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터키에 빠지다
2013. 7. 31(수) - 출발, 독일 경유 ~ 그리스 아테네까지 날다
지난 일요일엔 삼현향우회 총무로서 동네 어른들을 모시고 야유회를 진행하였다. 불편한 무릎 관절이 나를 힘들게 했다. 그리고 월요일부터 이틀간은 오산의 롯데인재개발원에 다녀왔다. 경기도 중등수석교사 재직학교 교장들 연수회였다. 무릎에 자꾸 아팠다. 동네의 한의원에 들러 진료를 받았다. 갱년기에 따른 퇴행성관절염의 시작이란다. 내게 주어진 세월이 자꾸 소모되면서, 나를 고문하는 것이리. 저주파치료와 함께, 침을 맞고, 부항을 떴다. 어제 저녁엔 그 핑계로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착한 아내가 혼자서 여행가방을 싼다. 머나 먼 길을 떠나려니, 걱정이 앞선다.
장마가 다 끝났는데, 작달비가 밤새 내렸다. 하늘의 먼지가 씼겨져 아침의날씨는 유리창을 닦아놓은 것 같았다. 밝은 기분을 안고, 택시에 오른다. 그리고 가능동 버스정류장에서 인천공항행 7200번 버스에 오른다. 송추인터체인지에 올라 외곽순환고속도로를 질주한다. 도봉산 능선을 흔들며 여름이 훌라춤을 춘다. 노고산 터널을 뚫고 나와 공릉천 가로질러 버스는 계속 마라톤이다. 내가 20여 년을 살던 일산신도시가 차창 밖에서 손을 흔든다. 자동차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시속 100km 레이스를 펼친다. 여름장마로 물이 불어난 한강은 가슴까지 물에 잠기어 70년대 완행열차처럼 완속으로 바다로 간다.
요즘 칭찬을 별로 받지 못하는 아라뱃길이 물끄러미 우리를 쳐다본다. 그 곁 인공폭포가 하얀 물거품을 토하며 햇살을 눈부시게 펼치고 있다. 썰물이 빠져나가는 동안 바다의 섬들이 각자 영역을 넓히고 있다. 갯벌 위의 붉은빛 섬초가 아프리카의 사막처럼 퍼져나간다. 제17회 인천아시아경기대회를 알리는 간판이 자랑스럽게 언덕 위에서 자세를 갖추고 있다.
11시 20분쯤 공항에 도착하여 간단히 점심식사를 하였다. 약속장소인 3층 출국장 에서 40년 지기 대학친구들을 만난다. 부부 동반 전영호, 류선하, 김건수, 이근수, 강형구, 우리 부부. 이젠 나이가 들어 모두 중년후반의 신사 숙녀들이다. 부부 동반으로 얼굴을 내밀며 웃음을 주고받고, 악수를 한다. 머리는 희끗희끗, 명퇴한 전영호, 겨울에 명퇴 예정인 이근수 친구를 부러워 하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14시 40분발 루프트한자 713기에 오른다. 내 무릎이 불편하다고 아내가 비즈니스석을 구입한다. 넓은 자리에 다리를 뻗고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머나 먼 여행길, 모처럼 안락한 비행이다. 금발의 스튜어디스가 오간다. 알아들을 수 없는 독일어 안내방송이 투박하게 귀청을 흔든다. 한국어 방송은 소리가 작아 잘 들을 수가 없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점심 기내식 코스요리가 나온다. 생강소스를 곁들인 아보카도와 훈제참치 야채말이, 그리고 비빔밥이다. 후식은 과일샐러드, 창밖에 비행운이 구름 밭을 갈며 푸른 하늘에 수놓는다. 비행기는 황해를 지나 발해만을 뒤로하고, 중국대륙에 상륙한다. 시속 8~9백km, 고도 9~11km. 그래도 기내는 커피조차 출렁거리지 않는다. 태양을 따라가는 비행이기에 낮이 계속된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러시아의 노보시비르스크, 그리고 구름을 머리에 이고 있는 시베리아의 서쪽 벌판을 가로지른다. 비행기는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인 우랄산맥을 안장으로 삼으며, 예카테린부르크를 끌어당긴다. 비행기 창밖의 구름은 시시각각 산을 든다. 잠시 후 푸른 파도를 만들고, 백색 평원을 만든다. 그리고 신대륙을 만든다. 또 양떼목장을 여기저기 만든다. 푸른 하늘은 다시 끝없는 바다가 되며, 유우라시아대륙을 펼치고 있다.
저녁 기내식사가 식탁을 차지한다. 쌀밥을 곁들인 한국식 도미구이가 올라왔다. 아내와 함께 빵과 커피, 홍차도 시킨다. 몸매 날씬한 한국인 스튜어디스를 맞이한다. 광주교대를 나와 루프트한자에 들어왔다는 L양이었다. 국내 항공사에 비해 보수는 덜하지만, 복지가 잘 되어 있단다. 프랑크푸르트에 거주하기에 국내 총각과 청춘사업을 하는데 장애가 있다고 한다. 선생인 나와 아내는 그녀와 교직에 관계되는 많은 얘기를 나눈다. 그리고 명함을 교환하며, 카카오톡을 통하여 연락하자고 했다.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의 상공을 지나 드디어 나는 독일의 하늘을 난다. 울창한 숲,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는 소도시의 마을과 미니어처 같은 집들이 소꿉장난을 하는 것 같다. 성냥곽 같은 건물들이 아기의 젖니처럼 반짝거린다. 구불구불한 도로와 하천이 신경처럼 연결되어 서로의 소식을 전하는 것 같다. 갑자기 독일민요 ‘노래는 즐겁다’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11시간 40분의 비행을 거쳐 현재 독일시간 저녁 7시 20분, 프랑크푸루트공항의 공기 속으로 진입한다. 환승을 위하여 두어 시간을 기다렸다. 면세점에 잠시 들어가 아이쇼핑을 하고, 다시 LH128편에 몸을 싣는다. 남쪽으로 방향을 잡은 비행기는 3시간 쯤 지나 심야의 아테네를 보여준다. 인천공항에서 실은 짐을 찾아 그리스의 버스에 오른다. 자정쯤에 Divani Acropolis호텔에 들어가 말똥말똥 부엉이 눈이 되어 밤을 지샌다.
