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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있는 것들/문학의 갈피

디카시- 사진과 다섯 줄의 힘

by 광적 2024. 4. 9.

디카시- 사진과 다섯 줄의 힘

 

 

  김왕로(시인)

 

  디카시도 초기에 촌철살인이란 말이 화두처럼 휩쓸고 지나갔다. 나 역시 촌철살인에 무척 매료되어있었던 게 사실이다. 이때의 촌철살인이란 직관과 직시로 디카시를 쓰는 방법에 대한 언급이었다. 자칫 잘못 들으면 순간의 문학이란 오해를 받기 쉽다. 독자는 그 순간성보다는 시적 감흥이 남는 작품의 완성도에 더 주목하고 감동하게 된다. 그런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뜸의 시간이 필요하다. 순간을 표방하지만 디카시는 뜸의 문학이어야 한다. 동양화 한 폭을 그리거나 한 폭을 감상하듯 하여 시에서 우러나는 뭔가에 끌릴 때 좋은 시가 탄생하는 것이다.

 

    결국, 사진 한 컷과 다섯 줄 이내의 짧은 시 한 편이 서로 육화되어 탄생 되는 것이 디카시다. 그것은 물리적 변화라기보다 두 개가 융합되는 문학적 화학반응이다. 하여 디카시는 누구나 쉽게 쓸 수 있고 쉽게 읽을 수 있고 향유 할 수 있는 시다. 접근성과 대중성을 가졌고 발달 된 물질문명의 발전과 현대가 어우러진 시다. 그러나 디카시가 쉽게 뿌리 내리고 안방까지 쉽게 파고들기에는 이것이 무조건 장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장점이자 단점일 수 있다. 모든 이치가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듯 디카시인이 늘어나나 괄목할만한 디카시인이 많지 않다. 그렇다고 내가 좋은 디카시를 쓰는 좋은 시인이란 말은 전혀 아니다. 앞으로 촌철살인이라 말을 재해석하여 문학적 확장성이 있는 디카시를 쓰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없다면 디카시는 가벼운 놀이문화 수준으로 치부될 위험이 크다.

 

    ‘빨리빨리라는 우리 국민성은 나라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면의 위험성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컸다. 순간적 현장성과 촌철살인의 언술을 기본으로 하는 디카시는 빠르게 변해가는 시대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맞는 문학이다. 그러나 문학적 생명력이란 측면에서 보면 양면의 칼일 수도 있다.

 

    지금 많은 사람이 디카시를 쓰고 있다. 그런데 시단의 일각에서는 디카시의 문학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는 것도 사실이다. 디카시가 새로운 문학 반열에 확실히 자리 잡기 위해서는 이 부분에 대한 깊은 고민이 있어야 한다. 카메라가 발명되고부터 사진에 시를 덧붙여 많은 사람이 누리고 있는 사진시(phot poem)가 문학으로는 인정받지 못했던 이유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필요가 있다.

 

    디카시는, 우리 몸의 일부분처럼 된 스마트폰을 통하여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적화 된 생활 문학의 자리에 이미 올라섰다. 멋과 맛을 가진 시대에 맞는 문학이란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에서 푼크툼과 스투디움이란 말에서 디카시의 이론으로 사진을 액면 그대로 보는 수투디움 즉 포토포엠 측면이나 주관 개입으로 해석되는 푼크툼에 가까운 것으로 디카시를 구분한다.

 

    나는 디카시의 사진을 하나의 육체로 본다. 디카시의 짧은 시를 사진이란 육체를 채우는 무형의 영혼이고 리듬이고 생명의 노래라 본다. 디카시의 사진이 하나의 밭이고 그곳에 자신의 주관에 따라 키우는 것이 디카시란 식물이다. 그러나 내 디카시도 아직 발효나 발아나 발화가 되지 않는 디카시다.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고 그러나 분명한 것은 디카시를 쓰므로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가지고 그간 보지 못했던 세상을 다시 보게 된다는 점이다.

 

    하나의 거대한 인공물에서 보일 듯 말 듯 한 작은 풀꽃에서 그들이 가진 체온과 아름다움을 느낀다. 수없이 핸드폰을 터뜨리다가 보니 이미 익숙해진 물새들이 내가 다가가도 달아나지 않고 쉽게 포즈를 내준다. 내가 가진 지역이란 한계를 벗어나 서울에 가면 서울에서 탄생하는 디카시, 저녁이면 저물어 가는 것들이 내게 선물하는 디카시,

 

    잔잔히 시간의 물살을 일으키는 파닥이는 나무 이파리, 아파트 단지의 수목, 풀잎 뒤에서 울음의 강물을 짓는 풀벌레가 나를 거부하지 않고 조용히 디카시를 선물하는 것이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내가 어떤 조형물을 바라보고 내 식으로 디카시를 지을 때 또 다른 시인도 같은 조형물을 보며 자신의 주관 개입과 감정이입으로 나와 다른 디카시를 쓸 때 그 개별성의 아름다움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나는 처음에 디카시에 대해 한 마디로 시큰둥했다. 보수적이었던 내가 당연히 취하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내가 디카시에 미치게 된 것은 딸아이가 수술을 받으러 가 한 달간 머문 여수에서 마주친 여수의 겨울 풍경 때문이었다. 내 디카시는 여수에서 시작되었다. 무조건 핸드폰으로 찍다가 사물이 저마다 아름다운 면이나 가장 본질적인 모습을 찍히도록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순간을 찍었을 때 전류가 통하듯 뭔가 사물과 내가 내통한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예감과 촉이 어느 정도 있는 내가 길 위에서 모이를 쪼아대던 비둘기를 찍고 그 비둘기에 대한 예감이 이상해 다음 날 그곳에 가보니 로드 킬을 당한 비둘기가 길바닥에 깔려 있었다. 조용히 대밭 모퉁이에 묻어주었다. 정물은 시시각각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천천히 찍을 수 있지만, 움직임을 가진 동물은 정말 촌철살인으로 포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원하고자 하는 사진을 얻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디카시는 촌철살인이란 말이 맞다. 하여튼 나의 시는 자연과 인공물, 정물과 동물이 내게 준 귀중한 선물이다. 그들이 건재한 한 내 디카시의 노래는 끝이 없을 것이다. 생활 문학에서 국민문학으로 세계문학으로 가는 길목에서 나도 작은 힘이 되는 것이다.

 

 

 

[출처] 사진과 5줄의 힘 -디카시, 생활시로 시인되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