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관심있는 것들/기타

무슬림(이슬람) 종파에 관하여

by 광적 2024. 1. 6.

이슬람 종파(수니파, 시아파)에 관하여

 
  1. 이슬람은 크게 두개의 종파로 분류한다(수니파, 시아파).
  2. 전 세계 무슬림 15~16억 명중 85%인 13~14억 명은 수니파, 나머지 15%는 시아파이다.
  3. 수니파의 대표 국가는 사우디아라비아, 시아파 국가는 이란, 이라크, 시리아이다.
  4. 수니파 세력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예멘(하디 정부군) 등이 있으며, 터키, 이집트, 인도네시아 등도 수니파 이슬람
  5. 시아파 이슬람 세력으로는 이란, 이라크, 시리아(정부 알라위파), 레바논(헤즈불라), 예멘(후티 반군) 등이 있다.
  6. 수니파와 시아파가 나뉘어진 계기는 정통 칼리프 시대 당시 칼리프 계승을 두고 일어난 갈등이 시초
  7. 수니파는 4개의 법학파(하나피, 말리키, 샤피이, 한발리)가 있으며, 시아파는 12이맘파가 있음(대다수는 12이맘파, 5이맘파 = 자이드파, 7이맘파 = 이스마일파)
  8. 수니파 수장 사우디는 친미국가, 시아파 수장 이란은 반미국가, 그러나 대부분의 테러단체(예-알카에다, 탈레반, 유일신과 성전 등)은 모두 수니파 단체, 시아파 단체는 레바논의 헤즈볼라가 있다.

 

 

 

이슬람이 대부준이 서아시아(서양에서 말하는 중동)

이슬람 종파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는 전반적인 이슬람의 계보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위의 사진은 네이버 지식백과에 나와있는 이슬람 왕조들인데, 오늘은 무함마드 시대와 정통 칼리프 시대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570~632)는 610년 신(알라)의 계시를 받고 이슬람교를 창시한다. 이후 그는 유일신 사상을 토대로 신의 목소리를 전파하는 예언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   유일신 알라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사상은 하층민과 소상공인에게 인기를 끌기 시작하였다. 이는 당시 아랍세계의 기득권이었던 쿠라이쉬 부족을 비롯한 세력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이슬람교는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   결국 무함마드는 622년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하는 '헤지라'를 감행한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 이슬람교가 만들어진 상징적인 해로 여겨져 622년은 이슬람력(曆)의 기원이 되었다.

​   표면적으로는 그냥 거주지를 옮긴건데 뭐 이렇게 의미를 부여하나 싶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아랍 세계에서 본거지를 두고 다른 곳으로 떠나는 행위는 자살행위였기에, 자신의 본을 두고 떠나는 것이 시사하는 바는 꽤나 크다고 할 수 있다.

 

도편

   가령, 그리스 아테네에서 독재자를 추방하기 위한 제도로 시행한 '도편추방제'라던지, 과거 조선시대 촌락 단위에서 사형만큼이나 큰 형벌로 내려졌던 것이 추방이었던 것을 고려해보면 좀 더 이해하기가 수월하다.

​   여하튼 메디나로 간 무함마드는 그 안에서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Ummah)를 형성하고 세력을 확장하여 630년 경에는 다시 메카에 입성하게 되었다. 메카 정복 이후 아라비아 반도 전역에 걸쳐 이슬람교가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메카 함락 이후 2년뒤인 632년, 무함마드는 사망하였다.

​   그러나 무함마드는 자신의 후계자를 명확하게 지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차후 이슬람 지도자인 '칼리프' 선정을 두고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마지막 정통 칼리프 '알리'의 사진

 

   무함마드가 사망한 632년부터 661년까지의 기간을 '정통 칼리프 시대'라고 부른다. 이 기간동안 즉위한 칼리프는 총 4명(1대 : 아부바르크, 2대 : 우마르, 3대 : 오스만, 4대 : 알리)가 있었는데, 이들은 이슬람 공동체의 장로의 결정에 의해 선정된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이 칼리프의 선정 과정을 두고 이슬람 내부에서 여러 갈등이 발생하였다.

   ​가령, 무함마드 사후 칼리프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4대 칼리프인 '알리'가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의 사위이며, 이슬람으로 개종한 최초의 남자, 그리고 그에 대한 충성심 등을 종합해 보았을 때 가장 적합한 칼리프 였지만, 그의 개방적인 가치관과 개혁사상은 이슬람 기득권의 경계 대상이었다.

