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의 좋은 시 읽기>
못
김춘기
누구나
가슴 깊이
못 하나쯤 박혀 있지.
나이테가 감길수록 더욱 깊이 박히는 못
떠나간 사람들에게
박은, 못
못 빼준 그, 못.
―《정형시학》2020년 여름호
시 읽기
몸의 상처가 흉터를 남기듯이, 영혼이나 정신의 상처, 즉 심리적 외상은 트라우마의 상태로 잠복된다. 랭보가 말한 바,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와 같이 “누구나/ 가슴 깊이/ 못 하나쯤 박혀 있”을 것이다. 개별 실존자의 내부에는 삶의 애환이나 격정이 남긴 실금 같은 고통의 흔적들이 각인되어 있다. 이때 고통은 생을 침잠시키는 기제가 되지만 한편으로는 내적 성숙의 계기를 마련해 준다.
세월이 흐른 어느 날, 흉터의 기록을 더듬어 상처의 연원을 깊이 있게 들여다본다. “나이테가 감길수록 더욱 깊이 박히는 못”처럼, 시간적 거리를 두고 보았을 때 ‘못’이나 ‘못 자국’은 더욱 뚜렷이 보이고 그 의미가 명료해진다. 일반적으로, ‘못 박힌’ 나는 그 행위의 대상 혹은 타자에 대한 연민 혹은 원한이라는 감정의 상태에 처하게 된다.
그런데 이 시조의 종장에서는, ‘못 박은’과 같이 나의 행위를 전경화 시킨다. 의미의 전복을 통한 시적 발상이 이루어지는 부분이다. 그 ‘못 자국’을 내가 아닌 타자의 가슴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나에게 박힌 못이 아니라, 내가 타자에게 “박은, 못”이다. 이때의 반성적 의식은, 내가 상처를 준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들로부터 내가 받은 상처는 언급되지 않는다. 즉, 내가 받은 상처는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 치유가 되었지만, “못 빼준 그, 못.”은 결코 치유될 수 없다는 후회로 남게 된다. 그는 멀리 떠나 버렸고 나는 과거의 그를 찾아낼 수도 다가갈 수도 없다.
지나간 날들은 완전히 지나가 버렸고 돌이킬 수도 없다. 내 가슴의 중심에 박혀 있는 못, 그리고 자책의 감정은 회복할 수 없는 과거의 사건들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지금-여기에는 과거의 나도 없고 그도 없다. “그 못”은 삭아 없어지지 않은 채 순전한 회상의 마음속에 박혀 있다.
(추천: 염창권 - 광주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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