2013. 8. 1(목) - 아테네 고대 고대문명 속으로 들어가다
서구문명의 발상지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의 첫날 아침. 시차가 바뀌면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그리스의 영원한 상징인 아크로폴리스 언덕으로 오른다. 아크로폴리스는 도시 국가의 전체를 볼 수 있는 언덕에 성을 말한다.
역사교과서에서는 어디에나 등장하는 처녀의 집이라는 기원전 5세기에 건축된 파르테논신전을 올려다 본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1호인 이 건축물의 유적은 아크로폴리스에서도 단연 아름답고 웅장한 건물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리스에서 가장 오래된 야외극장인 술의 신을 뜻하는 디오니소스 극장을 지나 살아 움직이는 조각기둥의 에릭티온 신전, 승리의 여신 니케아신전을 살핀다. 곁엔 훼손된 유적들을 보수하는 장면도 함께 있었다.
기둥만 몇 개씩 남은 신전의 흔적을 보기 위하여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 대륙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있다. 그리스 국기가 하늘을 연속으로 접었다 펴고 있다. 언덕 아래로 내려다보는 아테네시내는 레고로 조립해 만든 모형이다. 아니 도시를 축소해서 만든 미니어처 같은 느낌이다.
소크라테스가 갇혔었다는 감옥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에게해의 따가운 햇살이 우리에게 이유 없는 벌을 주고 있었다. 서양 사람들은 그 햇살 샤워에 만끽이라도 하려는 듯, 최신 반나 노출패션을 하고 있다. 가끔 보이는 양산을 쓴 사람들은 분명 한국 사람들이었다. 아내와 나는 팔에 하얀 토시를 하고, 선글라스로 눈을 감추고, 최대한 자외선을 피하고 있었다.
The Grill House라는 음식점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다시 자동차는 아테네에서 남동쪽으로 69km 떨어진 에게해의 수니온곶으로 이동한다. 이곳은 에게해의 아티카반도, 비취색 눈부신 바다를 따라 유럽의 여름 풍광이 내 가슴을 하늘로 띄운다. 갈대로 만든 파라솔 아래 플라스틱 의자들이 담소하듯 놓여있었다. 붉은색의 유도화가 이곳은 유럽이라고 알려준다.
이곳은 영국의 시인 바이런 등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극찬한 곳이다. 멀리 산꼭대기에 올라선 BC 444년 전 바다의 신 포세이돈신전이 수니온곶을 지키고 있었다. 5세기 중엽에 건축된 도리아식의 기둥만 남아있었지만, 산꼭대기에서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잠시 후 올리브제품 쇼핑몰에 들른다. 피부에 좋고, 영양학적으로 좋다는 올리브에 대한 홍보가 귓전을 울린다.
돌아오는 길, 버스 안에서 창밖의 시내관광을 눈으로 한다. 그리스의 국회의사당에서 수문장의 교대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운전기사는 우리의 원활한 시야를 위하여 버스를 잠시 멈춘다.
버스에서 내려 1896년 제1회 근대올림픽이 열렸던 경기장에서 내려 유럽의 여름 햇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수많은 그리스 국기가 관람석 위쪽에 일렬횡대로 서서 펄럭인다. 그늘에 사람들이 몰려있다. 아내와 경기장을 배경으로 몇 컷의 사진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리고 우리 일행은 Vip’s Chinese Restaurant이라는 곳에서 한식으로 저녁식사를 하였다. 한국 음식점이면서도 중국식당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 맘에 걸렸다. 아직은 한국음식이라면 낯설어하기에 그렇게 이름을 붙였단다. 해외에서 맞이하는 우리 음식이라 새롭게 맛을 음미한다. 길가의 2인용 미니자동차에 눈길이 간다.
버스는 다시 유럽 각국을 오가는 배들이 머무는 아테네에서 10km쯤 떨어진 피레우스 항구로 이동한다. 수많은 페리호, 크루즈호들이 어깨를 드러내며,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밤 9시쯤 우리나라의 대우조선에서 제작했다는 Blue star Ferry호에 몸을 실었다. 이곳은 썸머타임을 실시하는지라 아직도 환한 초저녁이다. 에게해를 배경으로 분위기 가득한 사진을 찍는다. 큰 배, 작은 배, 노란색 배, 하얀 배… 등 다양한 배들이 오간다. 검은 연기를 내뿜는 증기기관을 사용하는 것 같은 배도 보였다.
선상은 그야말로 인종의 전시장이었다. 맥주를 마시며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 배 위에서 바다를 보며 주변 풍광에 취해 있는 사람들, 연신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사람, 침대 방을 얻지 못하고 침실 옆의 빈자리에 침낭을 깔고 누운 사람들이 보인다. 우리가 사용하는 침실은 한 방에 4명이 사용하는, 2층 침대로 되어 있었다. 침실에는 좁지만 샤워를 할 수 있는 화장실까지 갖춰져 있었다. 우리 부부는 경상도에 사는 친구 류선하 부부와 혼숙하게 되었다.
우리 일행은 갑판에도 올라가 바람과 함께 에게해의 풍경 속으로 빠져든다. 친구들과 맥주를 한잔씩 하며 바다와 대화를 한다. 아내와 술잔을 부딪치며, 우리의 만남은 숙명적인 것이라고, 우리 부부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고 약속도 했다. 우리는 페리호에서 자리를 옮겨가며, 밤바다와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고는 침실에 들어가 내일을 기약하였다. 배는 별빛을 끌어당기며, 9시간 에게해의 밤바다를 동쪽으로 가른다.
2013. 8. 2(금) - 터키 진입, 에페소/파묵칼레 즐기다.
드디어 새아침이 오고, 터키의 턱밑에 있는 그리스의 키오스섬이 우리를 맞이한다. 경상도 출신의 한국인 아줌마가 경영하는 Kim’s Chinese라는 음식점에서 간단하게 빵류로 식사를 한다. 식당의 옥상에 올라가니, 야자나무 건너 구름에 가린 이국의 아침 바다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터키에 10년, 그리스에 20년을 살았다는 아줌마의 끈질김이 머나먼 타국 이곳에도 한국의 심장이 뛰게 한 것이리라. 아줌마는 이야기를 꺼낸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성미가 너무 급하고 국가에 대하여도 너무 요구하는 것이 많아 걱정이라고 말이다. 그녀는 이어서 새롭게 뽑힌 첫 여성 대통령이 취임 후 6개월 현재까지 그 직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단다. 새로 대통령을 뽑았으면, 좀 더 기다리면서 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면 좋겠다는 훈수를 두고 있었다.
