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통신1호
-만횡청류(蔓橫淸流)를 위한 따라지 산조(散調) 1
정휘립
시(詩)여, 읽을 수도 안 읽을 수도 없는, 지지리도 잘난, 시여, 그대는 왜 그토록 많은 헛소리를 잔뜩 들고 있나뇨
주둥이 가는 어깨 허리춤 엷은 등판 두 손모가지에 물고 이고 지고 메고 얹고 차고 끼고 또 그것도 모자라 윗도리 아랫도리 주머니란 호주머니 뒷주머니 속주머니 윗주머니 동전주머니 조끼주머니 속바지주머니까지 가득 잔뜩 철렁철렁 채워 넣고 울룩불룩 뒤뚱뒤뚱 거리면서도 꽉 쓰러져 엎어질 줄 모르나뇨
황당한 네 배포에 깔려 내 쥐포 될까 하나니
밥 정情
-만횡청류(蔓橫淸流)를 위한 따라지 산조(散調) 4
정휘립
딸넴아, 지발 아무나 허고 밥 같이 먹지 말거라, 잉?
이 에미도 읍내 장날 품 팔러 나갔다가 그냥 그리 된겨, 거시기 학상學生들 데모대에 매급시 떠밀려 쫓기는디, 어치케 늬 아빠 용케 만나 아는 체 하고 밥 한 끼 얻어먹다 그냥 저냥 함께 살게 된 겨,
정情 중에 젤 무서운 게 바로 밥 정情인 것여.
늬 아빠, 자전거 타고 동사무소 심부름 다닐 때,
허줄근한 방위병 복장으로 그냥 쓰러지게 생긴 데다, 내 하필 최루탄에 눈물콧물 질질 흘리며 오도가도 못 허는디, 불쌍하게 주춤주춤 다가와 밥이나 그냥 한 번 먹자 혀서, 매급시 밥 한 끼 얻어 처먹다 그냥 저냥 늬가 톡, 생긴겨, (그리서 늬 이름이 ‘오월’인겨)
늬아빠 시원한 입 속에 그냥 홀딱 반한 겨.
서울 1999년 겨울 : 어떤 이메일
― 만횡청류(蔓橫淸流)를 위한 따라지 산조(散調) 6
정휘립
“안녕……, 강물이 나지막이 부르는 소리 반짝이는 밤이네여.
××사이트 뒤지다가 님의 ID 눈에 띄어 메일 날립니다. 전 낼모레가 불혹인 사내. 무슨 재건위 사건으로 유해만 돌아온 아버지를 뿌리자 바다가 포효하던 어린 날이 선하네여. 홧김에 말 한 마디 잘못했다 고초 겪고 돌아가신 어머니마저 뿌리자, 탁류 바다는 더욱 거세졌지여. 일가친척 소식 끊어, 시설 등지 전전하다 비정규직 회사마저 부도나고 마누라는 도망가서, 눈알 초롱초롱한 기저귀 딸넴이를 보육원에 맡긴 지도 벌써 5년. 착한 아낸데, 못해 준 것만 생각나네여. 그 뒤, 노상판매부터 앵벌이까지 하는 일마다 안 돼 더는 여력이 없네여. 모든 준비 끝났어여. 며칠 전, 저 높은 63빌딩 옥상 위를 날으려 했는데 입구에서 군인 같은 수위들이 막더군여. 강이 바다에 제 이름 묻으며 사라지듯 내 이름도 강물에 묻으면 그 탁류 바다로 가지 않겠나여? 지금 저 한강이 물결 번득이며 가만히 부르는 소리 안 들리나여? 밤마다 쪽방은 춥고 말 나눌 이 없으니, 동반할 분 어서 만나 넋두리 좀 나누다가 정겹게 두 손 맞잡은 채 떠나고 싶네여. 이곳 PC방도 춥고 난 전화도 없으니, 주변 잘 정리하고 그믐밤 초저녁에 제3한강교로 나오세여.
다정도 지랄병인 양 하여 자정 직전 함께 날았으면 하네여.”
정휘립 시인의 작품을 대하면 현대판 만횡청류의 힘차고 쩌렁쩌렁하고 거친 숨결을 느끼게 합니다.
이조시대의 만횡청류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것은 사랑에 대한 노래이고 특히 성을 소재로한 작품이 많았습니다. 이는 성이라는 소재가 인간에게 가장 흥미를 끄는 요소라는 점에서 유흥성을 지향했기 때문입니다. 이별, 성, 주색, 연애, 유락, 충효, 수신, 선교, 탄로, 염세, 거래, 내방규소, 패륜, 생활, 풍자, 파계 등이 담겨있는 가곡의 범주에 속한 우리의 사설시조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이처럼 이미 몇 백년 전에도 우리 선조들은 세상 살아가는 모습들을 진실하게 풍자하고 또 묘사해 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대에 와서 이조의 만횡청류와 같은 진정성을 담보로한 작품을 많이 볼 수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몇 백년이 지나서도 개인적 배설이나 기행문식 현대시조가 판을 친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현실입니다. 그러나 정휘립 시인의 만횡청류의 연작들을 보면서 그래도 우리의 시조는 죽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규격적이거나 말장난에 그치는 작품들이 득세를 하는 풍토에서 이만큼의 치렁치렁한 목소리만큼으로 우리 시조단을 개혁했으면 합니다.
<이재창, 시선, 2007,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