ 억압하려는 또 하나의 힘이 부딪쳐서/ 서로/ 화해를 이루지 못한 채 굳어져버린,// 산맥은/ 하늘과 땅 사이에 맺어진/ 슬픈 휴전지대,/ 그 날의 욕망과 고뇌가 깊은 주름살로 멈춰/ 서 있는 것을// 나는 알지,/ 내 마음 안에도 잠든 옛 구릉들이 있기에//

그날 밤 / 이수익
힘껏 / 돌멩이를 날렸다 / 지붕들이 바싹 깨어질 듯 울어대던 그날 / 밤, / 분노의 파열음이 하얗게 / 하얗게 솟아올랐다// 우리 집 너머 앞집 지붕 지나 또 다른 지붕/ 위로, 무수히 많은/ 지붕 위로/ 나는 새파랗게 힘찬 돌멩이를 날려 보냈다/ “어떤 놈의 새끼가 돌을 던지노, 이 나쁜 놈의 새끼가....”/ 불어터진 화를 삼키지 못한 동네 주민들이 집집마다/ 뜰에 나와서 아우성치던/ 바로 그날/ 밤,// 집 빈터에 내려앉아 소리 없이 나는 울었다 / “순이 계집애, / 널 떠나지 못하도록 내가 붙잡았어야만 했는데”//

승천 / 이수익
내 목소리가/ 저 물소리의 벽을 깨고 나아가/ 하늘로 힘껏 솟구쳐 올라야만 한다.// 소리로써 마침내 소리를 이기려고/ 가인(歌人)은/ 심산유곡 폭포수 아래서 날마다/ 목청에 핏물어리도록 발성을 연습하지만// 열길 높이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쉽게 그의 목소리를 덮쳐/ 계곡을 가득 물소리 하나로만 채워 버린다.// 그래도 그는 날이면 날마다/ 산에 올라/ 제 목소리가 물소리를 뛰어넘기를 수없이 기도하지만,/ 한 번도 자세를 흩트리지 않는/ 폭포는/ 준엄한 스승처럼 곧추앉아/ 수직의 말씀만 내리실 뿐이다.// 끝내/ 절망의 유복자를 안고 하산한 그가/ 발길 닿는 대로 정처없이 마을과 마을을 흘러다니면서/ 소리의 승천을 이루지 못한 제 한(恨)을 토해냈을 때,// 그 핏빛 소리에 취한 사람들이/ 그를 일러/ 참으로 하늘이 내리신 소리꾼이라 하더라.//

꽃 / 이수익
꽃은/ 누가 죽어가는 시간에/ 피어나는 것일까,/ 그 사람이 힘없이 손짓하던/ 부름은/ 말하지 못한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여,/ 피어나는 것일까.// 꽃이 피는 시간에/ 그 주위에서 일어나는 바람은/ 또/ 무엇일까,/ 꽃 가장이를/ 예감처럼 돌다가 사라지는 빛은// 아, 꽃은 결국 무슨 뜻으로/ 저리도 선명한 빛깔로 내게/ 다가오는가./ 꽃은/ 누가 죽어가는 시간에/ 피어나는 것일까,/ 그 사람이 힘없이 손짓하던/ 부름은/ 말하지 못한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여,/ 피어나는 것일까.// 꽃이 피는 시간에/ 그 주위에서 일어나는 바람은/ 또/ 무엇일까,/ 꽃 가장이를/ 예감처럼 돌다가 사라지는 빛은// 아, 꽃은 결국 무슨 뜻으로/ 저리도 선명한 빛깔로 내게/ 다가오는가.//

산수화(山水畵) / 이수익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산 하나/ 제 갈 길에 취한 계곡물 하나가/ 서로 잘 만나/ 단란한 일가一家를 이루며 사는 곳./ 남루도 이쯤이면 괜찮다,/ 수척한 배낭 메고 입산하는 중늙은이/ 하나/ 가물가물 흔들리며 가는 한중閑中.//

안개꽃 / 이수익
불면 꺼질 듯/ 꺼져서는 다시 피어날 듯/ 안개처럼 자욱히 서려 있는/ 꽃.// 하나로는 제 모습을 떠올릴 수 없는/ 무엇이라 이름을 붙일 수도 없는/ 그런 막연한 안타까움으로 빛깔진/ 초변의/ 꽃//

연꽃 / 이수익
아수라의 늪에서/ 오만 번뇌의 진탕에서/ 무슨/ 저런 꽃이 피지요?// 칠흑 어둠을 먹고/ 스스로를 불사른 듯 화안히/ 피어 오른/ 꽃.// 열 번 백 번 어리석다./ 내 生의 부끄러움을 한탄케 하는/ 죽어서 비로소 꽃이 된 꽃.//

