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생활에 실패한 어느 여가수가 네 번째 결혼하는 사업가를 만나 재혼을 했다고 해서 화제가 되고 있다. 그 여가수는 이십여 년 전 어느 방송국에서 주최한 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아 화려하게 데뷔한 이래 온갖 상을 휩쓸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려 왔으며, 그 인기를 바탕으로 잠시 정치인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그녀는 매니저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지만 결혼 생활 6년 만에 파경을 맞고, 그의 남편이었던 사람은 이혼한 지 10개월 뒤에 음독 자살하게 된다. 어쨌든 그녀는 한때 식을 줄 모르는 화려한 인기의 주인공이었다. 그녀가 누린 인기의 원인은 무엇일까, 자그마한 키, 가녀린 체구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성량으로 뿜어내는 강력하고 열정적인 창법이 그 원인 중의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에디트 피아프처럼-.
프랑스 샹송 가수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1915∼1963)는 '작은 참새'를 뜻하는 '피아프'라는 이름처럼 142cm의 자그마한 키에 아주 작고 가냘픈 몸매를 가졌음에도 한을 토해내 듯 터져 나오는 허스키한 목소리는 듣는 이의 영혼을 순식간에 사로잡아 버린다.
에디트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5년 12월, 어머니가 무료 자선병원을 찾아 헤매던 중 파리의 빈민가인 벨베이르 72번가 길거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떠돌이 곡예사였고, 어머니는 거리의 무명 가수였다. 어머니는 에디트를 낳은 지 두 달만에 다른 남자를 따라 가버렸다. 아버지는 딸에 대해 철저히 무관심했다. 그녀는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야 했다. 자기를 버리고 간 어머니였지만, 가수였던 어머니의 소질을 타고났는지 에디트는 노래를 곧잘 불렀다. 철이 들 무렵부터 아버지와 함께 거리에 나가 구경꾼한테서 돈을 모으는 일을 했다. 15세 때부터 집을 나와 혼자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35년, 거리에서 노래하던 20세의 그녀는 '자니스'라는 카바레의 지배인 루이 르프레(Louis Leplee)에게 발견되어 그의 가게에서 노래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본격적인 샹송 가수로 활동하게 되는데, 본명이 에디뜨 조반나 가시옹(Edith Giovanna Gassion)이었던 그녀에게 '피아프'라는 애칭도 그가 붙여 주었다. 반 년 후 르프레가 어떤 자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혐의를 받은 에디트는 실의에 빠지게 되지만, 얼마 후 작곡가 레이몽 아소, 말그리트 모노 등의 격려로 다시 일어섰고, '나의 병사님' 등을 부르면서 재기에 성공하게 된다. 그녀는 어린 시절에 보고 자랐던 하층민들의 생활을 자신의 노래 속에 고스란히 담아 냈다. 그녀는 서민들이 느낄 수 있는 근심과 걱정, 사랑과 환희의 감정을 노래했으며, 한편으로 장 콕도, 모리스 슈발리에, 이브 몽탕, 조르즈 무스타키 등 당대의 명망 높은 예술가들과 접촉하면서 예술가적 안목과 감성을 키워 나갔다. 이런 가운데 그녀의 노래는 점차 원숙해져 갔으며, 세계인들에게 감동을 주게 된다. 1940년 장 콕토가 그녀를 위해 쓴 극본 '냉담한 미남'에 의해 배우로서도 눈을 떴다.
그녀는 자신의 노래처럼 쉽게 채워지지 않는 삶의 허기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과의 교제, 몇 차례의 결혼과 이혼 등을 통하여 많은 고통과 시련 그리고 행복과 기쁨이 교차하는 삶을 엮어나가게 된다. 어려서의 고생과 무절제한 생활로 인해 일찍부터 병고에 시달려왔던 그녀는 48년이라는 짧은 생애로 삶을 마감하게 되지만, 그래도 그녀는 특별한 사랑의 추억 하나를 간직하고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것은 '모로코의 폭격기'라는 별명을 가진 미들급 복싱 챔피언 마르셀 세르당과의 만남이었다.
