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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문학장르/좋아하는 詩

곰장어 굽는 저녁/안도현

by 광적 2008. 6. 19.

곰장어 굽는 저녁 / 안도현

 

수족관 속 곰장어는 슬퍼서 몸이 길구나

물속을 얼마나 후려치며 싸돌아다녔기에

이렇게 길쭉해졌다는 말이냐

일생(一生)이란,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그 길이 몇 뼘 늘리는 일이구나

 

그러나 생(生)을 벗기는 일 또한

가만히 보니 오래 걸리지 않는다

물살이 온몸을 훑으며 지나가듯

껍질은 담숨에 벗겨진다

 

평생에 두르고 살던 껍질은 거추장스러웠으나

껍질 벗긴 다음에 드러난 알몸은 외려

부끄러운 것, 그리하여 퍼덕퍼덕 몸을 떨다가

곰장어는 자신을 선선히 도마 위에 눕혔을 것이다

 

간장과 고추장을 몸에 바르고 지금

 

곰장어는 숯불 위에 올린 석쇠에 누워 있다

더는 꼬리로 바다를 후려칠 필요가 없고

다시는 뜨거운 불 위를 헤엄쳐 갈 일 없는 몸이

발긋발긋 익어가고 있다

 

하늘로 기어오르려나

포장마차 밖에는 눈보라의 긴 꼬리가

세상 속에다 구멍을 내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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