꽃잎처럼 / 이수익
그냥 그대로/ 죽고 싶을 때가 있다./ 더 이상을 바라지 않을 시간,/ 더 이하를 바라지 않을 시간에/ 그대로 멈춰,/ 꽃잎처럼 하르르 마르고 싶을 때가 있다.//

과수원 / 이수익
1/ 과수원에 가면/ 나도 한 마리 벌레가 되고 싶다// 해맑은 아침이슬 먹고/ 푸른 달빛 먹고/ 흠뻑 향기가 무르익어가는/ 과일과 과일,/ 그 열망에 빛나는 눈빛 사이를/ 느리게, 아주 느리게/ 기어다니고 싶다// 2/ 과수원에 바람 부는 날은 잎새에 매달려 춤이나 추고/ 과수원에 비 내리면 후둑후둑 빗소리에 가슴을 열고/ 과수원에 번개치면 날은 깜깜한 맹목으로 엎드려 있으면서/ 나도 자랄 것이다. 조금씩 키가 크는 아이처럼// 3/ 그리고 마침내/ 단물이 흘러넘쳐 무거워진/ 과일이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해 뚜우뚝/ 떨어져내리면/ 나도 떨어져 스밀 것이다, 부드러운 흙 속에/ 내 향기로운 몸을 묻으면서//

결빙의 아버지 / 이수익
어머님,/ 제 예닐곱 살 적 겨울은/ 목조 적산가옥 이층 다다미방의/ 벌거숭이 유리창 깨질 듯 울어대던 외풍 탓으로/ 한없이 추었지요, 밤마다 나는 벌벌 떨면서/ 아버지 가랑이 사이로 시린 발을 밀어넣고/ 그 가슴팍에 벌레처럼 파고들어 얼굴을 묻은 채/ 겨우 잠이 들곤 했었지요// 요즈음도 추운 밤이면/ 곁에서 잠든 아이들 이불깃을 덮어주며/ 늘 그런 추억으로 마음이 아프고,/ 나를 품어주던 그 가슴이 이제는 한 줌 뼛가루로 삭아/ 붉은 흙에 자취없이 뒤섞여 있음을 생각하면/ 옛날처럼 나는 다시 아버지 곁에 눕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머님,/ 오늘은 영하의 한강교를 지나면서 문득/ 나를 품에 안고 추위를 막아 주던/ 예닐곱 살 적 그 겨울밤의 아버지가/ 이승의 물로 화신해 있음을 보았습니다./ 품 안에 부드럽고 여린 물살은 무사히 흘러/ 바다로 가라고,/ 꽝꽝 얼어붙은 잔등으로 혹한을 막으며/ 하얗게 얼음으로 엎드리던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또다른 절벽 앞에서 / 이수익
<나의 시를 말한다>는 깜깜한 암흑 속을 걸어 나가는 말과도 같다. 정처 없이 헤매다 보면 무엇인가에 부딪칠 것 같은 예감이 번쩍거리는 가운데서 나의 시는 불안하게 쉬고 있다./ 칠흑의 어둠! 까마득한 심연 속에 울려 퍼지는 무수한 공명은 나의 심장를 거쳐 세포 곳곳에 퍼져 나가는 느낌을 주니까./ 사실 나는 그저 시를 쓰기 좋은 곳에서 시를 썼고, 시는 내 몸 전체를 관통하는 희열과 기쁨을 나에게 안겨 주었다. 그래서 시를 버리는 일은 나를 버리는 일인 것처럼 거기에 매달려서 살아 왔다./ 그것은 과연 무엇이었는가를 되뇌어 생각해 보면, 무엇이라고 꼬옥 잡히는 것이 없다는 말이 더욱 절실한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안개 속에 무슨 물체가 있는 듯이 허우적거리면서 시를 써 왔던 것이다. 그런 것들이 벌써 50년 세월을 넘어 섰다./ 맨처음의 어둠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젊음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내 시의 주제였던 것 같다. 모호하고 환상적인 아름다움이 내 시를 지배했다. 그러고 나서 사물에 대한 관심과 인식이 분명해지면서 사물시에 대한 매혹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 다음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라보고 그속에 떠 있는 나를 그려내는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이러한 과정이 내 시에 조금씩 변모를 가져오면서, 좀처럼 바뀌지 않을 내 시를 이만큼 변화시켰던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단연코 시를 잘 모르면서 쓰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무엇인가를 모르면서 가고 있는 방향을 더듬어 가는 시가 바로 오늘날의 나의 시가 아닐까 싶다. 그것은 칠흑의 어둠을 파헤치며 이 길이 정도(正道)가 아닐까 헛짚어 보는 우매함이 나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끝없이 나락에 빠져들면서 거듭 새로워지고 싶은 바람이 나를 지탱케 하는 그런 셈이다./ 요즘 들어서 더욱 그렇다. 내가 가 보지 않은 다른 멀 길에, 나의 그리움이 유독 피어남을 느낀다. 내가 한 번은 가 보아야 할 지점이 새삼 그리운 것이다. 넘어야 할 또다른 절벽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장작패기 / 이수익
장작을 팬다,/ 야성의 힘을 고눈 도끼날이 공중에서/ 번쩍/ 포물선으로 떨어지자/ 부드러운 목질에는 성난 짐승의 잇자국이 물리고/ 하얗게 뿜어 나오는 피의/ 향기,/ 온 뜰에 가득하다.// 물어라, 이빨이 아니면 잇몸으로라도/ 저 쐐기처럼 박히는 금속의 자만을/ 물고서 놓지 말아라./ 도끼날이 찍는 생목은 엇갈린 결로써 스크럼을 짜며/ 한사코 뿌리치지를 거부하지만/ 땀을 흘리며 숨을 몰아쉬며 도끼날을 뽑아 가는/ 사내의 노여움은 어쩔 수 없다.// 쿵, 쿵,/ 울리는 처형(處刑)의 뜰 모서리를/ 지우듯 덮어 오는 하오의/ 그늘.//