식당 정문을 나가니, 붉은빛에 흰빛이 섞인 얼룩배기 염소인지, 양인지 두 마리의 가축이 고삐를 매고 있었다. 나는 아내와 교대로 가축의 줄을 잡고 사진을 찍으며, 유럽의 시골을 느껴본다. 한낮 뜨거운 섬이 상쾌한 바닷바람을 몰고 온다.
다시 배에 오른다. 항구의 건물 위에 벌써 붉은 빛깔의 터키 국기가 휘날린다. 터키 국기는 그믐달이 별을 안고 있다. 거기에는 진보와, 전 국민 마음의 일치, 그리고 독립 등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단다. 별은 샛별을 뜻하며, 달과 별이 함께 어울린 모양은 선과 행복을 상징하고 있다고 한다.
배를 타고 50분쯤 지나 배는 우리 일행을 내려놓는다. 여기는 체스메항, 출입국관리사무소를 통하여 입국수속을 밟는다. 드디어 이번 여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나라, 옛날 토이기라고 불렸던 나라 터키에 진입한 것이다. 2002년 월드컵 4강전에서 만났던 나라, 6.25 전쟁에 14,900여 명을 파병하여우리를 도와주었던 형제의 나라.
터키의 체스메항에서 약 2시간 버스에 몸이 실려 에페소로 간다. 차창 밖에는 옥수수밭이 끝없이 펼쳐진다. 그리스와 터키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만큼이나 가깝고도 먼 나라. 요즘은 그리스의 경제사정이 붕괴되면서 예전보다 좋은 관계로 가고 있다고 한다. 그리스에서는 경제문제를 일부라도 해결하기 위하여 터키의 관광객을 유치하려고 노력 중이란다.
드디어 터키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유적지 에페소이다. 헬레니즘시대에 건축되어 4세기쯤 지진으로 폐허가 되었다는 곳, 그 당시 2만 4천 명 정도를 수용했다는 대극장을 본다. 우리말로 된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삼성에서 이곳에 안내판을 만들어주었단다. 삼성이라는 마크가 있으니, 많은 돈도 들어갔으리라. 말 그대로 웅장하기 이를 데 없는 유적들이다.
왼쪽으로 눈을 돌려 이곳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셀수스도서관에 눈이 머문다. 정면에는 지혜, 운명, 학문, 미덕을 상징하는 여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 페르가몬에 이어 세계 3대 도서관으로 1만 2천권의 장서를 갖췄다는 도서관이다. 시리아풍으로 조각된 신들의 부조 하드리아누스신전의 뼈대를 보면서 원래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Hitit라는 호텔에 딸린 식당에서 현지 음식으로 점심식사를 하였다. 터키에서 가장 많이 먹은 것은 빵도 빵이지만, 모든 음식에서 사용되는 토마토도 상위 순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에페소의 가죽제품 쇼핑몰로 들어갔다. 주로 양가죽으로 만든 옷들이다. 모델들의 패션쇼가 펼쳐진다. 통통 튀는 우리 아내도 모델이 되어 평소에는 전혀 보지 못했던 쇼를 펼친다. 경상도에서 교장을 하는 친구 선하도 선글라스차림의 모델로 무대 위를 씩씩하게 누빈다.
그리고 우리 일행은 다시 버스에 오른다. 거기에는 4시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드디어 1988년 유네스코 세계자연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목화성이라는 별명을 가진 파묵칼레가 눈에 들어온다.
구릉을 흘러내리는 탄산수소칼슘을 포함한 온천수가 기나긴 세월에 걸쳐 결정을 만들고 이들이 모여 하얀 성을 만들어낸 곳, 알래스카의 낮은 산에 눈이 하얗게 내린 것 같은 언덕 위에 족욕에서 바지를 걷었다. 그리고 족욕을 한다. 이국에서 누리는 호강이다. 돌이 패여 만들어진 도랑에 온천수가 흐른다.
떠나야할 시간이 되었는데도 발이 계속 물속에 있고 싶어 한다. 어떤 외국인은 그 도랑에 온몸을 담그고, 완전 온천욕을 즐긴다. 1996년 방문했던 미국 로키산맥에 있는 옐로스톤이 생각난다. 그곳은 온천수에 황이 섞여있어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언덕이 노랗게 보인다. 카메라의 배터리가 방전되어 소중한 장면을 직접 찍을 수가 없었다. 시선을 바꿔보니, 아래쪽에는 마치 계단식 논처럼 층을 이룬 곳마다 온천수를 가두고 있다. 넘치는 온천수는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려 만들어진 비경이 내 눈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는다.
온천의 뒤엔 기원전 2세기경 페르기몬 왕국에 의해 세워진 히에라폴리스 유적이 자리잡고 있었다. 더위에 지친 우리는 멀리서만 그 유적을 바라보았다. 우리 일행은 C$H Hotel Pamukkale호텔 투숙하여 저녁식사를 한다. 북적북적 호기심 가득한 동서양 사람들이 자신에 맞는 음식을 고르고 있었다. 우리는 오늘도 터키의 음식에 빠져 있었다. 식성이 참 좋은 나와 아내는 어디에서나 현지음식에 충실하였다.
식사 후 해가 떨어지자, 아내와 함께 호텔의 수영장으로 갔다. 다리가 불편한 나는 물에 들어갔으나, 수영은 할 수 없었다. 아내는 자유형‧평형‧배형 등 다양한 수영의 실력을 내게 보연준다. 미스코리아 인어라고 이름을 붙여주어야겠다.
수영장 한쪽에서는 한 명의 무희가 나와 밸리댄스 공연을 펼친다. 수영복차림으로 구경하던 내 곁으로 무희가 슬그머니 다가온다. 그리고는 내 손을 잡아 무대로 끌어올린다. 나는 무희가 걸쳐주는 천 조각으로 몸을 살짝 가리고, 수많은 관객 앞에서 뜻하지 않게 국제 공연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해외에서의 잊을 수 없는 하루였다.
2013. 8. 3(토) - 카파도키아에 빠지고, 동굴호텔에 들다.
아침, 호텔에서 출발한 우리 일행은 아침에 잠깐 파묵칼레의 면제풍 쇼핑몰 Evazara에 들른다. 남자 점원, 여자 점원들과 사진도 찍으면서 물건들을 본다. 어디에서나 쇼핑의 주요 고객은 여자들이 되어있었다. 남자들은 그저 그 뒤를 따라다니는 보조역할이라고나 할까? 아내는 굳이 내 눈에 별로 들어오지 않는 버버리 무늬의 남방을 산다. 잠시 쇼핑몰에서 빠져나온 나는 아내와 노천온천이 바라다 보이는 언덕을 배경으로 보고 사진을 찍었다. 현지인과의 인증샷도 남겼다.