​   결국 알리는 가장 적합한 칼리프 계승자임에도 불구하고 1대부터 3대 칼리프의 자리 경쟁에서 밀리게 되었다. 기득권의 이러한 결정에 불만을 품은 알리 추종자들은 강한 반발심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20년의 넘는 존버 끝에 알리는 4대 칼리프에 즉위하게 되었다.(존버킹 ㄷㄷ)

​   그러나 알리의 칼리프 즉위에 기득권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최초의 이슬람 내전(제1차 피트나)가 발생한다. 알리는 1차 피트나에서 군사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협상 과정에서 말리면서 반군 수장인 무아위야에게 동부 통치권을 내주게 되었다.

​   이에 알리의 추종자들은 알리에게 배신감을 느겼고 결국 알리를 암살하기에 이른다. 이게 무슨소린가 싶기는 한데, 약간 너무 좋아하고 사랑하다가 배신감을 느끼니 오히려 그게 증오로 바뀐 것이다.

우마이야 왕조

 

   승기를 잡은 무아위야는 우마이야 왕조를 세우고 이슬람 세습 왕조를 구축한다. 이후 우마이야 왕조는 알리의 두 번째 아들 후세인과 그 일가족을 무참히 살해하였다. 이는 알리의 추종자로 하여금 엄청난 반발심을 초래하였다. 이들은 알리가 유일한 칼리프이며, 정통 칼리프 시대의 1~3대 칼리프와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프를 부정하였다. 이들은 차후 칼리프가 알리의 가문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오늘날 시아파 이슬람이 되었다.

​   다른 한편에서는 알리를 비롯한 정통 칼리프 시대의 모든 칼리프를 인정하고, 우마이야 왕조의 세습 칼리프를 인정하자고 주장한다. 이들은 수니파 이슬람이 되었다.

​   요약하자면 시아파 이슬람은 직계 혈통과 전통성을 강조하며 알리의 가문에서 칼리프가 나와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고, 수니파 이슬람은 알리 이외에 선정된 칼리프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보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시아파는 씨앗(근본 전통)파로, 수니파는 수가 많으니 다른 사람도 칼리프로 할 수 있다로 생각해볼 수 있다..


   한편, 수니파와 시아파 내부에서도 여러 분파가 존재한다. 먼저 수니파는 크게 다음의 4개로 나뉘어진다.

     1. 하나피 법학파

     2. 말리키 법학파

     3. 샤피이 법학파

     4. 한발리 법학파

   사실, 굳이 따지자면 이 4개는 서로 다른 분파는 아니긴 하다. 다만,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를 두고 해석의 차이가 있어 그에 따라 다른 법학파가 생긴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서 제일 눈여겨봐야 하는 학파는 한발리 법학파인데, 그래도 간단하게 다른 학파에 대해서도 알아보도록 하자.

1. 하나피 법학파

   하나피 법학파는 이라크 법학파라고도 불린다. 이들은 개인적인 견해를 중시하는 다소 개방적인 성격의 법학파라고 할 수 있다. 하나피 법학파의 사상은 오스만 제국에 영향을 미쳤고, 오늘날에는 인도와 파키스탄 같은 남아시아 유역의 국가들의 수니 이슬람이 주로 하나피 법학파를 믿고 있다.

2. 말리키 법학파

   말리키 법학파는 말리크가 만든 학파인데, 메디나 법학파라고도 불린다. 이들은 전통적인 해석을 중시하는 다소 보수적인 학파이며, 이집트를 비롯한 북아프리카에서 성행하고 있다.

3. 샤피이 법학파

하나피 법학파와 말리키 법학파 사이의 성격을 가진 법학파이다. 주로 홍해 연안의 나라들과 동남아시아 국가의 무슬림이 샤피이 법학파임

4. 한발리 법학파

   보수적이고 엄격한 법학파이다. 한발리 법학파가 중요한 이유는, 오늘날 수니파의 수장인 사우디아라비아가 한발리 법학파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한발리 법학파는 극단적 이슬람주의 중 하나인 '와하비즘'에 영향을 미쳤는데, 와하비즘은 사우디아라비아 건국이념의 기초이자, 근대 이슬람 부흥운동의 시초가 되었다.