불꽃의 시간 / 이수익
관현악이 일제히 숨을/ 멈추자/ 바이올린 독주자는 발끝을 들어올린 채/ 끊어질 듯한 음계를 오르내린다.// 그의 심장과/ 폐, 내장이 먼저 불붙기 시작하더니/ 끝내는 그의 온몸이 송두리째 화염으로 타올라/ 무대 위에는 유일신처럼 독주자만 있을 뿐,/ 나머지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없다.// 격렬한 조명 앞에 하얗게 노출된/ 그는, 순교자처럼 비장하다./ 한 발자국 물러설 수 없는 발걸음을 디뎌/ 완벽하게 죽음의 벼랑 끝을 밟고/ 지나가야 한다.// 펄럭이는 불꽃/ 그늘이/ 침묵하는 청중들의 가슴 위로/ 철렁, 내려앉는다.//

이따위, 라고 말하는 것들에게도 / 이수익
물이 스미지 않을 적엔 스스럼없이/ 쉽게 떨어졌지만/ 그 몸에 물기가 점점 번져들자 종이 두 장은/ 마주 달라붙어, 서로를 견인하게 되었다.// 축축해진 두 몸이 혼신으로 밀착하여/ 한 쪽을 떼어내자면 또 다른 한 쪽이/ 사생결단,/ 먼저 자신을 찢어놓으라는 것이다.// 이따위 종이쪽지에도 이별은/ 고통 없이는 없나 보다.//

틈 / 이수익
문틈 사이로/ 처음엔 너무나 아귀가 잘 맞아서/ 좋은 궁합이었던 문틈 사이로/ 어느새/ 틈이 벌어졌다. 화해가 먹혀들지 않는다.// 둘 사이를 힘껏 끌어다 붙여도/ 절대, 다시는,/ 재결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이 부리는 심술/ 별거(別居)의 틈새가 사납다.// 영원히 함께! 약속으로/ 입맞춤할 수 있는 일 아무 것도 없다./ 눈부시게 천년 누대(千年累代)를 떠받쳐온 종탑도/ 수백만 년 견뎌온 저 산 암벽덩어리도/ 결국은/ 균열 가고, 틈이 벌어지는 것이니// 서로 멀어질 수밖에 없다./ 젊은 날 피로써 사무쳤던 붉은 인연이여!/ 맞이하자, 기꺼이,/ 저 치밀하고도 집요하게 시간이 밀어내고 있는/ 우리 사이 슬픈 틈새를.//

 

다락방 / 이수익 

혼자만의 공기를 쉼 없이 들이킬 수/ 있는, 마디마디 뼛속을 깨끗하게 비울 수/ 있는, 타인들을 멀리하고 오로지 자신만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바로 그런 곳/ 그런 자리/ 그런 분위기/ 속으로// 나를 눕히고 싶어./ 아무도 쉽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 텅 빈 고요만이 물결치는 숨겨진 조그만 방,/ 그 다락방의 은밀한 초대에/ 가득히 누워// 온전하게 나는/ 새로워지고 싶어./ 떠오르는 비행기처럼 나는 훨훨 날아갈 거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행복한 사탕을 오래오래/ 빨면서, 머너먼 우주의 끝을 따라 날 거야.// 다락방, 언제라도 나를/ 눕히고 싶은/ 환상의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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