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공고판 앞에서/박영근
除隊를 하고, 세월도 믿음도 무심히 멱살을 잡고 흔들던 스물다섯 계급장을 떼고도
나는 갈 곳이 없었다.
바람 불면 허수아비 제 가슴을 치는 가을 저녁답, 어머니 또 우시고
높은 굴뚝에서는 연기가 솟아올랐다 잘 다려진 작업복을 끌고 어쩌다
계집아이들이 크래카를 씹으며 지나갔다 가로수 가지마다 매달려 떨고 있는 하나, 둘
눈물방울 같은 잎새들 이른 아침 누이의 세수대야엔 붉은 피가 자꾸만 번졌다
발 밑에서 으깨지는 비명소리, 나뭇잎들
들판이나 한 번 둘러보고 가거라
갯벌이나 한 번 또 한 번 돌부리에 넘어져 어머니
검정치맛자락에 피가 흘렀다
여전히 굴뚝에서는 연기가 솟아올랐다
출신도 전북 본적지 서해중학교졸업
고향도 두고 사랑마저 등진 신세가 핸드카를 밀면서 울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부르면 고향은 조막손 아프게 찌르던 낫자욱들
잘살자 진성전자공원들아 어둡게 화장실 낙서 같은 곳에서도 얼어붙고
오줌을 갈기며 얼어붙은 아랫도리로
이름을 써 갈기며 군대 삼 년 몸으로 때워나가자 개새끼처럼 웃던 날들
모집공고 위에도 눈발은 내려쳤다
내려앉고 싶었다 이력서도 구겨버리고 문득 공고판 아래 얼어붙는 어머니
엉겅퀴 들판도 밀어버리고
등 뒤론 움켜쥔 손 마디마디 풀며 떠오르는 눈송이들
하얗게 쌓여가는 불빛들 내려앉고 싶었다
엎드려서 감출 수 있는 것은 눈물들뿐일까
전봇대 같은 곳에 기대여 바라보면 어느새
눈발 그친 곳에서도 불빛은 흐려지고, 누이여
흩어지고 어디로 또 떠나는 밤기차소리에도 부서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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