버스에 다시 올라 머나먼 카파도키아를 향한다. 동굴유적으로 유명한 그곳까지 장장 9시간의 강행군이다. 얼룩배기 황소가 누워있는 것 같은 산맥들이 우리를 맞이한다. 피부병에 걸린 것처럼 듬성듬성 나무가 나있는 메마른 언덕에는 풍력발전을 위한발전기들이 하얀 날개를 조는 둥 마는 둥 돌리고 있다.
들판은 스프링클러가 작동하는 곳만 초록빛깔이고, 나머지 지역은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기후적으로 보면 이곳은 준사막에 해당한다. 옥수수밭이 연속으로 펼쳐진다. 감자밭도 보인다. 그리고 너른 벌판을 따라 대규모 해바라기밭이 계속 바톤을 다시 잇고 있었다. 마치 고흐의 해바라기라는 작품이 연속으로 펼쳐진 것 같다.
밀을 재배한 곳은 수확이 끝나 황토빛깔을 띠고 있었다. 아무래도 터키는 밀밭의 푸르름이나 황금물결로 출렁거리는 봄에서 초여름쯤에 오는 것이 최고이리라. 우리 같은 선생들이야 한여름이나 겨울의 방학 때 밖에 올 수 없으니, 안타까운 마음만 들었다.
드디어 아나톨라아의 중동부를 일컫는 고대지명을 가진 고대왕국 카파도키아의 팻말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나와서 처음 동굴호텔에 들어간다. 그 이름은 Alfina Hotel. 장거리를 종일 달려온 우리는 허기에 맞춰 바로 저녁식사를 한다.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가자, 돌을 직접 파서 만든 벽에 새긴 문양의 고풍스런 분위기의 평면 부조에 고급 식탁까지 놓여 신비로움을 더해 준다.
식사 후 추첨에 의하여 방을 정한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이 호텔은 5층까지 있었다. 다리가 불편한 나는 하필이면 5층이 뽑혀 다리운동을 더 할 수밖에 없었다. 동굴호텔 5층에 올라가 주변의 풍광을 카메라에 담는다. 석양빛과 어울려 이곳의 아름다움이 배로 증가하는 것 같았다.
이 동굴호텔은 화산이 분출할 때 쏟아져 나온 화산재가 두껍게 쌓여 만들어진 응회암에 굴을 파서 만들어진 호텔이다. 이곳은 약 300년 전부터 동굴을 파고 사람이 살던 곳을 최근에 대대적으로 공사를 하여 호텔로 만들었다고 한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훈훈하단다. 방 안에는 분위기 있는 침대, 탁자가 고급스럽게 놓여있었고, 한쪽엔 샤워실까지 갖추고 있었다. 남미의 우유니에 가면 소금호텔이 있다지만, 이곳 정원에서 올려다보는 호텔 풍경은 그야말로 나를 다른 세상에 와있다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식사 후 버스로 이동하여 동굴로 이루어진 공연장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펼쳐지는 터키 전통무용과 배꼽춤이라 불리는 밸리댄스를 본다. 머리와 피부빛깔이 다양한 무용수들이 자리를 잡고 공연을 기대하고 있다.
메카를 향해서 기도를 한다. 처음 시작되는 춤은 종교 의식인지라 사진 촬영조차 금지되었다. 남자들이 하얀빛의 둥근 치마를 입고, 목을 한쪽으로 기울이고, 연신 시계방향으로 돌고 돈다. 세마춤이라고 한다.
짧지 않은 시간 빙빙 연속으로 돌면서 엄청 어지러울 것 같다. 다음에 전개되는 터키 밸리댄스는 다산을 의미하고, 그녀들이 몸을 흔드는 것은 향기를 뿜어내기 위함이란다.
전통적 악기로 쏟아내는 그들만의 신나는 가락은 내 엉덩이까지 들썩이게 했다. 흥이 많은 관객들은 무대로 나와 함께 춤을 춘다. 하지만 머나먼 길을 달려온 나는 아내와 함께 자꾸만 졸음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었다. 70유로를 준 본전 생각이 조금은 나고 있었다.
2013. 8. 4(일) - 카파도키아에 취하고, 앙카라에 진입하다.
아침식사 후 햇살을 뚫고 버스가 움직인다. 드디어 영화 스타워즈가 촬영되었다는 카파도키아에 발길이 닿는다. 자연이라는 지질시대의 조각가가 이 세상 있을 수 없는 걸작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 작품들이 오히려 우리를 바라보는 것 같다. 비경의 연속이다. 기암괴석이 가득한 국립공원 괴레메 골짜기의 파노라마가 영화필름처럼 눈을 자극한다. 동굴주거지가 여기저기 눈에 들어온다.
‘좋은 말들의 땅’이라는 뜻의 카파도키아는 지질시대의 야외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다양한 지형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마치 다른 행성에라도 와있는 느낌이다.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버섯바위. 거대한 바위에서 아랫부분이 상대적으로 무르면 바람에 의해 침식을 더 많이 받는다. 결국 풍화에 의한 침식을 덜 받은 머리 쪽이 크게 남아 버섯바위가 된 것이다. 버섯바위의 모습은 사람이 머리에 갓을 쓴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남자의 성기 같기도 하다.
우리 일행은 비둘기 둥지로 가득한 바위산 비둘기 계곡이라 부르는 우치사르를 올려다 본다. 감탄을 연발한다. 카파도키아는 지금도 늠름한 모습을 뽐내고 있는 핫산(3314m)과 예르지예스산(3917m)에서 300만 년 전쯤 화산이 분출하면서 화산재가 바람에 의해 날아와 이곳에 두껍게 쌓여서 만들어진 퇴적지층이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침식을 받은 정상의 뾰족한 봉우리와 검은 점처럼 보이는 굴들이 오밀조밀 눈으로 들어온다.
옛날 이 지층에 석굴을 파고 살았던 사람들의 체취가 나는 것 같았다. 멀리서 보면 골다공증 환자의 뼈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모습, 1950대까지도 사람들이 이곳에 많은 살았다고 한다. 지금은 유네스코 자연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 우리 인류의 귀중한 자산이다.
