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의 살구나무 / 김현식
피아노 소리는 마룻바닥을 뛰어다니고
창밖엔 비가 내린다. 기억나는 일이 뭐,
아무 것도 없는가? 유월의 살구나무 아래에서
단발머리의 애인을 기다리며 상상해 보던
피아노소리 가늘고도 긴 현의 울림이
바람을 찌르는 햇살 같았지 건반처럼 가지런히
파르르 떨던 이파리 뭐 기억나는 일이 없는가?
양산을 거꾸로 걸어놓고 나무를 흔들면
웃음처럼 토드득 살구가 쏟아져 내렸지.
아! 살구처럼 익어가던 날들이었다 생각하면
그리움이 가득 입안에 고인다. 피아노 소리는
마룻바닥을 뛰어다니고 창밖엔 비가 내린다.
살구처럼, 양산의 가늘고도 긴 현을 두들기던
살구처럼, 하얀 천에 떨어져 뛰어다니던 살구처럼,
추억은 마룻바닥을 뛰어다니고 창밖엔 비가 내린다.
추억의 건반 위에 잠 드는 비, 오는, 밤.
(1990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당선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