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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밭/詩

아버지의 공양

by 광적 2009. 1. 7.

     아버지의 공양 / 김춘기


도둑눈이 밤새 내린 섣달그믐날

아버지와 함께 동네 목욕탕에 들어선다

털신을 신발장에 넣고

겨울옷을 하나씩 벗는 아버지

어깨에 쇄골이 솟아 있다

내 어릴 적 수작골, 자작골의 다랑논을 쟁기로 갈아엎던

근육질 허벅지가 정강이처럼 말라붙었다

온탕에 몸을 담근 아버지의 시선이 내 눈에 닿는다

아버지의 등을 민다, 살가죽이 밀린다

허리를 구부려야 더 편하시다며

가뿐한 몸을 내게 맡기시는 하늘만큼 늙으신 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로부터 긴 강줄기로 흘러온 목숨

내 안에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강이 흐르고 있다

자식 네 명에게 물을 대기 위해 새벽별과 함께

소죽 끓이시고, 벼 가마 척척 져 나르시던 아버지

이제는 당신이 세상의 짐이라 하신다

팔십 평생 땅으로부터 공양을 받고 살아왔으니, 이젠

당신을 땅에 공양할 때가 되었다고

담담하게 말씀하시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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