다음은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지낸 지하도시 데린구유. 카파도키아를 더욱 경이로운 곳으로 만드는 또 하나의 요소는 최대 3만 명까지도 수용이 가능한 대규모의 지하도시. 10만 명이 30년 정도는 고생해야 완성할 수 있다는 데린규유가 만들어진 시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곳의 본격적인 확장기는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여기에 들어와 교육기관과 교회, 와인저장고 등을 축조하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한다.
현재 작은 규모의 마을부터 거대한 도시에 이르기까지 총 40여개에 달하는 거주지가 발굴되었으나, 오늘날 일반인에게는 극히 일부만이 공개되고 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곳 중 하나가‘깊은 우물’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곳의 지하도시 데린구유이다.
이 지하도시는 1965년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되기 시작하였다. 전체적으로는 지하 20층까지 만들어졌으나, 현재 관람객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지하 8층까지로 실제로 관람할 수 있는 구역은 총 면적의 10%에 지나지 않는다. 미로처럼 얽혀있는 좁다란 통로 곳곳은 무너져 내린 곳도 많았다. 하지만, 수직 공기통로에 의한 내부의 환기시설은 아직도 밖의 맑은 공기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자그마한 기념품가게에 발을 들여놓는다. 점원쯤 되는 청년에게 강남스타일을 아느냐고 물으니, 바로 말품 포즈를 취한다. 내가 웃으며 함께 추자고 권하니까, 바로 응한다. 나는 잠시 카파도키아에서 싸이를 대신하여 말춤을 추었다. 역시 대단한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붉은악마의 함성을 만든 우리나라의 월드컵 4강의 위력보다도 훨씬 강한 이미지를 준 것이 분명했다.
점심은 동굴레스토랑 Dede Efendi Kaya에서 항아리케밥이다. 항아리 안에 잘게 썬 고기와 더불어 양파, 마늘, 가지, 감자 등을 넣어 밀봉한 후, 80℃의 불에 3시간을 구워 항아리 위에 뚜껑을 열고 제공되는 퓨전케밥의 백미이다. 식성이 우등상 감인 나는 아내와 여행 중 현지 음식을 맘껏 즐긴다. 아내가 나를 닮은 건지, 내가 아내를 닮은 건지, 여러 가지로 유사점이 많다. 일행 중에는 여행 내내 한국에서 가져온 김, 고추장, 멸치 등을 곁들여 식사를 해결하는 친구 부부도 있었으니 말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보석이며, 12월의 탄생석인 터키석 쇼핑몰로 들어간다. 터키석은 연한 청색의 보석이다. 아직도 철이 없는 나는 보석들을 눈으로만 대충 보고, 아내에게 반지 하나 사주지 못했다. 아내야말로 겉으로는 무표정이었지만, 실망했을 것은 분명하였다.
다시 버스에 올라 터키의 수도 앙카라 쪽으로 간다. 가는 길 중간에 소금호수 투즈골루(Tuz Golu)를 만난다. 해발 1700m의 고원에 위치하며, 면적은 면적 1500km2인 터키 최대의 반 호수에 이어 제2의 호수이다. 염분이 높아 여름에 플라맹고들이 잠시 쉬었다 갈뿐 생명체가 살아갈 수 없는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곳이다. 입구에 소금비누를 파는 가게가 눈에 띈다. 상인들은 지나가는 나와 아내를 붙들고 소금비누를 칠해주며 견물생심을 노린다. 상전벽해라던가, 지질시대에 바다였던 이곳이 수백만 년 동안 융기하여 소금기 가득한 호수가 된 것이다. 현재는 건기인지라 새하얀 소금밭이 만년설의 빛깔로 넓디넓게 펼쳐져 있었다. 소금밭에서 반사되는 자외선 때문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대략 5시간 정도의 버스여정이 끝나고 눈을 뜨니, 터키의 수도 해발 800m에 위치한 앙카라이다. 시내에 있는 터키군의 한국전 참전기념비가 보인다. 묵념을 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정문이 닫혀있었다. 그냥 밖에서 큰 마당만한 태극기와 터키 국기를 보고, 석가탑 모양을 닮은 추모탑에 경의를 표하며, 사진 몇 장 찍는 것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터키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아타튀르크 케말, 또는 케말 파샤의 묘는 내가 잠깐 조는 사이에 지나가 버렸단다. 아쉬움이 가슴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었다. 그래도 터키의 초대 대통령 케말 파샤에 대하여 언급을 안 할 수 없다. 원래 이름은 무스타파 케말이고, 파샤는 장군이라는 뜻이다.
터키의 전신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1914년 독일, 오스트리아가 합작을 펼친 제1차 세계대전에 가담하여 1918년 패전국이 됨에 따라 현재의 시리아, 아라비아, 아르메니아 등 본토를 제외한 광대한 국토를 잃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오스만제국이라는 국가 자체가 사라질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에 당시 총사령관이었던 케말 장군의 지략과 강력한 반격을 통하여 적을 격퇴하고 현재의 터키를 사수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1923년 터키의 건국과 함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수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아깝게도 57세에 집무 중 쓰러져 숨지고 말았다.
케말 파샤는 이슬람교의 국교 폐지, 일부다처제 폐지, 여성의 참정권 실현, 여성의 얼굴을 가리는 베일 착용금지 등 과감한 개혁을 통하여 현재의 터키를 만들어 터키의 국부로 칭송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아타튀르크(Ataturk)라는 칭호는‘터키의 아버지라는 뜻’이라고 한다. 터키 곳곳에 케말의 동상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앙카라의 번화가 Turist호텔에 짐을 내려놓고, 아내와 함께 다시 밖으로 나간다. 이번 여행일정에 동행중인 자매 아가씨들이 밖으로 나갔다가 현지인들의 시선이 무서워 들어왔다며, 나에게 의지하며 다시 따라나선다. 앙카라의 건조한 공기가 온몸을 자극한다. 차량이 쉴 새 없이 오가는 시내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케말 파샤의 동상을 보며 걷고 있는데, 우리 일행의 뒤쪽에서 헬로우하며 누구를 부르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린다. 뒤를 돌아보니, 머리가 희끗한 터키 사람이 행인들 속에서 빠져나오며, 우리를 부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그리고는 마스터카드를 내게 보여준다. 의아한 생각이 들던 나는 그 카드를 자세히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것은 내 눈에 익숙한 아내의 국민카드였던 것이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순간 나는 피를 나눈 형님을 만난 것처럼 진한 감동을 느끼게 되었다. 아내가 스마트폰 케이스에 넣었던 카드를 떨어트린 것이었다. 나는 그 사람에게 땡큐를 몇 번 외치며,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형제애에 크게 감동하였다. 형제국 터키 사람들에 대한 좋은 인상이 오래도록 남아있을 것 같다.
