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심從心의 시, 여유와 달관의 단수(좋은시조 2022 여름호)
정용국 (시인 좋은시조 편집주간)
백세 인생 시대의 도래는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다양한 변화를 초래하였고 이에 따른 새로운 대책을 시급하게 요구하고 있다. 가장 커다란 변화는 인구의 노령화에 따른 복지와 의료 서비스의 확충일 것이다. 더구나 세계 최저의 출산율로 인한 인구 불균형 현상도 우리 사회가 극복해야 할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50년 전만 해도 평균수명이 50세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그 두 배에 달하는 수명을 누리게 되면서 인생의 모든 기준점도 이동하고 있다. 결혼 연령이나 퇴직의 시기도 10년 이상 뒤로 밀려나면서 공자 시대에 불렸던 약관이나 불혹, 또는 이순 등의 호칭도 상당한 조정이 필요할 것이라는 사실에 공감이 가는 것이다. 작년 기준으로 한국시조시인협회의 회원 75%가 65세 이상의 고령이라는 사실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70세를 종심從心이라 하는데 지천명知天命을 거쳐 이순耳順에 이르니 드디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해도 지나침이 없다는 뜻이다. 요즘 70이라는 연치는 인생 정점에 해당한다. 학식과 경륜이 최고점에 이르며 가정도 안정을 이룬 화평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요즘 어느 문학지든 종심의 시인들 작품으로 늘 풍성하다. 『좋은시조』 봄호에 실린 그들의 시를 살펴본다.
억센 잡풀에 묻혀 파밭을 엎은 적 있네
아무리 뽑아내도 영토를 넓히는 잡풀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잘도 크는 가시처럼
지성찬 「잡풀과 가시처럼」 《좋은시조》 ,2022, 봄호
인간 70세의 나이는 여유롭다. 직장의 힘든 굴레에서 벗어나 여생을 새롭게 누리고 있으며 가정의 번거로움에서도 해방되어 단출하게 부부의 삶을 즐기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과거를 반추하고 추억을 소환하여 들여다보며 여유로운 성찰의 시간을 누릴 수도 있다. 지성찬 선생은 서울을 떠나 일산의 교외에서 작은 텃밭을 가꾼다. 그 소소한 일상에서도 시심을 일궈 깊은 자성의 밭도 함께 가꾸는 모습이 여유롭다. “아무리 뽑아내도 영토를 넓히는 잡풀”로 파밭을 엎으며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잘도 크는 가시”를 연상한다. 잡풀은 파밭을 망치고 가시는 마음을 해친다는 사유는 젊은 청춘이 깨닫기에는 어려운 각성이다. 나이를 먹는 것이 모두 허망하고 무기력한 것만은 아니어서 그 서늘한 연륜의 깊이는 또 다른 매력이 숨어있다. 청춘의 시절에는 혈기로 왕성해서 모든 일이나 계획을 순식간에 처리할 뿐만 아니라 그 성과에 대해서도 일희일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노년의 삶은 모든 면에서 서행이고 서두르지 않으며 작고 사소한 일상에서도 스스로 재미와 행복을 찾아낼 줄 안다. 그래서 잡풀을 힘겹게 뽑으며 땀을 흘리고 마음의 가시를 다스릴 줄 아는 것이다.
품에 꼭 안길 듯이
하얗게 밀려들다
팔 벌려 다가서면
저만치 쓸려가는
파도야
너의 등 너머엔
못 잊은 얼굴 있단다
홍오선 「생각날 때마다」 《좋은시조》 ,2022, 봄호
생의 아린 기억이 애절하게 숨어서 가쁜 숨을 쉬고 있다.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밀려들다/ 쓸려가는” 파도지만 그 너울의 이면에는 70평생 살다가 생긴 상처가 아리게 떠오른 것이다. “생각날 때마다” 언뜻 다가서는 “못 잊은 얼굴”은 파도에도 숨어있고 바람이나 나뭇가지에도 걸려 있다가 시인의 마음을 열고 수런수런 나타나는 것이어서 눈을 감는 날까지 가슴에 옹이로 살아있다. 종심의 나이는 미래보다 과거를 곱씹으며 사는 연치여서 지나간 과거는 더 소중하고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70년을 살아오며 어찌 달콤하고 순조로운 일상만 있었겠는가. 인륜을 거스르고 그야말로 억장이 뒤집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멘탈 붕괴의 현장에 넋을 잃고 서본 적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담담하게 파도처럼 일렁이지 않을 것 같았지만 사람의 감정은 깊고 오래가는 것이어서 파도의 “등 너머엔” 아직도 “못 잊은 얼굴”이 어른거린다. 그래서 종심에는 억지로 잊으려고 안간힘을 쓸 것도 없고 다시 되새기려 번잡을 떨 일도 없다. 하얗게 밀려드는 파도의 등 너머가 보이는 나이에는 걱정의 싹도 애증의 미련도 모두 노을의 아련함을 닮아서 담담하고 우련하다.