 

   시아파의 경우 이맘을 기준으로 분파가 나뉘어진다. '이맘'이라 함은 이슬람 종교의 지도자를 일컫는 말인데, 기독교로 치면 목사님이나 더 높게는 추기경 같은 느낌으로 이해하면 편하다. 좀 다른 애기지만, 사실 이 '이맘'을 두고도 시아파와 수니파 사이에서 차이가 존재한다. 시아파에게 이맘은 통치자이며 예언자의 대권을 받은 후계자인 존재이다. 이들은 초인간적이고 완전무결해 이슬람 세계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   반면, 수니파의 경우 이맘에 이정도로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이맘은 덕망있고 자질있는 사람으로, 가정에서는 가장이 이맘이 될 수 있고, 일반 무슬림들도 누구나 이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여튼 시아파에게 이맘이 이렇게 중요하다 보니 이들은 이맘을 기준으로 종파가 나뉘어진다.

​   현재 시아파에게 '이맘'은 대가 끊겼는데, 몇 대까지 진짜 이맘인지를 두고 여러 종파가 존재한다.  12이맘파는 12대 이맘까지 이맘으로 인정하는 종파이며, 5이맘파(=자이드파)는 5대 이맘까지 인정하는 종파이다. 7이맘파(=이스마일 파)는 7대 이맘까지 인정하는 종파이다.

​   시아파 무슬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학파는 12이맘파다. 이들은 1502년 이란의 사파비 왕조의 국교가 되면서 시아파의 주류 종파가 되었다. 5이맘파(=자이드파)는 현재 예맨 시아파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따 얘기하겠지만, 현재 예맨은 정부군(하티)와 반군(후티) 사이의 충돌이 빈번한데, 하디 정부군은 수니 이슬람, 후티 반군은 시아 이슬람이다. 즉, 후티 반군이 자이드파라고 생각하면 된다.

​   마지막으로 7이맘파인 이스마일파는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부흥했던 파티마 왕조에서 성행했던 분파이다. 사실 오늘날 이스마일파는 수니파와 시아파 양측 모두에게서 이단으로 취급되는데, 이스마일파에서 유래한 알라위파가 오늘날 시리아 정권이 믿고 있는 시아 이슬람 종파이다.

​   시리아 경우 국민 대다수가 수니파이지만, 정권을 잡고 있는 세력이 시아파 알라위파이다. 그래서 현재 10년째 진행중인 시리아 내전이 정부군 vs 반군 구도에서 시아파 vs 수니파 구도로 비화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칼리프의 계승 문제를 두고 생긴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은 14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현재 중동을 보자면, 사우디아라비아가 수니파의 수장 역할을 하고 있고, 이란이 시아파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수니파는 사우디를 주축으로 하여 아랍에미리트(UAE), 카타르, 예맨(하디 정부군) 등이 있으며, 튀르키예, 이집트, 인도네시아 등도 수니파 이슬람에 해당한다.

​   시아파 이슬람은 이란을 주축으로 이라크, 시리아(정부 알라위파), 레바논(헤즈불라), 예맨(후티 반군) 등이 있다.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수니 이슬람이 전체의 85%인데, 15%에 불과한 시아 이슬람이 어떻게 수니파와 맞설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이는 중동 역외에 있는 이집트의 인구가 1억명, 인도네시아의 인구가 2억 7천만 명인 것에서 기인한다. 그러다 보니 중동 내부로만 한정 지으면 수니파와 시아파 인구의 비율은 생각보다 비둥비둥 하다. 오히려 수니파 수장인 사우디의 인구는 3,500만명인데에 비해, 시아파 이슬람의 수장인 이란의 인구는 거의 9,000만명에 수렴한다.

​   한편, 종교의 경우 국경을 기준으로 딱 딱 나누기가 힘들다 보니 표면적으로는 수니파 국가이지만, 시아파 인구가 더 많거나 혹은 표면적으로는 시아파 국가이지만 수니파 인구가 더 많은 경우가 있다.

​   예를들어, 시리아의 경우 국민 대다수가 수니파 무슬림이지만, 정권을 잡고 있는 세력이 시아파 분파인 알라위파 이기 때문에 표면상으로는 시아파 국가로 분류된다.

​   아울러 레바논의 경우 국민의 약 50%가 무슬림, 40%가 기독교이며, 수니파와 시아파 무슬림은 그 50%내에서 각각 절반의 비중을 차지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바논이 시아파 세력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레바논의 시아파 무장단체 '헤즈불라'라는 조직이 현재 국정을 다스리고 있기 때문이다.

​   아무튼 이러한 수니파 vs 시아파 구도는 시리아 내전이나, 예맨 정부군과 반군의 격돌 과정에서 보다 자세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또 제3의 행위자가 등장할 경우 수니파와 시아파는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가령,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보면 수니파와 시아파 할 것 없이 같은 아랍민족이라는 정체성에 근간해 팔레스타인의 편을 들어주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날 중동 정세에 대해 알아봅시다.