저녁식사 시간 때문에 햇살을 피해 바람 몇 줄기에 만족하고, 호텔로 들어왔다. 저녁식사 후 잠깐 있으니, 어둠이 깔리고, 도시의 불빛이 살아나고 있었다. 우리는 일행과 함께 다시 시내로 나왔다. 식사 전 걸었던 거리를 지나 횡단보도를 몇 번 건너 불빛이 휘황찬란하게 움직이는 곳으로 끌려갔다. 지하철로 들어가는 입구도 보인다.
화려한 야경이 우리를 끌어당긴다. 그곳에서는 야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사람 가득한 호수가 보였다. 야시장에선 터키의 각종 토산품과 음식들을 펼쳐놓고, 사람들을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프리카 토산품을 파는 가게가 눈에 띄었다. 나무로 만든 아프리카 인형을 들었다. 그리고 가격을 물으니, 우리 돈으로 3만 5천원 정도란다. 그러나 주머니에 유로화가 없어 그냥 놓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흑인 아가씨와 어깨동무를 하고, 아프리카 향수냄새에 취하기도 전에 아내가 카메라의 셔터를 누른다.
적·황·녹·청·보라빛깔의 다양한 분수의 물줄기 위로 폭죽소리가 우리들의 눈을 하늘로 끌어올린다. 일산호수공원의 노래하는 분수대의 축소판처럼 보였다. 오색불꽃이 하늘을 태우고, 유성우처럼 퍼져나간다. 우리는 호수를 한 바퀴 돈다. 놀이기구인 바이킹을 타는 사람들의 비명이 쏟아진다. 조명이 연속 바뀌는 거대한 원형 물체가 수직으로 빙글빙글 돌며, 우리들의 시선을 잡아당긴다. 터키사람들과 수많은 여행객들은 비빔밥처럼 섞이게 되었다.
출발할 때 걱정하던 불편한 다리는 조금씩 호전되어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다. 호텔로 들어온 우리 일행은 멀리 실크로드의 끝자락 앙카라에서 또 화려한 꿈나라로 향하고 있었다.
2013. 8. 5(월) - 에스키쉐히르에 빠지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내의 손을 잡고, 호텔을 나선다. 나는 원래 여행 중엔 호텔에서 쉬고, 잠자는 시간조차 아까워한다. 밖으로 나온 아내는 공기가 차다며, 다시 들어가잔다. 그래도 난 그냥 들어갈 수는 없었다. 아내만 혼자 들여보냈다. 남자와 여자가 느끼는 기온에 대한 감각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아침식사 후 에스키쉐히르로 이동한다. 차창 밖에서는 터키 군부대의 막사들이 보이고, 탱크 같은 무기들의 모습도 차창 안으로 들어온다. 가는 길에 고대 프리기아 왕국의 수도 고르디온엘 들른다. 황금손의 주인공 마이더스왕의 묘와 박물관을 살핀다.
터키의 교육도시이며, 베네치아라는 에스키쉐히르의 햇살도 여전히 주사바늘처럼 살갗을 찌르고 있었다. 유람선을 타고 화려한 색상의 도시 에스키쉐히르의 풍광에 빠져든다. 녹조가 가득한 운하는 물속이 보이지 않았다. 무지개다리를 연속으로 통과하며, 조각 작품을 쌓아놓은 것 같은 운하 주변의 도시를 올려다본다. 유람선으로 들어오는 도시의 풍광은 유화 전시회를 보는 느낌이었다.
다시 터키의 전통가옥이 있는 구시가지를 둘러본다. 쏟아지는 아시아 서쪽 끝의 따가운 햇살에도 이젠 적응이 되었다. 불규칙한 길에 건물들이 놓여있었지만, 다양한 색깔을 발산하고 우리를 맞이하는 풍치는 독특한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산책 중 자전거를 끌고 느릿느릿 걷는 70대 정도의 머리가 하얀 동네 사람을 만났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가족 중에 한 사람이 한국전에 참전하여 전사했다고 한다. 그는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부터는, 더욱 친밀하게 말을 건다. 아마 내가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으면, 집으로 초대하여 재워줄 태세였다.
나는 그 사람과 형제국가의 우정을 온몸으로 느끼며, 악수와 함께 진한 포옹을 하였고, 그 장면은 여지없이 아내의 카메라가 놓치지 않았다. 거의 아시아의 동쪽 끝과 서쪽 끝의 텔레파시가 통하는 순간이었다.
햇볕이 아스팔트 위에 가득 깔린 거리를 지나 시내 공원에서 일행들과 석류를 마시며, 더위를 시킨다. 물담배를 피는 현지인에게 포즈를 취해보라며, 내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물이 필터 역할을 하는 이 담배는 원래 중동지방에서 시작하여 지금은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젊은이 들어 핀다는 소문이 있다.
오늘의 호텔은 Hilton Garden Inn Kutahya이었다. 저녁식사 후 아내와 함께 시내를 산책한다. 스마트폰 매장엔 우리나라 제품이 매장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다. 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 유행했던 휴대폰이 이곳에서는 지금도 인기를 끌고 있는 것 같았다. 에스키쉬헤르는 도자기로도 유명한 곳이란다. 가게에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화려한 무늬의 도자기들이 내 눈을 끌어당긴다. 아내는 무늬가 예쁜 미니꽃병을 몇 개 샀다.
시내 길을 걷다가 꽃집 앞에서 터키의 젊은이들을 만난다. 함께 사진을 찍자니까, 대여섯 명이 줄을 맞춰 선다. 아내도 청년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사람들이 모여 술을 한잔씩 하기도 하고 저녁식사를 하는 대형 텐트 음식점을 지나 시시각각 빛깔이 바뀌는 분수대 앞에서 아내와 이야기를 한다. 아내는 여러 개의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는 분수 속으로 들어가 포즈를 취한다. 카메라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호기심 가득하고 센스 있는 아내는 음식도 맛있고, 여행도 참 맛이 있단다.
2013. 8. 6(화) - 이스탄불에서 아시아, 유럽을 품다.