문수사 가파른 길
졸고 있는 고양이
키 낮추는 보현봉
얼음 녹아 물소리
대남문 넘어온 바람
생강꽃 매운 향기
김영재 「어린 봄」 《좋은시조》 ,2022, 봄호
“길, 고양이, 보현봉, 물소리, 바람, 향기”가 “어린 봄”을 오체투지로 받들어 모시고 있다. 각 구의 모습이 아무 연관도 없이 무심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 같아도 그것들이 하나씩 모여 여리고 보드라운 봄의 싹인 ‘어린 봄’을 연출하고 있는 모습이 오붓하다. 북한산의 북쪽 가파른 언덕을 올라 등성이의 대남문을 지나 흠뻑 젖은 땀을 식히며 물 한 모금을 넘길 때 “생강꽃 매운 향기”가 그제야 감각에 잡혔으니 코를 벌름거리며 봄을 만끽하는 즐거움이 배낭에 가득 찬다. 그 재미는 “길, 고양이, 보현봉”을 안고 있는 “가파른, 졸고 있는, 키 낮추는”등의 정감 어린 용언의 힘에서 비롯된다. 종심의 반 허리를 지나고 있는 시인은 아직도 북한산을 바람처럼 넘나드는 산꾼이다. 건성으로 산을 넘는 것 같아도 ‘어린 봄’을 오감으로 느끼는 촉수는 피뢰침처럼 번뜩이며 한 줌의 낙뢰도 어김없이 붙잡아 내는 것이리라. 70의 연치에 ‘어린 봄’을 영접하는 갖가지 감각들이 흥에 겹다.
잔인하고 무자비해 단죄하라 적지 않았다
분하고 억울하여 사죄하라 적지 않았다
가서도 가지 못한 섬, 꽃잎 따서 덮었다
민병도 「백비 – 4·3 평화공원에서」 《좋은시조》 ,2022, 봄호
역설의 대구對句가 출렁거린다. 그날의 격한 감정이 울컥 치받아도 시인의 냉철에 가슴을 쓸어내릴 뿐이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을 당장 들이대고 싶지만 ‘백비’가 모든 것을 쓸어 담는다. 단죄하고 사죄를 받아야 하는 것은 상식이지만 ‘백비’는 형이상학形而上學으로 함구하고 있다. 그 형이상학의 묵언 위에 시인은 가만히 “꽃잎 따서 덮었다” 아름답고 곡진한 완결이다. 그날 일어났던 어떤 “잔인하고 무자비”한 것도 “분하고 억울”한 것도 백비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눈물 한 방울 없고 악다구니 한 자락 없이도 지울 수 없는 한과 비명을 모두 토해내고 있다. “가서도 가지 못한 섬”에는 과거의 한과 현재의 용서가 말없이 손을 잡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있다. 종심의 문턱에 들어선 시인의 눈매가 차갑고 무겁다.
산녘
들녘
강녘 모두
신간 발간 중이다
인쇄되는
식물도감
만개하는 온갖 들꽃
쇠박새
깝짝도요도 왔다
서점마다 만원이다
김춘기 「봄을 발간하다」 《좋은시조》 ,2022, 봄호
노년에 맞이하는 봄은 청춘의 날들과는 달리 감회가 오롯할 듯하다. 춥고 긴 겨울을 이겨낸 종심 시인은 꽃이 피고 잎이 돋는 모든 활기를 “발간”으로 표현하였다. 작가들이 심혈을 기울여 글을 쓰고 그것을 책으로 묶어내는 것과 봄을 준비하는 자연의 순리와 대비하였다. 꽃이 피고 잎이 돋는 일은 식물이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다. 우선 길고 모진 겨울을 이겨내야 하며 마른 가지마다 생명의 물을 퍼 올려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책을 펴내는 일도 식물이 꽃을 피우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발간”의 의미가 도드라진다고 해야겠다. 여기에 우정 출연이라도 하듯 “쇠박새/ 깝짝도요도 왔”으니 봄잔치는 그야말로 완벽하게 충일充溢의 힘으로 가득하다. 초판은 매진이고 서둘러 재판으로 이어질 것이 분명하니 봄은 늘 대박이다. 10쇄 완판이오!
