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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문학장르/좋아하는 時調

정해송 시인 대표작

by 광적 2008. 3. 8.
제철공장에 핀 장미는 / 정해송

제철 공장 블록 담은 가시줄로 관을 썼다
녹슨 시간들이 빗물에 녹아내려
핏자국 마른 상처로 얼룩지며 신음한다.

관리층 미학자는 죽은 벽을 살리려고
담을 돌아가며 장미를 꺾어 심어
번지는 이상 기류를 꽃을 피워 눅이렸다.

화부의 분노같은 불길은 활활 솟고
주물공 타는 아픔이 쇳물로 끓을 때도
장미는 키가 자라고 연방 잎을 토해 냈다.

노사간이 등을 돌린 적막한 빈 터에는
줄기마다 꽃망울이 울을 돌아 맺히더니
용광로 타던 불꽃을 옮겨 담아 피어난다.


누에나방 / 정해송



누에는 잎을 갉아 뿌리의 어둠을 캔다.
초록 물든 바람이여, 보낸 이는 어디쯤인가
가지엔 혼선을 빚는 단음절만 수신될 뿐....

말씀을 자아올린 물관은 잎맥에 닿아
쉼 없이 꿈틀대는 어기찬 노역으로
금맥을 찾는 광부마냥 잎새들을 핥아 갔다.

계절이 머문 곳에 한 생애를 매듭 짓자.
금(禁)줄 둘러 집을 짓고 긴긴 밤을 닦은 꿈은
무한의 장력에 율동하는 저 투명한 날개짓을.


귀뚜라미 / 정해송



살이 닳도록 닦는다
뼈가 타도록 닦는다

문명에 녹슨 달이
옷을 벗는 깊은 가을

무변의
맑은 영혼이
기억처럼 열려 온다



가을 심상 / 정해송



강은 긴 울음을 삼키며 홀로 깊어 간다.
먹물 같은 고요 속으로 한 생애가 가라앉고
지상에 떨군 사념들이 별빛으로 여문다.

피리소리 떨던 달이 아리도록 날이 서면
만산 홍엽들은 휘모리로 치닫다가
시대를 이끈 말을 거두어 장중하게 지고 있다.

일진 바라미 훑고 간 허허로운 들녘에는
빈 손 모은 나무들이 따슨 입김에 둘려 있고
국향은 서릿발 딛고 세상 난청을 뚫는다.

겨울 山行 2 / 정해송

매연에 그을은 肺를 등피처럼 닦고 싶다.
소음으로 끓던 귀는 솔바람에 갈아 앉히고
살갗샘 흘러든 중금속 능선 타며 걸러야지

신경성 위장염도 잘 들을 내장길을
때론 고행 삼아 무릎으로 올라가면
落木 끝 매운 바람이 무딘 혼을 매질한다.

이 세상 젖은 땟국 한 꺼풀 벗고 서서
영혼의 안테나를 靑竹으로 뽑아 올려
겨울 산 깊은 침묵이 지닌 말씀 듣는다.

초록빛 둥근 꿈을 가지마다 걸어두면
따스한 심장으로 일어서는 손길이여
문명에 병든 도심을 원격치료하고 있다.


연꽃  / 정해송


여기는 인육시장
김이 자욱한 안방이다.

삼십 촉 흐린 불빛이
일렁이는 수심 속에

탕자는 물구나무 서서
유두알을 물고 있다

화류병 앓는 늪이
요분질에 꽃잎 열려

울고 웃는 교성들은
잔이 넘쳐 겨웁는데

그림자 난무한 벽면에
표구 한 점 고요하다.

지옥이 어디냐고
천당 또한 묻지 말라

이 황홀한 난장판에
얼룩 하나 묻지 않고

알전구 뜬 유리 속에
큰 법문이 빛을 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