여행이 절정을 맞이하고 있었다. 아침식사 후 동서양이 교차하는 터키의 하이라이트 이스탄불로 향한다. METIN이라는 휴게소에서 버스가 휴식을 취한다. 알루미늄으로 만든 제품들이 눈에 띈다. 싸이를 본떠서 만든 선글라스를 쓴 인형이 보인다. 과연 강남스타일을 토해내는 싸이가 세계적인 가수가 된 것을 실감한다. 4시간여의 여정 끝에 드디어 이스탄불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2000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하던 영원한 수도, 인구 1400만 명의 이스탄불은 유럽과 아시아를 이어주는 세계에서 유일한 도시이다. 지리시간에 보스프루스해협을 공부하며 언젠가 한번 가고 싶었던 이곳은 2700년의 역사를 지닌 터키 제1의 도시이다. 비잔티움, 콘스탄티노플 등의 옛 이름을 가진 이스탄불은 동로마와 오스만제국의 수도 역할을 한 역사의 도시이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문화가 공존하는 이곳의 구시가지는 유네스코 문화제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점심식사는 터키 전통식 아나다케밥이라는 메뉴였다. 터키의 아나다 지방에서 오랫동안 먹었던 케밥요리로, 고기를 갈아서 양념을 한 것으로 길쭉하게 반죽한 다음 석쇠에 구워서 만드는 케밥으로 매콤한 맛이 특징이다.
이스탄불 관광의 시작은 그리스정교와 이슬람문화가 공존하는 성소피아성당(Aya Sophis)이 건물은 TV에서도 세계적인 건축의 명작으로 소개되는 곳이다. 6세기에 만들어진 이 성당은 비잔틴건축의 최고 걸작으로 알려져 있다. 오스만제국이 비잔틴제국을 멸망시키고, 건축 후 900여 년간 기독교 성당이었던 성소피아를 이슬람의 모스크로 전환하여 1935년까지 사용하였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바티칸의 성베드로성당 건립 이전에는 세계 최대의 성당이었단다. 이곳은 빼어난 건축양식을 통하여 세계 7대 불가사의로도 알려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다음은 푸른 타일로 각기 독특한 문양을 갖춘 블루모스크(Sultan Ahmet Cami)이다. 7년간의 건축기간을 거쳐 1616년 완공된 이 사원은 화려한 내부가 장엄하고 품격을 갖춘 터키블루 색상의 타일장식을 하여 블루모스크라는 애칭을 가지게 되었다. 이슬람의 중요한 종교행사와 집회 등의 공식행사를 거행하던 이곳은 전임 교황 베네딕트 16세가 공식적으로 방문한 곳이기도 하다.
햇살 가득한 성소피아 성당과 블루 모스크 사이의 술탄 아흐메드광장엔 인종 페스티발을 펼치고 있는 것 같았다. 세계 각국에서 방문한 사람들이 저마다 다양한 복장과 헤어스타일로 개성을 표출하고 있었다.
술탄아흐메드 광장 중앙에서 하늘을 찌르는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를 올려다본다. 390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이집트에서 가져온 것이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이 오벨리스크를 3개로 분할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운반했다. 현존하는 것은 상단 부분이며, 대리석 받침대는 테오도시우스 1세가 만들게 한 것이다. 그 아래쪽에 있는 청동뱀상은 BC479년 페르시아전쟁 때 페르시아를 격퇴한 전승기념으로 그리스 델피의 아폴론 신전에 있던 것을 가져온 것이란다.
드디어 보스포루스해협 유람이다. 터키어로 보아지치라 불리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좁은 바다, 지리를 좋아했던 내가 꿈에도 그리며 직접 보고 싶었던 곳이다. 나는 유람선의 각 층을 오르내리며 유럽과 아시아로 번갈아 시선을 돌린다.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대는 내 마음은 꿈결이었다. 환상 같았다. 보스포러스 대교의 위용이 나를 압도한다, 대교 위로 수많은 자동차들이 아시아와 유럽 대륙을 연결하고 있다.
유람선 위에서 많은 외국인들과 얼굴을 마주하며 말을 건다. 맨 먼저 만난 사람들은 스위스에서 왔다고 한다. 두 가족이 함께 온 것이다. 한국에 대해서 물어보니,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짓는다. 몇 마디 후 나와 함께 사진을 찍자니까, 그들은 내 곁으로 와서 즐겁게 포즈를 취해준다. 방글라데시 남자도 만났다. 한국에 대해서 관심이 많단다.
이곳은 바다의 좁은 협곡을 따라 흑해에서 마르마라해 쪽으로 32km 길이의 표층해류가 빠르게 흐르고 있다. 지중해에서 출발한 염분도가 높은 바닷물은 비중이 커서 심층수를 형성하며, 마르마라해에서 흑해 쪽으로 흘러간다. 보스포루스해협에는 1973년 만들어진 보스포러스대교와 1988년 완공된 파티대교가 아시아와 유럽의 혈관과 신경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해협의 양편에는 모스크, 궁전, 우람한 저택, 아담한 빌라와 단독주택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뜨문뜨문 건물 또는 언덕 위에는 터키의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유람선이 다리의 아래를 지날 때는 내가 유럽과 아시아 두 대륙을 연결하는 빔에 눌리는 느낌이었다. 이곳은 기독교와 이슬람, 비잔틴과 오스만제국이 경쟁하면서 인류역사의 흐름을 바꾼 핏자국 가득했던 격돌의 현장이다. 유럽과 아시아의 낭만과 문화가 공존하는 곳이다.
터키 잡화시장을 잠시 관람하였다. 아내는 터키석 색깔인 하늘빛 구두를 사가지고 왔다. 참 예뻤다. 밤에 예정되어 있었던 이스탄불 야경투어는 터키의 소요사태로 인하여 취소되었다.
야간 일정이 예정에 없이 바뀐 것이다. 저녁식사 후 나는 아내와 호텔의 길 건너 쇼핑몰로 향했다. 젊은 아가씨 자매도 내 보호를 받고 싶은 지 동행이다. 보석점에 들렀다. 아내는 터키석 무늬의 목걸이와 반지를 골랐다. 앙카라에서 사주지 못한 것을 이곳에서 해결하였다. 아내가 즐거워하니, 내 마음도 가벼워졌다. 자그만 것에도 기뻐할 줄 아는 아내는 낮에 산 구두와 함께 목걸이, 팔찌까지 터키색의 상징인 푸른빛의 세트장식을 하고 있었다.
2013. 8. 7(수) - 톱카프 궁전, 그랜드바자르에 안기다.
