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공양 / 김춘기
도둑눈이 밤새 내린 섣달그믐날
아버지와 함께 동네 목욕탕에 들어선다
털신을 신발장에 넣고
겨울옷을 하나씩 벗는 아버지
어깨에 쇄골이 솟아 있다
내 어릴 적 수작골, 자작골의 다랑논을 쟁기로 갈아엎던
근육질 허벅지가 정강이처럼 말라붙었다
온탕에 몸을 담근 아버지의 시선이 내 눈에 닿는다
아버지의 등을 민다, 살가죽이 밀린다
허리를 구부려야 더 편하시다며
가뿐한 몸을 내게 맡기시는 하늘만큼 늙으신 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로부터 긴 강줄기로 흘러온 목숨
내 안에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강이 흐르고 있다
자식 네 명에게 물을 대기 위해 새벽별과 함께
소죽 끓이시고, 벼 가마 척척 져 나르시던 아버지
이제는 당신이 세상의 짐이라 하신다
팔십 평생 땅으로부터 공양을 받고 살아왔으니, 이젠
당신을 땅에 공양할 때가 되었다고
담담하게 말씀하시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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