열 길 물 위 걸어도 한 길 네게 닿지 못해
물 한 방울 묻지 않는 맨발로 획을 긋는다
지워도 지우지 못한
명치 끝의 첫사랑
김덕남 「소금쟁이」 《좋은시조》 ,2022, 봄호
사람들 사이에 널리 회자되는 속담이나 강력한 표징을 담고 있는 대상을 작품에 도입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시어가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전에 언어나 신념의 도그마에 휘둘려서 빠져나오기가 어렵기 때문에 미리 경계하는 것이다. 초장을 읽자마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시제인 ‘소금쟁이’라는 곤충도 나름대로 상징성이 강한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는 대상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 두 개의 개념을 절묘하게 연결하여 도그마의 위험에서 탈출하면서 “지워도 지우지 못한/ 명치 끝의 첫사랑”을 그려내는 데 성공하였다. 소금쟁이가 물에 사는 곤충이면서도 ‘물속’에 들어갈 수 없으며 “맨발로 획을 긋”는 속성을 통하여 멋진 종장을 이끌어 냈다. 물에 뜨기 위해 수없이 휘저어 그려야만 하는 ‘획’을 “지워도 지우지 못한‘으로 표현한 시각이 역전의 판세를 구축하는 신선한 발상이 되었다. 또한 속담에 나오는 ’열 길과 한 길‘을 깊이의 개념에서 거리의 개념으로 환치하며 사랑의 안타까움을 잘 그려냈다. 김덕남 시인의 새로운 ’소금쟁이‘는 종심의 달관이 발심으로 헤집어 낸 고갱이 같은 단수라 할 만하겠다.
모기 입도 비뚤어지는 처서 날 이슥한 밤에
비뚤어진 입부리 헐고 바라경을 외는 돌중
줘봐라, 글쎄 줘봐라,
안 줘서 못 먹는 게지!
윤금초 「넉살도 참,」 《좋은시조》 ,2022, 봄호
“입부리 헌 돌중”이 “모기”를 등에 업고 “처서 날 이슥한 밤”을 흔들어 놓고 있는 모습은 마치 하회탈춤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더구나 “넉살도 참,”이라며 쉼표까지 찍어 놓은 시제에서 풍자는 더 흐드러지고 해학으로 가득한 돌중의 공염불은 열 갈래의 상상으로 이어지게 한다. 마치 천수경 도입부에 나오는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와 유사한 보법으로 읽히는 종장의 비유는 국회 청문회에서 장관 후보자들이 받았다는 고액의 연봉을 연상시킨다. “줘봐라, 글쎄 줘봐라,/ 안 줘서 못 먹는 게지!” 어느 누가 돈을 마다하겠느냐며 빌미를 가져다 붙이는 추한 입들이나 할 말이니 배꼽을 잡게 하고 만다. “바라경”을 외는 돌중의 “비뚤어진 입부리”를 도드라지게 하기 위해서 처서 때 삐둘어진다는 모기 입을 인용한 것은 얼마나 재치가 넘치고 자연스러운 도입인가를 생각해보면 시인의 경지에 저절로 입이 딱 벌어진다. 끝내 “바라경”이 ‘줘봐라경’으로 환치되는 상상으로 이어지며 음담패설도 불경이 되는 이 비속의 경지 한복판에서 오줌을 지리고 말게 된다.
종심의 고수들은 이렇게 단수를 통하여 세상을 들었다 놓었다 하고 있다. 단수만을 일부러 선정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는데 역시 단수의 힘은 세다. 지금 우리 사회는 노인천국으로 변하고 있다. 집집마다 부모들은 요양원에 가시고 긴 말년을 살아가는 비용과 억지 이별의 정서로 마음도 무겁다. 그러나 70세의 청춘은 아직 견딜만한 최후의 연치이다. 인생 최고의 정점에서 여유와 달관으로 내려다보는 종심의 시들이 보여준 진경은 장관이었다. 부디 오래 강건하시라.
<좋은시조 - 2022년 여름>
'나의 글밭 > 時調'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조 속에서 찾아보는 21세기 고뇌와 사유 / 황외순 (0) | 2022.09.08 |
---|---|
『이것만 알면 당신도 현대시조를 쓸 수 있다. _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2022「서울 황조롱이」인용 (0) | 2022.09.08 |
우주선/김춘기 (0) | 2022.05.29 |
별에서 온 편지/김춘기 (0) | 2022.05.29 |
노곡리*, 오월 축제/김춘기 (0) | 2022.05.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