 
 
 
 

   지금까지 수니파 수장인 사우디는 대표적인 친미국가로, 시아파 수장인 이란은 대표적은 반미국가라는 인식이 있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20세기 사우디와 이란 그리고 미국 관계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달러를 세계의 기축통화로 자리매김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 때 미국은 금 태환제를 실시하였다. 금 태환제라 하면 일정량의 달러를 일정량의 금과 고정비율로 교환하는 제도로 이해하면 된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일정량의 화폐를 교환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금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으로 막대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자, 더 이상 교환할 수 있는 금의 양이 부족하게 된 미국은 금이 아니라 다른 물건을 매개로 화폐의 가치를 보증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화폐의 가치를 보층하기 위한 재화로는 어느정도 접근성이 있으며, 모두에게 필요하며, 그 양이 충분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필요하였는데, 미국은 그것을 석유라고 판단하였다.

​   이에 미국은 사우디에게 사우디의 안보를 미국이 보장해주는 조건으로, 사우디의 석유를 미국의 달러로만 교환하자는 거래를 제안한다. 사우디 입장에서도 이란이나 이스라엘 같은 주변국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 제안을 수락하게 되었다. 이후 반 세기가 넘는 시간동안 사우디와 미국의 관계는 그 무엇보다도 끈끈한 유대관계로 자리매김 할 수 있게 되었다.

 

   반면, 이란은 정 반대의 노선을 탄다. 20세기 중반 무렵 이란은 팔레비 왕조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팔레비 왕조는 친미정권으로 서구식 가치와 제도를 유입하는 이른바 '백색혁명'을 시도한다. 그 결과 기득권 층은 많은 부를 누리게 되었지만, 대다수의 민중들의 삶은 더욱 고단해져 갔다. 이에 '아야툴라 루홀라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이란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혁명의 결과로 이란은 종교지도자가 통치하는 신정 국가가 되었고, 동시에 미국의 등을 돌리게 되었다. 이후 이란 지속적인 핵 개발 프로그램에서의 제약과 경제 제재를 받으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래도 2015년에는 역내 포괄적 경제 동반자 협정(이하 JCPOA)가 체결되면서, 이란이 핵개발을 중단하는 대가로 서방 국가로부터 경제 교류를 활성화 할 수 있게 되는 듯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다음 대통령으로 트럼프가 당선되고 미국이 JCPOA에서 나가버리면서 사실상 이 마저도 무용지물로 돌아가게 되었다.

​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반 세기 이상의 기간동안 사우디는 친미, 이란은 반미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자리잡게 되었는데, 오늘날 이러한 구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일단 첫 번째 이유로는 사우디의 왕세자 빈살만(사실상 통치권자)이 현재 미국 바이든 대통령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다. 바이든 같은 경우 인권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굉장히 중요한 슬로건으로 강조하는데, 사실 빈 살만은 그러한 민주주의랑은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맘에 안드는 정적이 있으면 제거를 하고,기자인 자말 카슈크치의 암살에도 연루되어 있는 인물이다 보니 미국 입장에서는 아무리 석유때문에 우방국이라지만 마냥 달갑지많은 않은 친구 느낌이었다.

​   그러다보니 한 번은 바이든이 유가 안정을 위해 석유 증산 요청을 했는데, 빈 살만이 이를 거절하면서 두 나라 관계가 급격하게 악화되기도 하였다. 사실 빈 살만 입장에서 이런 행동을 하는게 너무 무모한게 아니냐 싶을수는 있어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   일단 미국이 인도 태평양 지역으로 전력을 집중하면서 중동 지역에서 개입을 줄이고 있기 때문에, 사우디 입장에서도 미국 의존도를 낮출 필요가 있었다. 두 나라의 관계에 빈틈이 생기자 그 사이를 중국이 비집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양국은 석유 위완화 거래를 추진하고, 금년도 3월에는 중국의 중재 하에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관계 정상화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렇게 미국의 중동에서 관여가 축소되고 그 사이를 중국이 비집고 들어가면서 앞으로 중동의 역학관계에 꽤나 많은 변화가 생길 것으로 예상된다.

​   사실 중동은 사우디와 이란의 대립 구도 외에도 시리아 내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예맨 내전,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장기 집권에 따른 대외정책 변화 등 정말 많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어서 그 향방을 쉽게 예단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어찌보면 중동내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대립이 이슬람 종파 내 갈등이니, 이 글이 어느정도 나와 읽는 분들로 하여금 유익하게 다가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