세르당은 1948년 미국의 최고 철권인 토니 제일을 KO로 눕히고 월드챔프를 획득하여 전 프랑스 국민의 영웅이 된 복서다. 세르당을 만난 에디트는 세계 모든 연인들의 부러움을 살만큼 열렬한 사랑을 꽃피웠다. 그 러브스토리는 그들의 사후인 1983년 영화로 만들어져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 행복도 잠시, 에디트의 연인 세르당은 1949년 불의의 비행기 사고로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녀의 충격은 너무 컸다. 그와의 열렬했던 사랑의 기억도 감당할 수 없는 상처로 남았지만, 빨리 자기 곁으로 와 달라고 졸랐기 때문에 사고를 당한 것이라는 자책감과 그 절망을 더욱 이겨낼 수 없었다. 에디트는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한 채 방안에 틀어박혀 노래를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전 세계인의 심금을 울린 '사랑의 찬가'라는 노래다.
푸른 하늘이 우리들 위로 무너진다 해도
모든 대지가 허물어진다 해도
만약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신다면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아요
사랑이 매일 아침 내 마음에 넘쳐흐르고
내 몸이 당신의 손 아래서 떨고 있는 한
세상 모든 것은 아무래도 좋아요
당신의 사랑이 있는 한
내게는 대단한 일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만약 당신이 나를 원하신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가겠어요
금발로 머리를 물들이기라도 하겠어요
만약 당신이 그렇게 원하신다면
하늘의 달을 따러, 보물을 훔치러 가겠어요
만약 당신이 원하신다면
조국도 버리고, 친구도 버리겠어요
만약 당신이 나를 사랑해 준다면
사람들이 아무리 비웃는다 해도
나는 무엇이건 해 내겠어요
만약 어느 날 갑자기
나와 당신의 인생이 갈라진다고 해도
만약 당신이 죽어서 먼 곳에 가 버린다해도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내겐 아무 일도 아니에요
나 또한 당신과 함께 죽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끝없는 푸름 속에서
두 사람을 위한 영원함을 가지는 거예요
이제 아무 문제도 없는 하늘 속에서...
우린 서로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너무도 애절하고 간절한 절규요, 하소연이었다. 그 어떤 절망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보다 더 클 수 없었고, 그 어떤 귀중한 것도 사랑하는 사람보다 더 귀할 수는 없었다. 사랑만이 오직 지고지순한 가치였다. 그 사랑을 잃은 절망과 좌절은 너무나 처절했다. 에디트는 격정을 이기지 못해 삭발을 하고 이 노래를 불렀다. 노래는 삽시간에 세상에 울려 퍼졌고, 전 세계를 감동케 하는 사랑의 명곡이 되었다. 그러나 노래의 주인공 에디트는 아픈 사랑의 기억을 결코 지울 수 없었다. 그 아픔을 이기지 못한 에디트는 몇 번의 결혼과 이혼을 되풀이하며 술과 마약으로 스스로의 삶을 불사르다가 요양 중이던 리비에라에서 파리의 자택으로 돌아와 1963년 10월 11일 한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녀가 사망했을 때 프랑스는 충격에 휩싸였다. 특히 그녀의 삶과 예술을 사랑했던 수많은 파리지엔들은 오열했다. 에디트 없는 삶은 무의미한 것이라 외치던 시인 장 콕토는 며칠 후 심장 발작을 일으켜 그녀의 뒤를 따라 저 세상으로 가기도 했다. 절망을 가슴에 안고 절규하듯 사랑과 삶을 토해냈던 짧은 생애, 그러나 누구보다도 격정적으로 삶과 예술을 사랑했던 에디트, 그녀가 떠나고 수많은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도 프랑스 사람들은 그녀를 잊지 않고, 잊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그녀가 묻힌 파리의 페르 라세즈 묘소에는 꽃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녀의 삶과 노래를 생각하면 한없는 절망과 처절한 절규가 목구멍에서 치솟아 오르는 듯하고, 뜨거운 불덩이 같은 것이 가슴 밖으로 확 뛰쳐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에디트의 삶이란 활활 타오르는 하나의 불덩이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무와 바람뿐인 이 한촌에 겨울이 오고 있다. 한촌의 겨울은 겨울 그대로다 어떤 방한복도 감쌀 수 없고 어떤 난로도 데울 수 없는 겨울이다. 에디트의 노래를 들어야 할 것 같다. 그 노래 속에 깃들어 있는 불덩이만이 이 겨울을 녹일 수 있을 것 같다.
한촌의 겨울에 생각하는 에디트 피아프-.♣(2006.12.1.)
Edith Piaf - Hymne A L'amour
에디뜨 삐아프 - 사랑의 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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