아침식사 후 역대 25명의 왕들이 살았던 톱카프궁전으로 향한다. 날씨는 여전히 송곳 같은 여름 햇살이다. 다행히 건조한 탓에 땀이 거의 나지 않는다. 아마 살갗 겉으로 나오는 땀이 바로 증발되는 것이리라. 톱카프궁전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나는 벤치에 올라가 두루미가 서있는 자세로 그 광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폴란드에서 온 털보와 사진도 함께 찍었다. 그곳엔 세계에서 7번째로 큰 86캐럿의 물방울 다이아몬드, 6666개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황금촛대 등 전시되어 있었다.
500년간 유럽을 호령했던 오스만대제국의 사령부로 술탄 메흐멧 2세가 이스탄불을 점령한 이후, 1856년 보스포루스 해협의 돌마바흐체궁전으로 이동해 갈 때까지 380년간 유럽정치의 중심이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대륙을 정복한 술탄이 전리품과 진상품들을 모았던 곳으로 지금도 세계 최대의 보석박물관이 되어 사람들의 눈을 모으고 있는 곳이다.
다음의 5000여 개의 상점에 각종 보석과 토산품이 가득한 시장 그랜드바자르로 간다. 아시아 끝에서 출발한 실크로드의 종착지인 이곳, 그랜드 바자르로 들어서는 사람들은 누구나 진열된 화려한 보석과 상품의 늪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지붕으로 덮여있는 이 거대한 시장은 동서남북의 수많은 골목골목 자리 잡은 상점들이 다양한 인종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가이드는 골목을 잘못 들어서면 길을 잃는다고 겁을 잔뜩 준다.
그랜드바자르는 동서양의 다양하고 귀중한 물건들을 사고 팔던 중요무역상들의 만남의 요충지로서 꾸준한 명맥을 지금도 화려하게 유지하고 있다. 이곳의 정교하게 세공된 순금제품과 터키석 세공품들이 진열장에 들어앉아서 우리들의 눈길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이제 여행을 마무리하는 시간, 우리는 이스탄불의 아타튀르크공항으로 이동한다. 오후 1시 55분 루프트한자 1299편에 몸을 실었다. 서양 사람들로 가득한 비행기는 우리가 경유했던 곳, 프랑크푸르트로 다시 향한다.
비행기가 이륙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점심식사가 나오고 오후 4시 10분쯤 우리는 프랑크푸르트공항에 내렸다. 시간적으로 여유를 가진 나는 아내와 쇼핑몰을 들렀다. 호기심 가는 장면을 찾아 그곳을 배경으로 아내의 사진을 찍는다. 정식 독일 방문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면서 말이다.
독일의 5대 도시인 프랑크푸르트에서 2시간을 좀 더 기다려 오후 6시 30분 인천행 루프트한자 712편에 오른다. 이 비행기를 타고 자다 깨다보면, 인천공항에 도착하리라. 출발할 때처럼 비즈니스석으로 표를 끊지 못했다. 불편한 다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우리 부부의 자리는 비상구가 있는 곳이었다.
그곳은 다행히 다리를 쭉 뻗을 수 있는 자리, 주변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한 두 자리였던 것이다. 나는 아내와 함께 오늘은 일진이 참 좋다고 생각하였다. 복덩이 착한 아내와 함께하니, 늘 좋은 일이 생긴다.
그 자리는 비상구인지라 스튜어디스가 이곳이 해야 할 것을 안내를 해준다. 만약 비상상황이 발생하여 착륙할 경우에 대비, 비상구를 열고 승객들이 탈출할 수 있도록 문 여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녀는 설명서를 가져다주면서 자세히 읽어보라고도 한다.
우리는 신문을 보다가, 음악을 듣다가 이야기를 하다가, 잠에도 빠지다가 하며, 시간을 말리고 있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꿈속에 빠진 시간, 비행기만 혼자서 편서풍을 타고 폴란드 하늘을 벗어나 다시 우랄산맥을 넘는다. 비행기는 왔던 길을 편서풍을 타고 다시 되돌아가는 것이다. 서시베리아평원을 거쳐 몽골, 만주벌판, 그리고 황해바다를 넘는다. 남들은 지루한 비행이라고 생각할 지 몰라도 아내와 손을 잡고 눈빛을 마주치며, 도란도란 얘기를 하며, 즐거운 귀국길을 만들었다.
2013. 8. 8(목) - 돌아오는 길, 다시 하늘을 날다.
눈을 뜨니, 황해가 우리를 올려다보고 있다. 비행기는 휴전선을 비껴 인천국제공항을 향하여 최대한 작은 각도를 만들며 활강한다. 드디어 비행기는 한국시간 11시 50분, 인천공항이 우리를 받아 안는다. 10시간 20분의 기나긴 하늘 여행이었다. 덥고, 습한 고국의 하늘이다. 토종 한국의 여름 공기가 잠시 숨을 멈추게 한다.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각자 짐을 찾고, 일행이 다시 모였다. 기내식으로 아침인지, 점심인지 식사를 했으나, 다시 헤어지는 마당. 친구들 부부와 함께 식당에 들어가 오랜만에 순수 한국 메뉴로 식사를 한다. 그리고 겨울 만남을 약속하며 일일이 악수를 한다.
정류장에 도착하니, 7200번 의정부행 리무진버스가 대기했다는 듯 눈앞에 척 나타났다. 영종대교를 지나 신공항고속도로 곁에 붙어있는 아라뱃길을 향하여 손을 흔든다. 다시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와 해후하며 리무진은 질주한다, 마치 20세기의 카세트테이프가 21세기에 되돌려지듯이 지난번 오던 길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멀리 유라시아대륙을 횡단한 짧지 않은 비행이었다. 실크로드의 끝자락 터키, 그리스와 눈을 맞추고 오는 짧지만, 긴 여름의 여행이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동행한 낯선 세상과 함께한 날들. 내 인생에서 먼 훗날 몇 번쯤은 생각에 잠길 수 있을 단편소설이었다. 보석처럼 소중한 앨범이었다.
'여행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 큐슈여행 (0) | 2014.06.18 |
---|---|
인도차이나반도를 다녀와서(신일중학교 시절) (0) | 2014.06.18 |
아내와 제주도 겨울말미 여행(제주 이주의 계기가 된 여행) (0) | 2013.02.28 |
10년 만의 가족여행 (0) | 2012.03.26 |
겨울 속의 여름 여행 (0) | 2012.03.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